끄레믈의 서기장들/고르바초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Ⅴ) 옐찐의 등장

twinkoreas studycamp 2021. 8. 2. 13:55

 

 

김태항(정치학 박사)

 

 

미하일 쎄르게이비치 고르바초프(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ев) 4

 

 

김일성의 소련 방문과 서울 올림픽

 

88 Seoul Olympic(IOC)

 

1984년에 이어 불과 2년 만인 198610, 북한의 주석 김일성은 서기장으로 취임한 고르바초프를 만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이번엔 열차 편이 아닌 비행기를 이용했다. 해외 방문을 자주 하지 않는 김일성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급작스러운 방소의 이유는 한·소 관계의 발전 양상에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은 고르바초프에게 소련과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 대해 우려를 전했고, 주한미군과 핵무기 철수를 위해 미국에 압력을 넣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19865월에 작성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보고서에 따르면, 소련은 이미 남한에 대해 경제·문화적 유화 노선을 결정했다. 이에 따라 소련은 제3국을 통한 남한 기업과의 교역을 장려했고, 특히 예술과 스포츠, 문화 부문에서는 직접 교류를 허용했다.

 

(mongoliafaq.com)

 

김일성은 고르바초프에게 2년 전 체르녠까가 약속한 군사 및 경제원조의 이행을 재차 촉구했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체르녠까가 제공하기로 한 것보다 성능이 향상된 군사 무기의 원조를 약속했다. 오랜만에 소련과 북한과의 관계가 활기를 띠면서 1987년 양국은 각각 평양과 모스크바에 대표단을 파견하게 된다.

 

그러나 외형상의 원만한 분위기와는 달리 김일성은 고르바초프를 신뢰하지 않았다. 평양의 외교가에서는 김일성이 고르바초프에 대해 지긋지긋한 흐루쇼프를 능가하는 수정주의자라고 빈정거렸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다.

 

일례로 19918월 소련에서 고르바초프에 반대하는 보수 쿠데타가 발생했을 때, 북한에서는 자동차들이 환희의 경적을 울리면서 도로를 질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쿠데타는 3일 천하로 끝나게 되고, 사태가 급반전되면서 북한으로서는 고르바초프보다 훨씬 수정주의적이며 반동적인 옐찐이 헤게모니를 쥐게 되자, 심각한 곤경에 처하게 된다.

 

19885월 북한의 외교부장 김영남은 모스크바로 날아가 서울 올림픽 불참 요청과 더불어 고르바초프가 제시한 새로운 사고정책의 위험성을 이야기했다. 이에 대해 소련 당국은 서울 올림픽에 참가함과 동시에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도 참가하겠다는 약속으로 대응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과 1984LA 올림픽이 미·소 주도의 보이콧으로 인해 반쪽 올림픽으로 치러졌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은 동·서 양대 진영의 거의 모든 나라가 참가한 진정한 지구촌의 축제가 되었다.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을 비롯하여, 3세계 국가들은 남한이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이자, 가난에 찌든 나라가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사실은 농구 경기에서 소련이 미국을 이기자, 남한 관중들이 열렬한 갈채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을 2억 명이 넘는 소련 시청자들이 TV를 통해 지켜보았다.

 

서울 올림픽 참가를 계기로 소련공산당의 고위 관료들, 언론인들, 그리고 일반 인민들의 남한에 대한 인식이 극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소련공산당 정치국은 올림픽 폐막 후 즉각 남한과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관계 개선을 도모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그나쪤까(rg.ru)

 

고르바초프의 대변인과 이따르 따스(ИТАР-ТАСС) 통신 사장을 역임한 비딸리 이그나쪤까(В. Н. Игнатенко)얼마 전까지 한국에 대한 나의 인식은 모두 낡은 것이었다. 마치 21세기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충격적인 느낌이었다.”라고 언급했다.

 

이미 고르바초프는 서울 올림픽 개막식 하루 전인 1988916일 동시베리아의 끄라쓰나야르스크(Красноярск)에서 한반도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남조선 간의 대화를 통해 상황 진전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한반도 정세는 여전히 복잡한 상태로 남아있다. 그러나 한반도의 전반적인 상황이 개선되고 있음에 따라 남조선과의 경제 관계를 궤도에 올려놓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소련의 최고지도자가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과 가까운 동시베리아 지역에서 한국을 향해 경제 관계 수립 가능성을 제시한 것은 대단히 주목할만한 일이었다. 결국 2년 뒤 한국과 소련은 국교를 수립(1990930)하게 된다.

 

동시베리아 끄라쓰나야르스크 중심가의 야경(wikipedia.ru)

 

 

 

노보에 믜쉴례니에(Новое мышление; new thinking)

 

고르바초프의 뻬레스뜨로이카가 주로 소련의 국내 문제, 즉 경제개혁을 겨냥한 정책이라면, 대외정책상의 개혁 노선은 노보에 믜쉴례니에(새로운 사고 또는 신사고)’로 표현되고 있다.

 

새로운 사고라는 용어는 이미 1984년도에 등장했지만, 대외정책의 공식 개념으로 제시된 것은 볼셰비키혁명 70주년을 맞이하여, 198711월에 출간된 고르바초프의 뻬레스뜨로이카와 새로운 사고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저서에서 노보에 믜쉴례니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새로운 사고란 전쟁과 평화에 대한 기존의 전통적인 개념을 버리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전쟁의 정치적 기능은 전쟁에 대한 정당화로 항상 합리화됐지만, 핵전쟁은 단지 비합리적일 뿐이다. 핵전쟁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존재할 수가 없다. 핵 대결은 전통적 개념의 전쟁이 아니라, 자멸에 불과하다... 군비경쟁(гонка вооружений) 자체가 평화의 적이다. 안보를 위한 유일한 방법은 정치적 해결과 군비축소(сокращение вооружений)뿐이다.”

 

고르바초프가 주창한 새로운 사고의 핵심 개념은 전 세계가 핵전쟁의 위협에서 벗어나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는 이를 위해 오늘날의 세계를 상호의존(взаимозависимость; interdependence)의 세계로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고르바초프의 측근이자, 수석 외교 보좌관이었던 아나똘리 체르니예프(А. С. Черняев)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고르바초프는 어떻게 되든, 군비경쟁을 종식하려고 결심했다. 고르바초프로서는 군비경쟁의 종식 때문에 소련이 위험에 처하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왜냐하면 소련이 무장을 해제한다고 해도, 아무도 소련을 공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옐찐(Б. Н. Ельцин)의 등장

 

(vatnikstan.ru)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이 되자 즉각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와 정치국에 대한 물갈이작업에 돌입했다. 주요 대상은 중앙위원회에 포진하고 있던, 주로 브레쥐네프 시대에 대거 들어온 무능하면서 지적으로 아둔한 사람들과 정치국의 철밥통 노인들이었다. 고르바초프의 물갈이 목적은 뻬레스뜨로이카 추진에 적합한 진보적인 인물들을 등용함으로써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를 강화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바리쓰 니꼴라이비치 옐찐 같은 역동적이고 정력적인 인물이 바로 고르바초프가 원하는 적임자였다. 중앙위원회 서기인 블라지미르 돌기흐(В. И. Долгих)는 서기장의 요청에 따라 스베르들로프스크주(Свердловская область) 1서기인 옐찐에게 전화를 걸어 중앙위원회 건설 담당 책임자로 와달라고 제의했다. 그러나 옐찐은 망설임 없이 그 제의를 거절했다. 이후 정치국원인 리가초프가 다시 전화를 걸어 당신이 거절해 봤자 정치국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니, 즉각 모스크바로 오라고 명령했다.

 

결국 옐찐은 당의 규율에 따라 제안을 받아들였고, 곧장 고르바초프의 측근이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옐찐에게 우리는 당신에게 많은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일은 그리 간단치 않을 겁니다. 열심히 하시오.”라면서 격려했다.

 

두 사람은 1931년생으로 나이도 같고, 시골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성격적으로는 인상에서도 드러나듯이 옐찐이 직선적이면서, 좀 융통성이 없는 편이었고, 고르바초프는 말랑말랑하지만, 상당히 정치적이었다.

 

이후 고르바초프는 옐찐을 모스크바시당 제1서기 및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임명하는 등 출세의 길을 열어줬고, 옐찐은 스베르들로프스크에서 했던 방식대로 직접 발로 뛰는 제1서기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모스크바 시민들은 버스나 지하철, 뜨람바이(трамвай; 전차) 안에서, 시장에서, 각종 식료품 상점 앞에서 옐찐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또한 시민들과의 직접적인 현장 토론을 비롯하여, 자신의 사무실에서도 많은 사람을 접견하였으며, 각종 민원을 처리해주었다. 이로 인해 옐찐은 모스크바 시민들로부터 인기를 얻게 되면서,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결과론적이지만, 고르바초프는 옐찐을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즉 그는 옐찐에게서 자신을 위한 충실한 집행자 역할을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옐찐은 전형적인 인민주의(народничество; populism)적 성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20세기 초 인민 속으로(в народ; 브 나로드) 들어가 인민들과 함께 짜리 체제를 타도하고자 했던, 과거 나로드니끼(народники)들의 행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고르바초프와 옐찐은 뻬레스뜨로이카에 대해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부분적 리모델링을 고려했지만, 옐찐은 기존의 건물을 허물고 완전한 신축을 꿈꿨다.

 

아울러 두 사람 간에는 소련공산당에 대한 시각에서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다. 옐찐은 당이 근본적인 자기 개혁 의지와 역량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는 레닌주의의 고상한 이데올로기와 그것의 실천이 일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극소수의 인물 중의 한 명이었다.

 

옐찐에게 레닌이 만든 소련공산당이야말로 궁극적으로 타도 대상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고르바초프는 국가와 사회에 관한 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기초한다는 희망의 범주 안에서 자유주의적 변화를 시도하고 있었다.

 

옐찐은 특히 소련공산당 고위 간부들의 특권 의식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다분히 감성을 자극하는 발언을 했다.

 

현재 우리 인민들의 삶이 어렵고 고단하기 때문에 나는 이끄라(икра; 철갑상어알)를 먹을 수가 없으며, 자동차를 타고 신호등을 무시하면서 시내를 질주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의 이웃은 아이들에게 먹일 아스피린이 없으므로, 나 역시 수입 의약품을 복용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발언은 옐찐이 권력을 장악하기 전, ‘공산주의자로서의 발언이었다. 그러나 옐찐은 민주주의자로서 권력을 쟁취한 후에는 철갑상어 고기와 알을 먹고 있으며, 신호등을 무시하면서 자동차를 타고 시내를 질주하고 있고, 수입 의약품만 복용하고 있다. 또한 자신이 거칠게 비난했던 화려한 별장을 애용하고 있으며, 모스크바 근교에 수영장과 테니스 코트, 사우나 시설을 갖춘 자신만의 초호화 저택을 지었다.

 

결국 민주주의자로서의 옐찐 역시 자신이 격하게 비난한 이전의 소련공산당 고위 관료들의 행태를 그대로 따라갔던 것이다.

 

옐찐의 측근이었던 수하노프(Л. Е. Суханов)는 이러한 옐찐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의 내면에는 마치 두 사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첫 번째의 옐찐은 정치권력과 특권에 익숙하고, 이것을 박탈당하면 견딜 수 없는 당 지도자다. 또 다른 옐찐은 체제가 부여한 게임의 법칙을 거부하는 반역자다. 이 두 사람의 옐찐이 서로 투쟁하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