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고르바초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Ⅴ) 최후의 레닌주의자

twinkoreas studycamp 2021. 7. 12. 14:31

 

 

김태항(정치학 박사)

 

 

미하일 쎄르게이비치 고르바초프(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ев) -1

 

 

고르바초프(우)와 중년의 푸틴(좌)

 

 

스따르쉰스트보(старшинство; seniority)의 붕괴

 

소련, 나아가 러시아의 슬라브 사회에는 예로부터 젊은 사람보다 연장자이자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지도적인 입장에 서야 한다는, 이른바 스따르쉰스트보(старшинство)라는 전통이 있다. 동양의 장유유서(長幼有序) 또는 경로우대와 유사한 문화인데, 자연히 소련공산당 정치국 내부에도 이러한 전통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러나 짧은 기간 내에 고령의 서기장들이 연달아 사망하자, 정치국의 노인들도 이제는 스따르쉰스트보를 고집할 수가 없게 되었다. 80세의 찌호노프와 76세의 그로미코, 71세의 그리쉰 등이 정치국 내에서 힘 좀 쓰는 노인들이었는데, 그나마 가장 젊은 축에 드는 그리쉰이 서기장 자리를 탐내고 있었다.

 

사실 체르녠까가 서기장 자리에 앉아 있을 때조차도 사람들은 그가 일시적이고, 중간자적인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다음 서기장이 과연 누구냐 하는 것이었다.

 

중년의 그리쉰(좌)과 흐루쇼프(우)

 

세 명의 인물들이 하마평에 올랐는데, 고르바초프, 그리쉰, 로마노프였다. 이중 가장 액티브하게 움직인 인물은 모스크바시당 제1서기인 그리쉰이었다. 그는 서기장이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들끓는, 한 마디로 능수능란한 궁인(宮人; царедворец)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71세였고, 무엇보다도 모스크바 시민들이 아주 싫어하는 인물이었다. 더욱이 당내 농업 마피아 세력의 두목으로서 부패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기도 했다.

 

 

말년의 그리쉰. 1992년 5월 그리쉰은 연금을 신청하러 복지국 사무소를 방문했다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한다. 당시 77세.(proekt-wms.narod.ru)

 

그리쉰은 정치국원의 화신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소련공산당의 정치문화에 특화된 인물이었다. 마치 기계의 일부분처럼 움직이는 그런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한, 즉 러시아의 속담처럼 생선도 아니고, 고기도 아닌(ни рыба ни мясо; 니 릐바 니 먀싸) 그런 사람이었다.

 

아울러 그리쉰의 정신상태 또는 사고방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아들의 결혼 관련 에피소드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쉰의 아들이 라브렌찌 베리야의 딸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베리야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스딸린 시대의 악명 높은 도살자였는데, 1953년 스딸린 사망 이후 흐루쇼프에 의해 총살당한 인물이다.

 

베리야는 처형 대상자를 직접 고문하는 등 사디스트적(sadistic) 성향이 강한 인간 백정이었다. 열심히 고문과 처형을 마치고 휴식을 취할 때는, 비밀경찰들이 시내에서 납치해 온 아름다운 여성들과 재미를 보곤 했다. 어느 날 16세의 아리따운 소녀가 베리야의 눈에 들었는데, 그녀가 17세가 되자 아예 살림을 차렸다.

 

그리쉰의 아들이 사랑에 빠진 여자가 바로 이 소녀가 낳은 딸이었다. 그러나 이 소녀, 즉 딸의 엄마가 결혼을 반대하자, 그리쉰이 직접 이 여자를 찾아간 것이다. 그리쉰은 자기 아들과 베리야의 딸과의 결혼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그리쉰이 생각할 때, 베리야의 딸은 용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로마노프(위키피아)

 

그리쉰의 경우 모스크바 시민들이 주로 혐오했지만, 63세의 그리고리 로마노프(Г. В. Романов)는 소비에트 연방 전체에서 유명한(notorious) 인물이었다. 오랜 기간 레닌그라드 제1서기였던 그는 부패에 관한 한 그리쉰 못지 않았고, 자기 딸의 결혼식 때 에르미따쉬(Эрмитаж) 국립박물관에서 황실의 식기를 가져다가 연회장에서 사용하기도 하는 등 독선적이고 교만한 인물이었다. 이때 레닌그라드 시민들은 로마노프를 타도하자!”라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고르바초프의 서기장 등극을 막으려는 대표적인 사람들은 로마노프와 정치국의 최고참인 찌호노프였다. 찌호노프는 이미 체르녠까를 서기장 자리에 앉히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이번에도 그는 로마노프와 함께, 무능하고 부패한 그리쉰을 밀고 있었다.

 

그러나 당 중앙위원회의 일반 위원들은 압도적으로 고르바초프를 지지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로미코 외무장관과 까게베(KGB) 의장인 빅또르 체브리코프(В. М. Чебриков)가 고르바초프를 지지한 것이다.

 

사실 고르바초프와 그로미코의 인연은 1982년부터 본격화되는데, 당시 안드로뽀프가 서기장에 올랐을 때, 고르바초프는 최고인민회의의 외무위원회 의장이 되어, 원로 외무장관인 그로미코와 지속적인 접촉을 해왔다.

 

또한 까게베의 우두머리인 체브리코프는 그리쉰과 브레쥐네프 측근들과의 스캔들을 폭로함으로써 고르바초프에게 지원 사격을 해주었다.

 

나아가 강성 실세인 우스찌노프도 사망한 마당에 정치국에서 그로미코의 권위와 영향력에 도전할 인물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그로미코는 1989년 자연사할 때까지 정치국원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고, 로마노프, 찌호노프, 그리쉰은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모두 은퇴하게 된다.

 

잇달아 노인들이 서기장으로 등극했다가, 약속이나 한 듯 빠른 시일 내에 사망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소련 인민들은, 원고 없이 연설하고, 부축을 받지 않고도 잘 걸어 다니는 정력적인 고르바초프의 등장에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60년 이상 굳어진 신성한 공산주의 전통과 관습에 도전하는 듯한, 고르바초프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재차 놀라게 되었다.

 

 

인민의 적의 자손

 

고르바초프는 1931년 러시아 남부에 위치한 북 까프카스 지역(Северо-Кавказский край; 오늘날 스따브로뽈)의 쁘리볼노에(Привольное)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쁘리볼노에 마을은 스따브로뽈시에서 170km나 떨어져 있는 농촌 마을이었다.

 

그의 가족은 쁘리볼노에 지역의 농민이었는데, 스딸린의 강제 농업집단화 과정에서 피해를 본 희생자였다. 당연히 스딸린 체제에서는 인민의 적이었던 것이다.

 

유년기 고르바초프의 가족(위키피아)

 

그의 친조부는 기근이 일어난 해인 1933, 곡식을 숨기고 봄철 파종 계획을 고의로 방해했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고, 우끄라이나 출신의 외조부는 마을의 집단농장 의장이었는데, 1937년 갑자기 뜨로츠키주의자로 몰려 체포되었다. 고르바초프의 어머니는 평범한 농부였고, 아버지는 트랙터 기술자로 농기계 수리와 손질을 담당하였다.

 

고르바초프는 15세 때부터 트랙터를 몰면서 아버지의 조수로 일했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성실하게 일한 결과, 그는 18세 때 헌신적인 노동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붉은 노동 깃발 훈장을 받게 되는데, 이러한 것들이 그의 출신성분을 상쇄하는 데 도움을 줬다.

 

미래의 서기장은 초·중등 학교인 쉬꼴라(школа)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고, 이후 소비에트 연방 최고의 명문인 모스크바 국립대(МГУ) 법학부에 입학함으로써, 그는 레닌 이후 정규대학 학사 학위를 가진 최초의 서기장이 된다.

 

 

20차 전당대회의 아이들(Дети ХХ съезда)

 

고르바초프는 대학 시절 두 사람의 절친이자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된다. 한 명은 자신의 평생 반려자이자 조언자이며 미래의 부인인 라이사 찌따롄까(Раиса Максимовна Титаренко)라는 여학생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체코 출신의 즈데넥 믈리나르(Zdeněk Mlynář)라는 유학생이었다.

 

고르바초프는 1953년 초, 매우 비싼 수강료임에도 불구하고, 대학 기숙사 측이 개설한 댄스 교습 과정에 등록하게 되는데, 여기서 시베리아 출신의 아름다운 철학과 여학생인 라이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이들은 스딸린이 사망한 직후인 1953925일 결혼에 골인하게 된다.

 

고르바초프와 믈리나르(우) (plus.rozhlas.cz)

 

고르바초프의 모스크바 국립대 법대 동문이자 절친인 믈리나르는 1968프라하의 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었다. 그는 두브첵(Alexander Dubček)의 이너써클(inner circle) 멤버이자, ‘77 헌장선언문에 서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믈리나르는 고르바초프가 스딸린 개인과 그의 통치에 신념을 지닌 철저한 스딸린주의자로서 대학에 입학하였다고 기억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고르바초프 자신의 출신성분을 의식한 체제 순응적 태도로 판단된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세계관은 1956년 소련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에서 행한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을 듣고 변하게 된다. 이처럼 흐루쇼프의 연설에 영향을 받은 세대를 ‘20차 전당대회의 아이들(Дети ХХ съезда)’ 또는 ‘60년대 세대(шестидесятники)’라고 한다. 이들은 레닌주의 개혁 사상에 따라 공산당이 불순물을 제거하고, 인민을 좀 더 나은 생활로 이끌 수 있다는 흐루쇼프의 사상을 물려받은 세대였다.

 

흐루쇼프 연설의 핵심 골자는 사회주의라는 열차가 잘 달리다가 스딸린 개인의 오류로 잠시 탈선 했지만, 철로를 다시 깔고 나사를 잘 조이면, 목적지인 공산주의 사회에 단기간 내에 도착할 수 있다는 신념이었다. <계속>

 

 

필자는 한양대 정외과에서 학사·석사를, 러시아 연방 모스크바국립대학교 철학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1998)를 받았다. 귀국 후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연구위원, 한양대 연구교수 등을 지냈으며, 주요 연구로는 <고려사람, 우리는 누구인가>(번역서), <현대 러시아 정치론>(공저), <현대 러시아학>(공저), “·일 영토분쟁의 연원”(논문), “·미동맹과 동북아 다자안보협력”(논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