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체르넨코

끄레믈의 서기장들(Ⅳ) : 브레쥐네프의 아바타

twinkoreas studycamp 2021. 6. 28. 12:03

 

 

김태항(정치학 박사)

 

 

깐스딴찐 우스찌노비취 체르녠까(Константин Устинович Черненко)

 

 

체르녠까(kommersant.ru)

 

 

미래를 상실한 체제

 

안드로뽀프의 사망으로 당과 정부의 고위 관료들에 대한 청소 등 이른바 부패와의 전쟁은 중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찔리겐찌야들을 필두로 소련 인민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이전 서기장인 브레쥐네프 사망 이후 소련 사회의 저변에서, 변화를 향한 거대한 시계추가 꿈틀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73세의 역대 최고령이자, 반쯤만 살아있는 체르녠까가 권력의 정상에 오르자 정통 레닌주의자들, 사회민주주의자들, 마르크스 원리주의자들, 심지어 음성적 스딸린주의자들까지도 체제 붕괴의 조짐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체르녠까의 등장은 마치 먹구름과 함께 까마귀 떼가 몰려오는 것처럼, 미래를 상실한 체제의 운명을 상징하는, 거대한 재앙의 전조이자 음울한 지표가 되었다.

 

15개월 만에 안드로뽀프가 죽고, 체르녠까가 소련의 새로운 지도자로 등극하자, 소련 사회에는 다음과 같은 농담이 등장했다.

 

“19842, 73세의 깐스딴찐 체르녠까가 오랫동안 병을 앓고 있었는데, 의식을 회복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소련의 지도자가 됐다.”

 

아마도 이것은 안드로뽀프에게 걸었던 기대와, 체르녠까의 등장에 따른 좌절감이 교차되면서 나타나는, 일종의 강한 실망과 거부감의 표시였을 것이다.

 

인민들은 최소한이라도 납득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선출하지 못하는, 더 이상 추락할 곳조차도 없어 보이는 체제에 대해 깊은 환멸감을 느꼈다.

 

그나마 인민들에게 위로가 된 것은 체르녠까가 무대에서 곧 내려올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인민들이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드로뽀프의 장례식장에서 체르녠까는 고인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기 위해 자신의 모자 옆으로 오른손을 가져가는 일조차 힘겨워했다. 슬로우 모션처럼 힘들게 올린 그의 오른손이 귀 언저리에서 몇 초 동안 떨고 있었던 것이다.

 

단상의 짧은 계단을 내려갈 때도 경호원 두 명의 부축을 받아야 했다. 이 모습을 본 사람들은 저 사람도 곧 가겠군. 틀림없어.”라고 중얼거렸다.

 

체르녠까의 국제문제 담당 보좌관 출신인 알렉산드로프 아겐또프(Александров-Агентов)는 체르녠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지, 나 자신에게 여러 차례 자문해 보았다. 신체적인 나약함뿐만 아니라, 서기장 직책에 걸맞은 해박한 지식도 없으며, 경제도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 대국의 최고지도자로 선출될 수 있다는 말인가? 과연 그를 서기장으로 선출한 그의 동료들이나, 더 나아가 체르녠까 자신까지도 그것을 진정 몰랐다는 말인가?”

 

소련공산당 기관지 쁘라브다의 편집장을 지냈던 빅또르 아파나시예프(В. Г. Афанасьев) 박사 역시 체르녠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그는 자신의 업무로부터 완전히 소외당하고 있었으며, 그 이유는 그가 경제뿐만 아니라 과학, 기술, 문화에 대한 식견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체르녠까는 소련의 역대 서기장들 중에서 13개월이라는 가장 짧은 기간 동안 자리를 지켰다. 그의 재임 기간은 침체와 더불어 극심한 혼란과 격동의 시기였다.

 

깔바사(ria.ru)

 

 

인민들의 당과 정부에 대한 반감과 정치적 무관심이 만연하였고, 거리에서는 반쯤은 물건이 비어있는 상점에서 깔바싸(колбаса; 소시지의 일종)를 사기 위해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경찰들은 민생과 치안 문제는 제쳐두고, 모스크바 근교의 고급 별장으로 향하는 고위층들의 검은색 리무진 승용차가 잘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로를 통제하는 일에 전념했다.

 

설상가상으로 체르녠까가 집권한 1984~85년 사이의 겨울은 유난히 혹독했다. 기록적인 추위와 폭설에 의해 나라 곳곳이 마비가 되었다. 기근의 조짐도 보였고, 소련 역사상 최초로 에너지 위기의 징후도 나타났다. 이로 인해 상당수 공장들이 문을 닫아야 하는 기로에 처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른 데에 있었다. 영하 40도는 추위도 아니라는 속담처럼, 소련에서 혹한 문제는 마치 열대지방에 갑자기 눈이 내리는 것과 같은, 아주 특별한 사건이 아니었다. 이번 사태를 초래한 이유는 능력이 부족한 인물들로 채워진, 당과 국가 관료들의 태만과 무사안일 때문이었다.

 

소련이라는 거대 제국의 맥박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체르녠까의 그것처럼 불규칙하게 느려지고 있었다.

 

 

브레쥐네프의 아바타

 

체르녠까는 1911년 시베리아의 예니세이(Енисей)강의 하류에 접해있는 끄라스나야르스크(Красноярск) 지역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 3년제 초등학교를 수료했는데, 여기서 그는 노동청년동맹(Комсомол; 컴싸몰) 3차 대회에서 행한 레닌의 연설내용을 최초로 접하게 되었다. 이는 글을 읽고 쓰는 기본적인 능력과 더불어, 기초적인 이데올로기 분야에도 소양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누구에게나 청춘의 시절은 있다. 청년기의 체르녠카(wiki.ru)

 

1948년에서 56년까지 8년 동안 체르녠까는 몰도바(Молдова)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근무했는데, 이 시기가 그의 인생 행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여기서 그는 몰도바 공화국 제1서기인 브레쥐네프와 교분을 맺게 된 것이다. 브레쥐네프의 도움으로 그는 모스크바 입성과 더불어 권력 피라미드의 최고의 정점까지 오르게 된다.

 

1957년부터 25년 동안 그는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일을 했는데, 브레쥐네프의 집권 기간인 18년 동안 총무국장으로 재임했다. 브레쥐네프의 후광에 힘입어 당 총무국은 막강한 권한과 방대한 조직을 자랑했다.

 

체르녠까는 자신의 사무실에 고성능 도청 장비를 설치하여, 중앙위원회 본부 건물 5층에 위치한 최고위직 인사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브레쥐네프는 체르녠까가 당 최고 지도급 인사들의 아주 은밀한 사생활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경탄을 금치 못했다.

 

브레쥐네프는 사냥에 몰두하느라 직무는 태만했지만, 정부와 당 간부들의 사적인 자료 수집에는 열성적이었다.

 

 

처세의 달인

 

출세한 인물치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극히 평범한 관리형 인간 유형인 체르녠까는 브레쥐네프에게 단 한 번도 반대의견을 제시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복종했다. 시간관념이 철두철미했고, 적기에 필요한 계획을 내놓았으며, 연설문, 치사 등 각종 자료를 꼼꼼하게 챙겨주었다.

 

물론 본인이 작업한 것은 아니었다. 부하들이 작성한 것을 브레쥐네프에게 전달했을 뿐이다. 참고로 그는 사전에 준비된 원고가 없이는, 한 번도 남들 앞에서,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는 인물이었다.

 

브레쥐네프는 누구보다도 아부를 좋아했고, 체르녠까 역시 아부에 관한 한 추호도 인색함이 없는 넉넉한 인물이었다. 체르녠까는 수시로 브레쥐네프에게 다음과 같은 낯뜨거운 발언을 하곤 했다.

 

서기장 동지. 당신은 일을 너무 많이 합니다. 제발 건강 좀 생각하십시오.”

 

체르녠까는 종종 브레쥐네프의 개인적인 일까지 돌보기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이들은 상관과 부하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정까지 쌓아가고 있었다. 그는 단 한 차례도 자신을 비호해 주는 인물의 비위를 거슬러 본 일이 없었고, 경솔하게 행동함으로써 화를 자초한 일도 없었다.

 

건강이 나빠 육체적 약물 중독자이기도 한 브레쥐네프는, 정신적 약물 중독자이기도 했다. 알맞은 분량의 주기적인 아첨과 굽신거림은 그에게 커다란 기쁨을 주었다.

 

브레쥐네프의 끊임없는 허영심을 채워주기 위해, 적당량의 정신적 마약을 처방하는 체르녠까야말로 소비에트 연방 최고의 명의였다.

 

이는 결국 브레쥐네프가 건강 문제로 정치국 회의에 참석하지 못할 경우, 체르녠까가 정치국 회의 의장석에 앉게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브레쥐네프 말년의 마지막 3~4년 동안에는 브레쥐네프의 이름으로 자신이 직접 중요한 사안들을 처리했다.

 

특히 당면 현안에 대한 수많은 결정을 서기장 명의로 체르녠까가 직접 내리기도 했는데, 그야말로 서기장의 그림자가 서기장의 머리와 오른팔로 둔갑한 것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