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개/채현국의 '쓴 맛이 사는 맛'

채현국 어른과 제대로 늙는 문제

twinkoreas studycamp 2021. 4. 5. 17:23

 

지난 4월 2일 채현국 효암학원 명예이사장이 타계하였다. 고인은 평소에 스스로를 비틀비틀 살아온 인생이라고 하였지만, 세상은 그를 제대로 늙은 어른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흔히 늙음은 곧 달아빠짐, 낡음을 연상케 하지만, 고인은 젊은이들에게 늙음이 곧 낡음이 아니라는 인상을 남겨주었다.

그는 평소에 젊은 세대에게 “저런 노인들을 잘 봐두라. 너희들도 까딱하면 저 꼴이 되니 저렇게 되지 않으려면 잘 봐두라”고 경종을 울리곤 했다. “아비들이 처음부터 썩은 놈은 아니었어. 그놈도 예전엔 아들이었는데 아비 되고 난 다음에 썩는다고...”

 

고인에 대한 책으로는 <풍운아 채현국>(김주완)이 있지만, 서울대 철학과를 나온 고인은 자신에 대해서 한 권의 책도 쓰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 대해서 책을 쓰는 것을 스스로 미화하는 뻔뻔한 일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또한 나이 먹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농경사회에는 나이 먹을수록 지혜로워지는데,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지혜보다는 노욕의 덩어리가 될 염려가 더 크다는 겁니다. 농경사회에서는 욕망이 커봤자 뻔한 욕망밖에 안 되거든. 지가 날 수도 없고 기차 탈 수도 없고 자동차도 못 타니까 그랬는지 확실히 농경사회의 노인네는 경험이 중요했지. 지금은 경험이 다 고정관념이고 경험이 다 틀린 시대입니다. 먼저 안 건 전부 오류가 되는 시대입니다. 정보도 지식도 먼저 것은 다 틀리게 되죠. 이게 작동을 해서 그런지 나이 먹은 사람들이 지혜롭지 못하고 점점 더 욕구만 남는 노욕 덩어리가 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오마이뉴스, 2015.1.12)

 

 

그런데 본인이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생각을 담은 책이 있다. 고인의 구술을 엮은 <쓴 맛이 사는 맛>(채현국 구술, 정운현 기록)이다. 기록자는 머리글의 제목을 ‘꼰대가 아닌 어른을 만나다’로 하고, 제대로 늙고 싶은 중장년 세대의 바람을 이렇게 전하였다.

 

“나는 이런 사회에서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정말 겁난다. 늙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다. 제대로 늙고 싶다. 그런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소리를 꽥! 지르는 어른들은 많아도 나이 드는 법을 제대로 보여주는, 따라 하고 싶은 어르신은 정말 찾아보기 힘들다.”(엄기호, 제대로 늙고 싶다, 경향신문 2014.1.20)

 

구술자는 평소에 “통념의 지배를 받지 않고 지식의 지배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면서도 “지식이 지혜가 되지는 않는다”고 했다. 기록자는 이에 대해서 지혜가 앎에서 비롯하기보다는 슬기에서 연유한다고 부연하였다.

 

채 전 이사장의 근본적 취지는 기성의 노인세대에 대한 즉자적 현실비판이 아니라 장차 미래의 노인세대에 대한 대자적 미래비판으로 받아들여지길 바랐을 것이다.

 

“자기 껍질부터 못 깨는 사람은 또 그런 늙은이가 된다. 저 사람들 욕할 게 아니라 저 사람들이 저 꼴밖에 될 수 없었던 걸, 바로 너희 자리에서 너희가 생각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그에 따르면 쓴 맛이 사는 맛이란 쓴 맛조차도 사는 맛이며 인생이 쓸 때 삶이 깊어진다는 의미이고, 그래도 단 맛이 달다고 한다. 또한 사업가로 성공하였던 그는 돈 쓰는 재미보다 돈 버는 재미가 몇 천 배 강하다고 했다. 돈을 벌다 보면 그 매력이 어찌나 강한지 아무도 거기서 빠져 나올 수가 없다고 하였다. 어떤 이유로든 사업을 하게 되면 정의든 삶의 목적이든 이런 것은 다 부수적이 되고 돈 자체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벌이가 중독을 넘어 신앙이 돼버렸다고 하였다.

 

기록자와의 인터뷰에서 풍운아의 면모가 드러나는 대목들이 있다. “자기 개인 재산이란 게 어딨나? 다 이 세상 거지. 공산당 얘기가 아니다. 재산은 세상 것이다. 이 세상 것을 내가 잠시 맡아서 잘한 것뿐이다. 그럼 세상에 나눠야 해. 그건 자식한테 물려줄 게 아니다.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데...”

 

위 대목에서 기록자는 유한양행의 창업자인 유일한 박사를 떠올렸다. 유 박사는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고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는 말을 남겼다.

 

 

 

<쓴 맛이 사는 맛>(채현국 구술, 정운현 기록)에는 1950년대~1980년대 격동의 세월에 고인이 고이 간직했던 비화들이 나온다.

 

그에게는 집안에 얽힌 비사가 있었다. 스스로 서자라고 하는 내력을 밝혔다. 또한 서울대 상대 4학년에 재학중이었던 고인의 형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날에 “이제는 영구분단이다. 잘 살아라”는 말을 남기고 자진했다고 한다.

 

고인이 거명한 어른으로는 임락경 목사, 아동문학가 권정생, 작가 박완서, 시인 김수영 등이있다. 이 가운데 임 목사는 한국 철학자 유영모, 결핵환자를 돌본 이현필, 걸인과 한센병 환자를 돌본 최흥종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뜻 밖의 격투기도 나온다.

 

“어느 해 술자리에서 작고한 이수인 교수가 박인환 시인의 시를 노래로 옮긴 ‘목마와 숙녀’를 불렀다. 그러자 박태순이 노래가 너무 감상적이라며 대뜸 선배인 이수인의 따귀를 때렸다. 이 광경을 목도한 리영희 선생이 돌연 자리에서 뛰쳐나와 박태순의 따귀를 올려붙였다.”

 

 

 

 

채 전 이사장이 노인에 대해서 가혹하리만큼 냉정한 말들을 쏟아낸 것은 인간의 본성과 한계를 직시하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딱 한번 태어나서 처음 늙어가는 인간은 누구라도 미리 늙음을 학습할 수 없고 후대에 제대로 전수하기도 어렵다. 늙음도 죽음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닥쳐봐야 그 사정을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인은 후대에게 젊어서부터 늙음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가져야 제대로 늙을 수 있다고 강조했던 것 같다. 물론 후대가 그렇게 노력한다고 해서 노인들의 세상이 크게 달라질 것으로 기대하지는 않았겠지만...

 

제대로 늙는 것이야말로 웰 다잉(Well Dying)으로 가는 길이다. 바쁜 생활인이라고 해서 제대로 늙음에 대한 문제를 한가한 이야기로 치부할 일은 아닐 것이다. 제대로 늙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의 탄생성이 ‘새로운 시작’이라면, 사멸성은 ‘제대로 마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꼰대가 될 것인가, 어른이 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