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체르넨코

끄레믈의 서기장들(Ⅳ) 김일성과의 만남

twinkoreas studycamp 2021. 7. 5. 12:57

 

 

김태항(정치학 박사)

 

 

깐스딴찐 우스찌노비취 체르녠까(Константин Устинович Черненко)

 

 

김일성의 소련 방문

 

 

김일성 주석과 체르녠카 서기장(sputinikimage.com)

개인의 통치 철학은 고사하고, 대외정책상의 명확한 노선조차 없는 무기력한 체르녠까가, 희한하게도 김일성의 소련 방문 건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까게베(KGB)로부터 김일성이 남한의 군국주의를 압도하기 위해, 무기 원조 및 그 이상을 요구할 것이라는 내용에 대해 사전 브리핑을 받았다.

 

체르녠까는 한국전쟁에 관한 예전 자료들을 검토했다. 1950년 외교문서에는 김일성이 119일 한반도 무력 통일에 관한 문제를 모스크바에 제기했다는 사실이 적시되어 있었다.

 

이는 김일성이 당시 북한 주재 소련 대사였던 쩨렌찌 쉬띠꼬프(Т. Ф. Штыков)에게 남침 문제를 재차 강조했고, 이를 쉬띠꼬프가 모스크바에 타전한 내용의 문서로 보인다.

 

실제로 1950117일 북한의 내각 부총리이자 외무장관인 박헌영의 자택에서 초대 주중대사로 임명된 이주연을 위한 환송 만찬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김일성, 김두봉, 박헌영, 쉬띠꼬프 대사와 중국 측 무역대표인 빈 시젠 등이 참석했는데, 여기서 김일성은 쉬띠꼬프에게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남한 해방을 위해 인민군의 공격이 필요하며, 이에 대한 승인을 받기 위해 스딸린 동지를 방문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는 단독으로 공격을 단행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내가 교육을 잘 받은 공산주의자로서 스딸린 동지의 지령은, 나 자신에게는 곧 법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19489월 북한 정권 수립 이후 초대 북한 대사가 된 쉬띠꼬프는 북한의 진정한 실세였다.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 극동 군관구 군사평의회 중장 출신인 그는 해방 이후 구성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소련 측 대표였다.

 

쉬띠꼬프(위키피디아)

 

더욱이 그는 레닌그라드당 제1서기이자 스딸린 치하에서 막강한 실세였던 안드레이 쥐다노프(Андр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Жданов)의 사위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로 쉬띠꼬프는 모스크바 당국의 대북 정책 결정을 단순히 집행하는 위치가 아니라, 대북 정책을 입안하는 데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했다.

 

북한 전문가인 조선대 기광서 교수에 따르면, 당시 쉬띠꼬프의 영향력의 범위는 북한뿐 아니라 남한의 좌파세력을 망라하였다고 한다.

 

김일성은 19493월 모스크바 방문에 이어, 1950330~425일까지 모스크바를 재차 방문하여, 스딸린의 재가를 받는다. 스딸린은 일주일 동안 숙고한 끝에 410일 남침에 대한 동의를 표명한다.

 

한국전쟁 당시 몰도바 공화국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근무한 체르녠까는 이러한 사실을 알 턱이 없었기에, 30년 이상 지난 케케묵은 서류철을 뒤적거린 것이다.

 

이와 관련,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서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자,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산하 극동연구소(Институт Дальнего Востока РАН) 한국학센터 소장을 역임한 바짐 뜨까첸코(В. П. Ткаченко) 박사는, 소련은 한반도 문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19493월 김일성의 소련 방문 시 제기된 무력 통일 방안에 대해 냉담했으며, 같은 해 8월 소련의 핵실험 성공 이후에도 김일성의 무력 통일안은 물론, 동맹관계도 염두에 두지 않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194910월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국공산당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502월 중·소동맹의 체결로 스딸린의 생각이 변하기 시작했다고 지적했다.

 

김일성은 1984516~71일까지 약 45일간 특별열차 편으로 소련과 동유럽을 순방하게 되는데, 523일 첫 번째 기착지인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1961년 이후 무려 23년 만의 소련 방문이었다.

 

모스크바의 이라슬랍스키(Ярославский) 역에서 소련의 최고 실세 노인들인 찌호노프(80), 그로미코(76), 우스찌노프(77)가 자기들보다 어린 김일성(73)을 영접했다. 소련으로서는 열병식, 만찬, 관저 배정 등 최대한의 예우를 갖추었다.

 

다만 체르녠까와 김일성 간의 정상회담은 그다지 화기애애하지는 못했다. 체르녠까는 김일성에게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소련이 북한에게 베풀어 준 각종 군사·경제적 지원을 설교하듯이 재확인시켰고, 김일성 역시 비슷한 내용의 감사연설을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체르녠까가 남한의 84년도 팀스피릿(Team Spirit) 훈련에 대해, ··‘3각 군사동맹 조작 책동이라고 비난하자, 김일성 역시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펼치던 김일성으로서는 체르녠까의 중국 비난에 대해 침묵을 지켰고, 더욱이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그로서는 체르녠까의 대일 비난에 대해 동조할 수가 없었다.

 

체르녠까 역시 북한이 같은 해 1월에 제기한 3자회담(··)안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했다.

 

김일성의 소련 방문은 다분히 전략적이었다. 1984년 초, 레이건이 4월 말경 베이징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한 김일성은 모스크바쪽으로 한 걸음 다가설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한편 김일성의 소련 방문 예정을 알게 된 중국 측은, 김일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 후야오방(胡耀邦) 중국공산당 총서기를 북한에 파견하게 된다.

 

김일성은 후야오방의 평양 방문이 북한으로서는 공산권 양대 강대국 사이에서 균형 유지에 요긴한 카드가 될 것이며, 모스크바 방문에서 자신의 입장을 유리하게 하는 토대가 되리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김일성은 한 살 많은 체르녠까와 3일간 정상회담을 지속했지만, 공동성명을 발표하지 못한 채, 다음 목적지인 폴란드를 향해 특별열차를 출발시켜야 했다.

 

물론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체르녠까는 북한에 미그 25 전투기 60, SAM 3 지대공 미사일, 사정거리 80km인 스커드 미사일 공급을 약속했다. 아울러 김일성이 요구한 원자력발전소 건설 원조에 대해,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을 조건으로 지원을 수락했다. 북한은 1985년도 말 NPT에 가입했으나 소련의 지원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체르녠까는 19852, 김일성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김정일의 소련 방문 초청장에 서명을 했다. 이와 관련하여, 까게베(KGB)는 김일성이 중병을 앓고 있어서, 소련이 자신의 계승자와 호의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한다고 보고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후로도 10년 가까이 집권을 했고, 김정일의 방소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체르녠까는 초청장에 서명한 잉크가 마르기도 전인 다음 달 310일 사망했다.

 

 

몰로또프(В. М. Молотов)의 복권 등 보수 반동으로의 회귀

 

스딸린의 측근이자 제2인자이며, 피의 숙청의 공범자였던 비취슬라프 몰로또프는 흐루쇼프에 의해 축출당한 뒤, 모스크바 외곽에서 연금으로 근근이 살고 있었다. 당대회가 열릴 때마다 그는 사면 복권을 탄원하였으나, 매번 거절을 당했고, 브레쥐네프조차 거절을 할 정도였다.

 

이는 아마도 스딸린의 대숙청기 당시의 총살자 명단에 몰로또프의 서명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과, 몰로또프 스스로 이에 대해 추호도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는 데에 기인했던 것 같다.

 

그러나 체르녠까는 몰로또프의 복권을 정치국 회의에서 제안했고, 아무도 이에 대해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결국 체르녠까 덕분에 몰로또프는 다시 입당이 허용되었고, 198697세로 자연사했다.

 

체르녠까는 서기장이 되자마자 안드로뽀프의 정책들을 모조리 파기하고, 브레쥐네프 시기로 되돌렸다. 15개월에 불과한 집권 기간 중, 그것도 중환자 신세였던 안드로뽀프가 개혁의 물꼬를 겨우 텄는데, 또 다른 중환자이자 13개월짜리 서기장인 체르녠까가 물꼬를 막아버리고, 이른바 보수 반동으로 회귀한 것이다.

 

이로 인해 안드로뽀프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부패와의 전쟁부패와의 공존으로 전환되었다. 부패와의 친화력이 좋은 체르녠까로서는 당연한 조치였다.

 

비근한 예로 안드로뽀프는 불필요한 자원과 인력 낭비를 피하기 위해 레닌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무차별적인 동상 건립을 중단했는데, 체르녠까에 의해 거대한 각종 동상의 수가 다시 증가한 것이다.

 

마치 중증 권력 집착 증후군에 걸린 듯, 서기장 자리에 유독 집착했던 체르녠까는 처참한 몰골에 비틀거리며, 숨쉬기조차 버거워하면서도 정치국 회의에 모습을 드러냈다.

 

회의 참석자들은 서기장의 흉측한 모습을 보고, 토론 없이 각종 안건들을 번개처럼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것도 198527일 회의를 마지막으로 그는 특별병동으로 가야만 했다.

 

체르녠까는 1985310일 병상에서 마지막 긴 숨을 내쉬었다. 최고 지도자의 사망 소식에 소련 인민들은 무덤덤했다. 24개월 동안 무려 3명의 서기장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서기장들뿐만 아니라 소련 공산당의 이데올로그인 수슬로프(82)와 소련 군부의 실세이자 파워맨이었던 우스찌노프(84)도 세상을 떠났다. 소비에트 연방의 정신과 육체를 상징했던 두 인물도 사라진 것이다.

 

체르넨까는 사망 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개인적인 메모나, 회고록 또는 유언조차도 없었다. 다만 개인금고가 집무실에 남아 있었는데, 열쇠 전문가를 불러 금고의 철제문을 열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금고 안에는 단 한 개의 서류뭉치 외에 무수한 돈다발이 있었던 것이다. 서기장의 책상 서랍에서도 돈다발이 나왔다. 결과적으로 체르녠까는 돈다발을 남기고 사망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