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문제/북핵의 기원

북핵의 기원(1) 한국전쟁 대폭격

twinkoreas studycamp 2021. 3. 7. 22:49

 

 

전쟁사학자 찰스 암스트롱(Charles Armstrong)은 한국전쟁에서 북한(이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약자로서 ‘조선’)에 가해진 폭격은 이후 조선의 발전과정과 조선인들의 태도에 심원하고 장기적인 충격을 주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대폭격은 핵 위협과 함께 북핵의 기원이 되었다.

 

조선은 대폭격을 겪으면서 피포위 의식(Siege-victim mentality)과 함께 순교자적 기질(Matyrish temperament)을 내면화하였다. 폭격으로 인구의 20% 이상이 사망하면서 충격과 슬픔은 점차 분노로 바뀌었고, 장기적으로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하여 결전의지를 강화시켰다(Su-kyoung Hwang, Speaking from ground zero: the bombing of North Korea in 1950).

 

 

 

 

 

한국전쟁 초기에 김수영 시인은 ‘종군작가단’이란 명목으로 북쪽으로 이동하면서 전곡인민학교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에 공습을 받았다. 미 전투기는 저공비행을 하면서 기총소사를 하였고, 일행은 운동장 구석의 방공호로 피신하였다(최하림, 김수영 평전). 정용욱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가 발견한 인민군 동부전방연락소 연락병(강신현)의 병사수첩에는 “높은 고지에서 포격과 기총소사를 받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한겨레신문, 2019.12.21).

 

주섭일 전 세계일보 유럽총국장은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는데 초등생 시절에 미군의 폭격을 당한 적이 있었다. 1945년 1월 미 공군의 야간공습으로 공포에 떨었고, 불타는 교실을 목격하였다. 나중에 그 학교의 교문에는 미군의 공습을 기록한 석판이 세워졌는데 이렇게 써 있다고 한다. “쇼와 20년, 1945년 1월 16일 오후 11시20분, B29 1기가 교토상공에서 동산구 5정목 일대를 폭격했다. 사망 40여명, 부상 50여명, 가옥파괴 143동, 슈도초등학교가 큰 피해를 당했음을 후세에 알린다.” 주 전 총국장은 광복으로 귀국하였으나 다시 B29와 머스탱전투기의 폭격에 시달렸다. 미 공군기들이 안동, 의성, 상주를 폭격할 때 나무 밑에서 떨었다.

 

 

 

 

 

하늘의 공포

 

“오늘은 용산방면에 대폭격이다. B-29인 성싶은 미기의 여러 편대가 차례차례 폭탄을 던지고 가고 또 오고를 두어 시간 동안 계속했다. 해방촌이 맹폭을 받아 수천명의 무고한 사상자가 났다고 한다. 폭탄이 쏟아지는데 높은 곳에 올라가 비행기에 손수건을 흔든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미친 사람이 아니고 그날 아침에 전출명령을 받은 어떤 가족이었다고 한다(김성칠, 역사 앞에서, 7월16일).”

 

이 시기에 경상남도 교육위원 임명되어 인민군의 후미를 따라온 정찬우 평양여고 교사는 수기에 “임화 시인이 미 공군기를 원망하는 시를 썼다가 문책을 당했다고 한다. 누가 저 하늘을 막아주었으면 하고 쓴 구절이 전사들의 사기를 위축시켰다고 비판을 받았다”고 적었다(안재성,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1953년 8월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는 임화에게 ‘미제간첩’ 혐의 등을 적용하여 사형을 선고하였다.

 

7월 20일자에 정찬우는 “낮이 아닌 밤에만 이뤄지는 진격이요, 승리였다. 미군은 자신들이 철수한 지역에 남은 민간인 모두를 인민군 지지자로 간주했다. 미군 비행기는 움직이는 모든 것과 모든 가옥을 무차별 폭격했다. 낮 동안에는 거의 모든 보급로가 마비되곤 했다. 야간에도 출동해서 불빛만 보면 솔개처럼 급강하해서 총탄과 포탄을 퍼부었다”고 기록하였다.

 

7월 25일자에 김성칠 교수는 “종로 화신백화점을 갔는데, “공습경보 싸이렌에 지하실로 대피했는데 공습이 두어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폭탄이 떨어진 듯 백화점이 통째로 울리고 기총소사하는 소리가 연거푸 귀창을 찢을 것만 같았다”는 대목이 나온다. 7월 31일에는 “돈암동에 전차가 통했으나 빈번한 공습으로 탔다가 내렸다가 하느라고 걷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비행기가 뜨면 그 자리에 붙어버리고 승객은 내려서 골목길, 처마 밑으로 대피한다”고 적었다. 8월 4일에는 “폭격이 날로 심해져간다. 서울 변두리에도 소이탄, 로켓탄을 퍼붓는다. 청량리, 창동역 방면을 폭격했다, 미아리 유지공장을 잿더미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다”고 적었다.

 

김성칠은 미군기의 급강하 저공비행이 빈번했음을 증언하였다. “미군기가 우리 집 지붕마루 위에서 거꾸로 내리박히는 것 같아 아슬아슬했다.” 그는 이 시기에 미군이 원자탄을 쓰기로 했다는 풍설이 파다하다고 적었고, 비행기에서 살포한 삐라(전단)에 서울의 40리(15.7km) 밖으로 피난하라는 내용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기록하였다.

 

최전선까지 남하한 정찬우는 “진주에서 해안을 끼고 마산으로 이어지는 진동고개(인민군 작전명 : 낙동강 12단고지)에서 진선이 교착되자 대전에서 김책 사령관이 내려와 독전했지만, 형체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불바다를 만들어 버리는 제트기는 공포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고 기록하였다.

 

낙동강 전선을 측면에서 지원하던 미 함대의 장거리 포격도 해안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인민군들에게 예측불허의 공포를 주었다. 미 해군의 함포공격은 태평양전쟁의 이오지마(유황도)전투에서 절정에 달했다. 당시 미 해군은 공군기의 폭격 지원을 받으면서 하루 종일 포격하는 방식을 66일 동안 지속하였다.

 

정찬우는 낙동강 전선에서 산간지대로 후퇴하다가 폭격을 받으면서 연인을 잃었고, 로동신문 기자 이진선은 부상을 입고 평양으로 돌아갔지만 퇴원하는 날에 폭격으로 부인과 아들을 잃었다(손석춘, 아름다운 집).

 

김일성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은 8.15 기념사에서 “8월을 해방의 달로 해야 한다”고 독려하였다(인민보, 1950. 8. 21). 이진선은 8월 16일자 기록에 “일본도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던 미국의 힘과 겨뤄서 자꾸만 이겨나간다는 사실은 조선 사람으로서 어깻바람이 나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내 처지의 여하를 초월해서 일종의 민족적 긍지를 갖게 하는 사실이다”고 적었지만, 8월 31일자에는 “맥아더가 김일성에게 강경한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했다. 2주일 내로 조선사변을 끝마치겠노라고 성언하였다. 이북측이 더 전쟁을 계속할 기력이 없어졌다는 말을 들었다”고 적었다.

 

이진선은 9월 10일자에 미군의 폭격에 대해 이렇게 썼다. “너무나 많은 동무들이 낙동강에서 스러져가고 있다. 미제의 폭격에 찢겨가는 동무들의 아우성에 거의 미칠 지경이다. 쉼 없이, 미친 듯이 하늘에서, 땅에서 퍼붓는 미제의 폭탄은 조선 인민의 소중한 아들들의 생명을 마구 빼앗고 있다. 폭탄은 이미 숨진 혁명전사들의 숭고한 주검까지 거침없이 난자질했다. 콸콸 쏟아지는 선홍색 피가 도랑을 이루며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난 몸서리쳤다.”

 

9월 25일자에 김성칠은 “불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동대문에서 을지로 부근에서 검은 연기가 오른다. 비행기는 24시간 폭격이다. 얼마나 많은지 그 수효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번갈아 떠서 목적물을 하나하나씩 부숴나가는 모양이다. 정릉리 골짜기에도 새빨간 로켓포탄을 거듭거듭 쏟아부었다”고 적었다.

 

비슷한 시점에 정찬우는 낙동강 상황에 대해서 “B-29 폭격기들은 500킬로그램에서 1톤에 달하는 대형폭탄으로 융단폭격을 가했고, 야포와 함포까지 일제히 가세했다. 여기저기에서 비명과 함께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비행기, 누가 저 하늘을 막아주었으면...”라고 회상하였다. 당시에 김책 전선사령관과 참모장이 미군 함포의 포격으로 폭사하였다고 한다.

 

미 공군은 F-80(Shooting Star)의 두 날개에 네이팜탄을 75갤런씩 장착해서 출격했는데, 네이팜탄이 투하되면 수 십 미터까지 화염이 번져서 두터운 솜옷을 입었던 중국인민지원군은 공포에 사로잡혔다. 중국군은 생포한 미군을 상대로 심리전을 벌이기도 했다. 군우리 전투에서 중국군에 생포됐다가 풀려난 병사의 증언에 따르면, 중국군 장교가 카투사(KATUSA,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 2명을 사살한 다음에 자신을 풀어주면서 “부대로 돌아가서 소이탄과 네이팜탄을 쓰지 말라고 하라”고 부탁했다고 한다(T. R. Fehrenbach, This Kind of War).

 

 

상공을 통한 압박

 

대폭격이 비무장 민간인을 살상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에 대해서 세계의 우려와 조종사들의 심적인 갈등이 점증하자 공군 지도자들은 냉정한 논리로 폭격의 불가피성과 정당성을 강조하였다. 백정(Butcher)으로 불리웠던 해리스(T. Harris) 영국 공군총사령관은 드레스덴 폭격을 앞두고 “적국의 민간인도 적이니, 그런 적을 위해 눈물을 흘릴 필요는 없다”고 독려하였다.

 

도쿄 저공비행 공습을 도입한 커티스 르메이(Curtis Lemai) 미 극동공군사령관은 전후에 “일본인을 죽이는 것은 별로 걱정하지 않았고, 고심했던 것은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전쟁에 패했으면 전범자로 재판을 받았을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승자가 됐다”고 술회하면서도 “군인은 누구나 자신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 측면을 어느 정도 생각하지만, 전쟁은 모든 도덕에 반하는 것이다”고 덧붙였다.

 

1950년 7월 7일 김일성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은 슈티코프 소연방대사에게 미군기의 공세에 대한 대책을 요청하였다. 10월 1일에는 마오쩌둥 중국 주석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군의 폭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였다. “적은 1000대 가량의 항공기로 매일 주야를 가리지 않고 전후방을 마음대로 폭격하고, 교통·운수·통신과 기타시설들을 마음대로 타격하며 기동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반면에 인민군의 기동력은 마비되었다.”

 

미군의 폭격으로 조선의 건물은 85% 가량이 초토화되었고 거의 모든 도시와 마을이 파괴되었다. 이 과정에서 최대 100만명 가량의 민간인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제2차세계대전에서 폭격에 의해서 독일(40만명~60만명)과 일본(30만명~90만명)에서 발생한 민간인 사망자수보다 많은 것이다.

 

개략적으로 조선(1950~53)에 가해진 폭탄(중량) 63만톤과 사망자 100만명은 독일(40~45)의 140만톤과 40만명~60만명, 일본(44~45)의 50만톤과 30만명~90만명, 베트남(65~68)의 86만여톤과 5만명~18만명, 라오스(64~73)의 200만톤과 3만명, 캄보디아(67~75)의 50만톤과 4만명~15만여명에 비해서 폭격량 대비 사망자가 많은 편이다.

 

전후에 소연방(Soviet Union)은 조선의 인구가 1949년 대비 11.76% 감소한 것으로 집계하였는데, 남성은 4,782,000명에서 3,982,000명으로, 여성은 4,840,000명에서 4,509,000명으로 감소하였다고 한다. 남성 80만명과 여성 33만명을 합쳐서 103만명 가량이 감소했는데, 이는 전쟁으로 인한 실제 사망수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의 무차별 폭격이 시작된 것은 중국 인민지원군의 역습에 밀리던 시기로 알려져 있었다. 전쟁 초기에는 민간인 보호와 작전의 효과성을 고려하여 역과 철도 등에 대한 폭격으로 제한되었지만 전쟁이 장기화되고 전세가 뒤집히자 조종사들은 인구가 많은 도시에 대한 폭격과 소이탄 사용을 요청하였고, 중국 인민지원군이 등장하자 맥아더 총사령관이 새로운 전쟁으로 규정하고 폭격의 목표를 무제한적으로 허용하였다는 것이다.

 

맥아더 총사령관은 1950년 11월 5일에 조선의 도시와 마을을 폭격목표로 지정하고, 도쿄대공습에 사용되었던 소이탄(incendiary bombs)을 허용하였다. 전쟁 초기에 미 공군은 신중한 공습작전을 세우고 가능한 군사시설과 무장병력에 대한 정밀폭격(Precision Bombing)으로 국한하려고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러한 의도와는 별개로 폭격의 결과는 사실상 무차별적인 파괴였다. 미 공군기의 출격이 승인된 1950년 6월 29일부터 전쟁이 멈춘 1953년 7월 27일까지 정밀폭격이 이뤄지기 보다는 무차별 폭격이 일반적이었고, 조선의 모든 도시와 마을이 표적이 되었다(Taewoo Kim, Limited War, Unlimited Target).

 

영국과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에 가한 대공습은 자국의 피습에 대한 반격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미국이 조선과 베트남에 가한 공습은 이와 같은 성격이 아니었다. 조선과 베트남은 독일과 일본처럼 영국과 미국의 본토를 기습적으로 공습하지도 않았고, 독일과 일본처럼 산업화와 도시화가 발달한 단계도 아니었다. 한국전쟁 초기부터 제공권을 장악한 미군은 조선지역에 대한 전략적 폭격에 나섰다.

 

1950년 7월 13일에는 B-29 56대가 원산을 폭격하는 과정에서 어린이 120여명을 포함해서 민간인 1천여명이 사망하였고, 8월 28일에는 성진제철소를 ‘제로 그라운드’(zero ground)로 만들었다. 맥아더 총사령관은 1950년 11월 5일 수력발전소를 제외한 모든 시설물을 초토화하라고 지령했고, 중국인민지원군의 공세가 강화되자 미군기들은 소이탄 및 네이팜탄을 발사하였다.

 

한국전쟁에서 최고위급 포로였던 딘(William F. Dean) 준장(제24사단장)은 도시와 마을의 대부분이 돌무더기이거나 눈 덮힌 불모지였다고 회고하였다. 전쟁 초기에 대전에서 탈출하다가 체포되었다가 포로교환으로 귀국한 딘은 희천시가 통째로 사라지고 돌무더기가 되었다는 목격담을 남겼다. 폭격으로 주거문제가 심각해지자 조선은 1950년 11월부터 지하시설과 터널 및 흙집을 짓기 시작했고, 공장·학교·병원·관공서 등을 지하로 옮겼다. 미군의 폭격은 한국전쟁 3년 동안 단계별로 강화되었고, 보급로-철로-도시-발전소와 저수지까지 차례로 초토화시키면서 1952년 8월 29일 ‘평양 대공습’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1950년 7월 오도넬(Emmett O’Donnell) 극동사령부 폭격기 사령관은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도시 5곳을 소각하는 작전과 소이탄을 이용한 화염공습을 공개적으로 경고해서 조선군 지휘부에 압박을 가할 것을 건의하였다. 맥아더는 폭격대상을 군사적 표적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를 수용하지 않았고, UN 보고서(9월)에도 무고한 민간의 죽음과 민간경제의 파괴를 피하는 것이 전쟁의 지속적인 현안이자 자신의 관심사라고 밝혔다.

 

1950년 10월 3일 스트레이트메이어(George E. Stratemeyer) 극동 공군사령관은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신의주를 불태워버리자’(to burn Sinuiju)는 패트리지(Earle E. Partridge) 제5공군사령관의 건의에 대한 승인을 요청하였다. 인구 6만명 가량의 신의주를 경고 없이 화염과 고폭탄으로 폭격하는 구상에 대해서 맥아더 사령부는 군사적 상황이 명확하게 요구하지 않는 조건에서 그런 공격은 용인될 수 없다고 회신하였다.

 

전쟁의 초기에 워싱턴과 맥아더 사령부는 조선지역을 점령한 후에 기존 시설을 활용해야 할 필요성과 복구비용을 고려한 측면과 함께 실제로는 정밀타격이 이뤄지지 않고 무차별 폭격이 가해진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다가, 조선지역에 대한 확보가 사실상 무산된 이후로는 대폭격으로 단순화되었다.

 

맥아더는 조선의 임시수도로 알려진 강계를 비롯한 산간 도시들을 불살라버리자는 스트레이트메이어 사령관의 요청을 승인하면서, 신의주의에 대한 화염공습도 결정하였다. 스트레이트메이어는 일기장에 “조선의 모든 설치, 시설, 마을이 군사적, 전술적 표적이 되었다”(Every installation, facility, and village in North Korea now becomes a military and tactical target)고 적었다고 한다.

 

그는 10월 5일 미5공군 사령관에게 모든 역량을 동원해서 숨을 만한 곳은 모조리 파괴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이날 22대의 B-29대가 강계 일대를 융단폭격하여 75%를 파괴되었다.

 

미 공군은 3주 후에 폭격한 도시들의 파괴 수준을 초산 85%, 회령 90%, 희천 75%, 강계 75%, 고인동 90%, 만포진 95%, 남시 90%, 삭주 75%, 신의주 60%, 의주 20%로 보고하였다. 미 공군은 정전협정 후에 주요목표 22곳의 파괴율에 대해서 평양 75%, 순안 90%, 해주 75%, 함흥 80%, 흥남 85%, 진남포(남포) 80%, 정주 60%, 원산 80%, 성진(김책시) 50%로 집계하였다. 농촌과 산간지대에서는 1950년 동계전투에서 미군이 치명타를 입었던 군우리가 100% 파괴된 것을 비롯해서 황주 97%, 교미포(송림) 80%, 강계 60% 순으로 높았고, 안주(15%) 무산(5%) 나진(5%) 웅기(선봉·5%)은 낮게 나타났다.

 

도시의 75% 정도가 파괴된 평양은 더 이상 표적이 사라져서 폭격이 중단되었고, 표적을 찾지 못한 폭격기들은 인도교를 부수거나 폭탄을 바다에 버리고 귀대했다고 한다. 1953년 5월 13일 최대 이륙중량이 10톤에 달하는 F-84s 20대를 비롯해서 48대로 구성된 폭격기 편대가 덕산댐을 파괴하고 막대한 농지를 수몰시켰다.

 

1950년 11월 17일 맥아더 총사령관은 무쵸(John J. Muccio) 주한 미대사에게 “불행하게도 이 지역은 사막이 될 것이다”고 하였다. 이 지역이라 함은 중국과의 접경지역까지 이어지는 한반도 서북부 전역을 의미한다. 실제로 전쟁발발 1년을 맞이한 1951년 6월 25일 오도넬 극동 폭격기사령관은 스테니스(John C. Stennis) 상원의원에게 ”한반도의 전체가 끔찍한 쓰레기 더미가 되었다. 중국군이 오기 전에 모조리 빻아버려서 더 이상 표적이 될만한 것이 없다”고 밝혔다.

 

1951년 5월 동·서독, 중화민국(대만), 네덜란드의 대표로 구성된 국제진상조사위원회는 파괴되지 않은 도시를 보지 못했고 부서지지 않은 농촌마을을 보기 힘들었다고 밝혔다. 헝가리 일간지의 종군기자 머레이(Tibor Meray)는 “Yalu River(압록강)에서 평양까지 완전히 황폐화되었고, 도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도시가 부서진 굴뚝만 쌓아놓은 상태여서 달을 여행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전했다(Szabad Nép, 1951. 8월).

 

하지만 미군은 1951년에도 적군의 보급선을 절단하는 ‘목조르기 작전’(Operation Strangle)을 전개하였다. 이 작전은 87,552회에 달하는 차단출격을 통해서 기관차 276량, 객차 3,820량, 선로 교차로 19,000곳, 기타 운반수단 34,211대를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다. 1951년 7월 이후 정전협상이 진행되었지만 미군은 상공의 압박(air pressure)을 유지하기 위해서 농촌마을 78곳을 B-26의 목표로 선정했다. 인민군과 인민지원군도 전열을 가다듬고 철로 주변에 캐논포 132대와 자동화기 708대를 배치하여 요격에 나섰다.

 

저공비행을 하던 미군기들은 레이더에 의한 장거리 방공포가 아니라 캐논포(37mm, 20mm)와 중기관총(12.7mm)에 의해서 격추되었다. 미군은 상대의 전술변화에 대응해서 대공포 초소 900곳을 전파하고 443곳을 부수었다. 지속적인 폭격으로 공격목표가 소멸하자 1952년 6월 29일 웨이랜드(Otto P. Weyland) 극동공군사령관이 새로운 군사계획을 승인하였다. 미 5공군은 조선의 소도시와 농촌마을 78곳을 공격목표로 지정하고, 휴전협상이 난항을 겪거나 포로 협상이 중단될 때마다 상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미군의 공중폭격은 전쟁발발 사흘 후인 1950년 6월29일부터 정전협정이 발효된 1953년 7월 27일 오후 10시까지 3년 넘게 거의 매일 계속되었다. 초기에는 인구가 많은 도시지역의 군사적 표적에 대한 정밀폭격 위주였지만 정확도가 떨어져서 민간인 살상을 피할 수 없었고,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미군이 다시 남쪽으로 밀려나자 1950년 11월 5일 이후 북한 전역에 대한 무차별 대폭격이 지속되었다.

 

원산, 남포 등에서는 주민들에게 소개령이 내려졌고, 관공서가 폭격의 주요표적이 되자 책임자들이 이탈하면서 행정체계가 무너졌다. 미군은 산간지대의 외딴 집조차 소이탄으로 불살랐다. 산간지대의 외딴 집들은 중국인민지원군의 은거지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지만, 1950년 겨울에 한반도 북부를 강타한 영하 20도~30도의 혹한 속에서 헐벗은 북한 인민들이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둥지였던 것도 사실이다. 미군의 도시 주변의 움막집부터 산골의 외딴 집까지 소이탄을 이용한 화공전으로 파괴하였다.

 

캐나다 대표 로드(Nora Rodd)가 인솔한 국제여성단체 대표단의 현지조사(WICIWAK, 1951년 5월 16일~27일)가 평양·신의주·남포·원산·해주 등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부인과 아이들이 추위를 피하던 움막집조차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

 

집이 부서진 부녀자들과 어린이들은 인근의 산기슭에 지은 움막이나 토굴에서 기거하였는데, 1952년 7월 11일 평양의 포도원 지구에 가해진 폭격으로 움막에서 살던 주민들이 폭사하였고, 11월 17일 청진에 가해진 폭격으로 움막지대가 파괴되었고, 11월 19일 강계의 움막집들도 미군기의 기총소사로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로동신문>은 미군이 폐허가 된 도시의 움막집과 주민들을 표적으로 삼아 주야로 폭격을 계속하고 있다고 비난하였다. 미 공군의 지도부는 전선의 후방에 존재하는 도시와 농촌의 건물과 주민을 표적으로 하는 작전을 놓고 고심하였지만, 결국은 군인과 민간노동자를 타격해야 하고 이들의 은신처가 되는 건물을 폭격목표로 결정하였다.

 

1952년 2월 미5공군 정보국장 진 도허티(Jean H. Daugherty) 대령이 제안한 ‘포화작전’(Operation Saturate)은 ‘목조르기 작전’(Operation Strngle)과 달리 철로 파괴에 초점을 두었다. 주요 표적은 군우리~희천, 순천~삼동리, 신안주~남시동(용천), 평양~남천(평산)의 철로였다.

 

당시 미 극동공군 정보국의 보고에 따르면, 밤이 되면 평양과 신안주의 철도구간에서 숙련된 군인들과 주민들이 폭격으로 손상된 철로를 복구하였다. 인민군과 주민들이 야간에 철로를 복구하면 주간에 미군이 다시 폭격하는 일이 반복되자, 새벽 6시에서 8시까지 철로를 수리하고 야간에 운송을 재개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일제 강점기에 건설된 수력댐(수풍, 부전, 장진, 허천, 부용, 금강)에 대해서도 초기에는 전후복구를 위해 보존할 필요성을 고려했지만, 중국인민지원군의 개입 이후 재북상이 어려워지자 주요한 파괴목표로 삼았다. 당시에 수풍댐 발전량의 10% 이상이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공급되었다. 1952년 6월 23일~24일, 6월 26일~27일에 걸친 폭격으로 조선의 댐시설은 90% 가량이 파괴되었다.

 

 

 

 

 

대폭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전쟁의 발단은 아마도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미국의 대폭격은 조선과 베트남의 지도부에게 절멸과 생존의 갈림길에서 항복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승리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도록 만든 역설을 초래하였다. 또한 대폭격으로 인한 상공에 대한 공포는 광범한 지하시설의 구축과 촘촘한 대공망으로 귀결되었고, 종국적으로 ‘북핵’의 기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