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국가(World Politics)/우크라이나(Ukraine)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Finlandization) 논란

twinkoreas studycamp 2022. 2. 13. 16:25

 

러시아연방의 우크라이나 침공 가능성이 고조되는 가운데 마크롱 프랑스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핀란드화(Finlandization)를 제안했다. 하지만 ‘핀란드화’는 러시아연방은 물론이고 우크라이나 반러 민족주의자들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관측이 많다.

 

이르면 16일 경에 러시아연방의 공습이 시작될 것이란 관측이 나오는 가운데 우크라이나 시민들이 키예프 등에서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폴란드, 한반도는 세계적으로 대표적인 지정학적 완충지대로서 강점과 분할의 역사를 겪었다. 반면에 핀란드는 세 나라와 유사한 역사적 궤적을 그렸지만 어느 정도 중립적 지위를 확립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1991년 소연방의 해체 이후에 핀란드는 나토와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PfP)’를 체결하고, 유럽연합(EU)에 가입했지만 나토 회원국이 되지는 않았다. 핀란드는 최근까지 나토(NATO) 가입을 자제하면서 러시아연방을 자극하지 않고 중립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연방의 침공에 대비한 자원자들이 군사훈련을 받는 모습(Euronews)

 

반면에 독·러의 완충지대에 위치한 폴란드는 체코 등과 함께 20세기 말에 나토에 가입했고, 이후 에스토니아 등 발트 3국도 푸틴의 대국노선 선회에 위협을 느끼고 나토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크림반도를 러시아연방에 빼앗긴 우크라이나는 부다페스트 협약이 휴지 조각이 되었다는 것을 절감하고 나토 가입을 추진해 왔다. 강대한 국가로의 복귀를 꿈꾸는 푸틴의 기세에 놀란 주변의 완충국들이 속속 나토에 가입하면서 러시아연방은 역포위되는 양상이 나타났고, 러시아연방의 지정학적 신경계는 극도로 예민해졌다.

 

러시아연방의 북쪽에 접경한 핀란드와 남쪽에 접경한 우크라이나

 

 

 

 

우크라이나와 핀란드가 러시아연방의 지정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발트 3국과 폴란드 등이 NATO에 가입하면서 벨로루시를 제외한 유럽방면이 꽉 막히게 되었고, 우크라이나마저 NATO에 가입하면 장벽이 남쪽까지 연장되기 때문에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순치시키려는 군사적 압력을 가하고 있다. (표=The Economist)

 

 

 

 

 

핀란드화(Finlandization) : 완충국가의 딜레마

 

우크라이나사태에서 부각된 ‘핀란드화’는 과거에 한반도 중립화와 관련한 주요한 논점의 하나였다는 점에서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한반도 전체 혹은 한국이 중립화될 경우에 중국의 영향권에 포섭된다는 맥락에서 ‘한반도의 핀란드화’라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북중관계가 사회주의 혈맹이란 점을 고려하면 한반도 전체의 중립화든, 한국만의 중립화든 종국적으로 중국의 지정학적 이해가 우선적으로 관철될 것이라는 현실론이자 우려였다.

 

핀란드화는 소연방의 영향권에 속한다는 측면과 함께 러시아로부터 독립과 대외적 중립이 보장된다는 양면성이 존재한다.

 

과거의 한반도 국가(고려·조선)도 대륙국가(원·명·청)과 사대(submission to the stronger)의 관계를 맺고 일정한 독립성과 자율성을 확보하였다.

 

핀란드는 지정학적으로 스웨덴과 러시아에게 시달리면서 냉전기에 소연방(Soviet Union)이 초강대국으로 부상하자 선택의 기로에 처했다. 핀란드는 국력의 현격한 차이를 인정하고, 소연방의 전략적 이해를 충족시키는 생존외교를 통해서 자국의 독립과 안보를 성취한 사례에 속한다.

 

 

파시키비의 외교전략 : 저자세 중립노선

 

소연방은 헬싱키 남부의 부동항 항코(Hanko) 등에 대한 할양을 요구했으나 거부되자 무력침공에 나섰다. 당시에 인구가 400만명 정도였던 핀란드에서는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를 무시한 소연방의 침공에 분노한 핀란드 공산주의자들까지 전투에 가세하였다.

 

1939년 11월 소연방은 ‘접경지대 차용’을 요구하면서 전차 6500여대와 항공기 3800여대를 앞세우고 26개 사단이 핀란드를 침공하였다. 지형에 익숙한 핀란드군은 하얀색 복장으로 위장하고 순록이 끄는 썰매를 이용해서 기계화된 대군에 맞섰다.

 

1940년 소연방은 두 번째 공세에서 핀란드 영토의 10% 가량을 확보했지만,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고 헬싱키를 함락하는데 실패하였다. 1941년 소연방은 세 번째 침공을 시도했지만, 종국적으로 전쟁을 통한 점령보다는 핀란드를 우호적으로 중립화시키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핀란드도 강대국과 전쟁을 반복하는 것보다 외교적 타협을 모색하게 되었다.

 

파시키비 전 외무장관, 전 대통령

 

 

핀란드는 두 차례 전쟁(1939년 11월∼1940년 3월, 1941년 6월∼1944년 9월)에서 10만명 가량이 희생되자 파시키비(Juho K. Paasikivi) 외무장관이 소연방과의 ‘불편한 동거’를 국가생존의 외교방략으로 제시하였다.

 

파시키비는 지정학적으로 역내의 세력균형에 필요한 ‘제2의 강대국’이 부재한 조건에서 소연방에 대적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고 중립노선의 불가피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대통령에 취임하자 핀란드의 민족주의적 정서를 진정시키고 소연방과 상호원조조약을 체결하여 중립보장을 이끌어 냈다.

 

파시키비의 핀란드는 소연방에 반대하는 정책을 지양하여 소연방이 불안을 느끼지 않도록 함으로써 독립과 안전보장을 지속할 수 있었다. 핀란드의 각급 책임자들은 다양한 수준에서 소연방 정부 및 관료들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양국의 신뢰를 증진하는데 주력하였고, 내부적으로 핀란드 민족주의 감정에 의한 적대감을 억제하면서 경제적으로도 긴밀한 관계를 추진했다.

핀란드 화폐에 등장하는 파시키비 전 대통령

 

국제적 평가 : 지정학적 위험에 대한 현실적 방안

 

파시키비의 외교전략은 자국의 실존을 지정학적 이해관계에 적응시키면서 강국의 도발을 차단하는 예방외교(preventive diplomacy)로써 주권을 수호하고, 민족국가에 내재하는 감정적 요인들을 억제하여 국가안보의 위험을 최소화하는 ‘저자세 대외정책(low profile foreign policy)’의 전형을 창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핀란드인들은 안보와 경제라는 두 마리 토끼를 포기하지 않았다. 경제선진국들인 서유럽 국가와 우호적 관계를 증진하면서, 동시에 지정학적 숙명을 인정하고 러시아연방(소연방)과의 ‘비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는 양가적(ambivalent) 생존전략을 선택했다.

 

흐루시초프(오른쪽) 소연방 공산당 서기장과 격의 없이 어울린 케코넨 핀란드 대통령

 

파시키비의 외교노선을 이어받은 케코넨(Urho K. Kekkonen)1956년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 소연방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25년 동안 집권했다. 이른바 파시키비·케코넨 독트린(Paasikivi·Kekkonen doctrine)’은 냉전시대를 관통하는 핀란드의 핵심적 국가방략으로 자리잡았다. 소연방과 동유럽 사회주의체제의 해체 이후에도 역대 핀란드 정부들은 러시아연방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보다는 미세조정하는 수준에서 대응하고 있다.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 출전한 우크라이나 선수가 'NO WAR'가 쓰여진 펼침막으로 평화적 해결을 촉구했다. 러시아연방이 1년여를 기다렸다가 굳이 올림픽 기간에 공습을 자행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