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영세무장중립/한반도 중립화 논의

한반도 중립화 논의(2) 광복∼1970년대

twinkoreas studycamp 2021. 5. 4. 19:32

 

1945년 광복 이후 미·소공동위원회에서 중립화를 거론하기 시작했고, 1947년 트루먼 대통령의 지시로 중국내전에 관한 대책을 수립한 앨버트 웨드마이어(Albert Wedemyer)는 미·소가 철군하면 한반도의 영세중립을 보장할 것을 건의하였다.

 

좌우합작을 주장했던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파의 우측 8원칙은 남북 및 좌우의 합작으로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포함했는데, 임시정부가 미국과 소연방(Soviet Union)의 지지를 받으려면 군사적 중립화와 함께 쌍방의 이념적 접근 및 중도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에도 미 국무성은 한반도의 비무장중립화를 검토하였고, 이후 미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조선과 중·소의 국경지대를 따라 중립 및 안전보장 지대를 설정하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올리버(미 남가주대)

 

전쟁의 와중이었던 1952년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자문했던 올리버(Robert T. Oliver)는 스위스모델에 따른 영세중립화를 제의했다. 그는 한반도 국가의 중요한 역할을 완충국가로 규정하고, 미국 정부에도 한반도의 영세중립을 건의했다.

 

김용중(1952·미국), 김삼규(1953·일본)는 해외에서 한반도 중립화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김용중은 남과 북의 당국자들과 UN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지정학적으로 강대국에 포위된 한반도는 중립적으로 통일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비동맹국가로 구성된 중립국위원단을 임시국가기관으로 하여 인구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할 것으로 촉구하였다. 또한 선거 전에 남과 북의 기존 정부를 해체하고, 선거로 선출된 대표들이 헌법을 제정하여 단일정부를 구성한 다음에 외국군이 철수할 것을 제안했다.

 

김삼규 전 동아일보 주필은 한반도가 어느 진영에 편입되면 갈등과 전쟁의 불씨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국제적 동의를 얻어 중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 미·소에 의해서 수립된 남과 북의 기존 정부를 해산하고 UN의 감시 하에 총선거를 실시할 것과 쌍방의 모든 정당과 지역 대표들로 구성된 한국중립화위원회가 통일정부의 수립까지 한반도를 관리하여 최종적으로 UN의 승인을 받는 방안을 제안하였다.

 

19536월 히커슨(John D. Hickerson) 국무성 차관보 등이 수립한 한반도 대책에는 제2안으로 중립화 방안을 상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20세기 말에 비밀해제된 미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미국 수뇌부는 한국이 주도하는 중립화통일이 가능할 것으로 보았다.

 

19537월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에서 중립화통일 방안을 논의하였는데, 브래들리(Omar N. Bradley) 합참의장은 한반도 중립화 및 비무장화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도미노현상으로 일본이 중립화되면 미국의 동북아 거점이 사라질 것이라는 반론이 제기되었고, 스위스처럼 전수방위 개념의 무장중립이 바람직하다는 의견과 중립화 이후에 경무장을 보장하자는 의견이 개진되었다.

 

77일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주한미군과 기지를 유지하지 않더라도 미국의 정치적 정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은 한국’(substantially unchanged ROK with U.S. political orientation)에 의한 중립화통일(A unified, neutralized Korea)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와 관련해서 19718월 한국의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미국이 한반도 중립화를 모색했다는 내용을 담은 외교문서를 공개하라는 요구가 제기되었으나, 김용식 외무장관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1953년 윌리엄 노우랜드(William F. Knowland) 미 상원의원은 남과 북이 자유독립국가로서 강대국에 의해 중립화가 보장된다면 통일도 가능하지만, 한반도가 중·소와 미·일의 전쟁 발판으로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쌍방이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정전협정 이후 UN 총회를 앞두고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소연방, 영국, 캐나다, 프랑스, 인도의 대표에게 타진했다(New York Times. 1953. 9).

 

1955년 이영근은 일본 잡지 세카이의 기고문에서 주한 UN군을 한국전쟁에 참가하지 않은 군대로 교체하고, 한반도 문제를 제네바 국제회의에 회부할 것을 주장했다. 이 회의에서 한국전에 참가하지 않은 국가들로 선거감시단을 구성해서 남북 총선거에 관한 규정을 만들고, 중립화통일과 군사기지화 금지 및 내정 불간섭을 보장할 것을 제안하였다.

 

 

장면 총리의 중립화 불가론

 

장면 전 총리(더 위키)

 

19601110일 정일형 외무장관과 허터 (Christian Herter) 미 국무장관은 공동성명을 통해서 미국이 유엔결의에 의한 코리아의 통일을 위해 노력한다는 원칙을 확인하였지만, 미국과 일본의 UN대사는 미국과 격리된 한반도가 영국과 격리된 벨기에처럼 대륙세력에 의해서 중립성이 쉽게 파괴될 것이라고 우려하였다.

 

196111월 장면 총리는 한국 중립화론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중립화 불가론을 제시하였다. 장 총리의 성명에 따르면 중립을 성공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국내외에 걸쳐 제반 조건이 구비되어야 하는데 당시의 한반도 상황은 그러한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장 총리는 한반도 중립화론이 한국의 전략적 위치를 도외시했다는 점과 오스트리아는 중립이 침범을 당할 경우에 서방에서 즉시 개입이 가능한 지리적 조건에 있는 반면에 한국의 우방은 적시래원(適時來援)이 어렵다는 점을 중립화 불가의 핵심적 논거로 제기하였다. 즉 중·소와 접경한 전략적 요충에 있는 한반도는 오스트리아처럼 NATO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미국은 지리적으로 격리되어서 신속한 지원이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반도의 중립화는 벨기에처럼 쉽게 무력해질 위험이 크다고 보았다. 또한 오스트리아가 4개국의 점령치하에서 단일한 공동집행부를 유지한 반면에 남과 북은 2개의 정부로 나뉘어져 한 쪽에서 공산주의체제가 확립된 것도 중요한 차이점이라고 강조하였다.

 

게이츠켈(위키피디아)

 

19571월 게이츠켈(Hugh T. N. Gaitskell) 영국 노동당 대표는 방미 강연에서 코리아가 하나의 강대국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도록 명확하게 보장한다면 중립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1958년 영국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는 통일된 한반도가 중국의 선의 아래 존립할 수 있고, 핀란드 같은 존재양식(being mode just like Finlandization)을 추구하는 것도 유익하다는 견해를 소개하였다.

 

1960UN은 메논(Krishna Menon) 등을 한국에 파견해서 중립화방안을 탐색했으나, 조사단은 중립국의 감시 하에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는 방안에 대해서 비현실적이라고 보고하였다.

 

1960년 맨스필드(Mike Mansfield) 미 상원의원은 외교위원장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미국은 한반도 통일을 오스트리아의 중립화 조건으로 해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밝혔다.

 

맨스필드 의원의 발언을 계기로 해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민자통)를 비롯한 재야단체들이 남북협상과 영세중립화통일을 제창하였다.

 

1961년 언론인 출신 김석길과 양일동 의원은 중립화 구상에서 용공성향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석길은 중립국 대표들로 구성된 선거위원단이 주관하고 UN이 감시하여 한반도 중립화를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국회에서 헌법을 제정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서 로버트 스칼라피노(Robert A. Scalapino)는 한반도가 오스트리아 방식으로 중립화될 가능성을 희박하다고 평가하면서도 외국군 철수와 한반도 중립화를 모색할 가치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19639월 드골(Charles De Gaulle) 프랑스 대통령은 인도차이나의 평화를 위해서 5대국(····)이 동남아 일대의 중립화와 자결권을 보장하고 미군철수의 확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드골은 동남아 일대를 통째로 중립화하여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타이-미얀마로 이어지는 동남아 중립지대를 구축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듬해 1월 드골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중국의 참여를 보장해야 아시아 지역에서 실질적인 중립화가 가능하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대해서 린든 존슨(Linden B. Johnson) 미 대통령이 베트남 중립화를 고려할 여지가 있다고 밝히자, 한국에서는 중국이 베트남 중립화를 수용하면 한반도 중립화도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확산되었다.

 

1970년 모렐리(James W. Morely)는 주한미군 철수와 UN사령부 해산을 고려하여 한반도 중립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1972년 브레진스키(Zbigniew Brezinski)도 주한미군 철수 이후 한반도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에 주변 4강이 중립화를 보장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반면에 카힌(George M. Kahin)은 한반도 중립화를 동남아국가들의 중립화와 연계해서 접근하고, 한반도 중립화가 중국의 이익에도 부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711월 당시 김대중 의원은 미···소에 의한 안전보장론을 제기하였고, 그해 대통령선거에서 4대국 교차승인과 남·북의 UN 동시가입을 제안하기에 이르렀다.

 

1975년 핸더슨(Gregory Henderson/한국명 한대선)은 한반도 중립화가 주변국에 해롭지 않을 것으로 간주하고, 오스트리아 방식으로 중립화하는 방안을 미국이 승인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라이샤워(미 존스홉킨스대)

 

 

1976년 카터(James E. Carter) 미 대통령은 주한미군이 철수할 경우에 한반도 중립화가 필요할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라이샤워(Edwin Reischauer)도 주한미군 철수 이후에 한국정부가 통일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4강이 한반도 중립화에 대한 협정을 체결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밖에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 한반도 중립화가 필요하다는 견해를 밝혔고, 로버트 케네디(Robert Kennedy) 미 상원의원은 한국인이 원한다면 중립화도 무방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1977년 미국 언론인 아서 바네트(Arther D. Barnett)는 남북이 긴장완화를 위해 단계적인 군축과 비핵지대를 거쳐서 장기적으로 중립지역으로 설정하는 특별협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