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우옌 푸 쫑(Nguyen Phu Trong)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80세)이 별세했다. 최근 베트남은 국가주석, 국회의장의 사임과 서기장의 사망으로 ‘Top 4’에서 총리(서열 3위)만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 중국, 조선(DPRK), 쿠바 등에서 최고지도자의 종신집권 경향이 나타나고, 미국에서도 대통령의 노쇠 논란이 심각하다는 점에서 베트남의 세대교체 문화는 두드러진 측면이 있다.
하지만 20여년 전에 세대교체의 주역이었던 푸 쫑이 서기장 재직 중에 노환으로 별세한 것은 역설적이다. 근래에 베트남 지도부의 재직 중 사망이 이어지는 양상은 베트남 특유의 세대교체가 지연된 결과라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과거에는 70세를 즈음해 새로운 세대로 권력이양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되듯이 60대 초반에 세대교체의 기수로 권력서열에 진입했던 푸 쫑 서기장도 80세라는 세월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물론 그가 사전에 세대교체의 전통을 살리지 못한 것은 개인적 판단보다 근래 나타난 베트남 지도부의 잦은 변동에 따른 정치안정의 필요성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2006년 세대교체의 주역
소비에트연방의 말기에 브레즈네프 이후 고령의 지도자들이 승계 직후 사망하는 일이 연발하면서 정치국원 중 가장 젊었던 고르바초프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에 이르렀고, 중국의 개혁개방 초기에 덩샤오핑은 "60세가 넘으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는 단언으로 혁명원로의 2선퇴진을 주도하여 장쩌민-후진타오 등으로 세대교체의 길을 열었다.
그러나 역사는 되풀이된다. 의학이 발달할수록 노인정치는 더욱 연장될 것이다. 러-우크라이나전쟁 초기에 건강논란이 제기됐던 푸틴 러시아대통령은 사실상 종신체제를 유지하고 있고, 시진핑 중국 주석 겸 총비서도 재임기간을 무한연장할 기세다. 80대의 바이든 미 대통령은 인지력 문제 등 노쇠화 논란으로 대통령 후보직 사퇴압박을 받고 있다.
이러한 경향과 달리 베트남은 호치민의 시대를 거치면서 연로한 세대의 퇴진과 새로운 세대의 진입으로 권력 중심을 재구성하는 권력이양 및 세대교체의 전통을 유지해 왔다.
대표적으로 2006년 6월에 베트남 지도부가 일괄 퇴진하고 65세 이하 중진으로 대체하는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쩐득르엉 주석(69세), 판반카이 총리(72세), 응우옌반안 국회의장(68세)이 자진퇴진했지만, 이들이 정치국원으로 연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베트남공산당의 결정이었다.
당시에 푸 쫑은 세대교체 주역의 일원으로 국회의장에 선출됨으로써 권력서열 4위로 진입했고, 최종적으로 권력서열 1위까지 올랐다. 그는 하노이 출신으로 하노이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 및 언론인을 거쳐 하노이 당서기,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원, 국회의장(서열 4위), 국가주석(서열 2위)을 역임한 다음에 최고서열인 당 서기장(서열 1위)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또한 그는 총리(서열 3위)를 제외한 최고위급 직책을 모두 거쳤고, 한때 후임자인 국가주석의 급사로 서기장과 주석을 겸직한 시기도 있었다. 베트남 역사상 당 서기장과 주석을 겸직한 경우는 호치민 이후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푸 쫑은 러시아, 중국의 최고지도자처럼 절대권력자로 비쳐지지 않았다. 그는 호치민의 근검염정(勤儉廉正)을 계승하고자 했으며, 실제로 국회의장 재임시 아들의 결혼식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개인적 소신이나 성향과 함께 집단지도체제의 균형을 중시하는 베트남의 오랜 전통은 다른 사회주의국가들의 1인통치 스타일과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베트남은 분단과 전쟁을 겪었고, 지리적으로 남과 북이 격리된 조건에서 정치적 통합이 절실했다. 따라서 당 서기장, 국가 주석, 국회의장, 총리 등에 대한 인선에서 출신지역(북부 중부 남부)을 고려하여 안배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과거 베트남 사회주의혁명의 본거지였던 하노이가 속한 북부가 요직을 독식하거나, 거꾸로 남부와 중부가 과잉대표되지 않도록 한 것이다.
베트남 쇄신의 길(Vietnam on the path of renewal)
베트남에서는 1986년 제6차 당대회에서 당 서기장으로 선출된 응우옌 반 린(Nguyễn Văn Linh)이 ‘새로운 사고’를 주창하면서 도이머이가 본격화됐다. 반 린은 주변국과의 평화공존에 기초한 경제개발과 민생개선을 추진하여 ‘베트남의 고르바초프’라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1991년 부시 미 행정부는 ‘퀴드 프로 쿼’(quid pro quo)에 기초한 미-베트남 관계정상화 로드맵을 제시했고, 양국은 전쟁실종자(MIA) 조사를 위한 사무소 설치에 합의했다. 이어서 미국인의 베트남 단체여행이 허용됐고, 미국 생필품의 수출과 함께 NGO 활동과 통신개설이 시작됐다.
1994년 클린턴 미 행정부는 베트남에 대한 경제제재를 30년만에 전면 해제하였고, 이듬해 양국은 국교정상화를 선언하고 워싱턴과 하노이에 대사관을 개설했다.
이러한 격동의 시기에 푸 쫑은 왕성한 저술활동으로 도이머이(Doi Moi·刷新)에 관한 논전(論戰)을 전개한 대표적 이론가였다. 그는 1990년대 초반에 도이머이와 당의 노선 및 주요과제에 관한 다수의 논설과 해설을 발표했는데, 2004년에 ‘Vietnam on the Path of Renewal’이라는 영문판 단행본으로 재구성됐다.
그는 이 책에서 도이머이의 배경과 의의, 시장경제와 민주적 정치, 도시와 농촌의 문제, 산업화와 현대화의 방도, 개혁개방에서 나타난 문제점과 교훈, 사회주의 방향과 문제점, 자립경제(self-reliant economy)와 국제경제 등을 망라하여 쇄신의 길을 제시했다.
또한 그는 낡은 관료체제와 교조적인 리더십을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관료적 부패와 무능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다. 특히 당의 지도적 역할과 관련해서 인민과의 결합, 민주집중제 원리, 당의 개념과 리더십의 방법론, 시장경제와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 행정개혁의 비전과 방안, 정부와 당 안팎의 부패문제, 당원과 대중의 관계, 혁신의 빈곤, 당내 민주주의 등에 걸쳐 특유의 광범한 식견과 개혁의지를 드러냈다.
푸 쫑은 소연방(Soviet Union)이 붕괴하던 시기인 1992년에 ‘Why did the communist party of the Soviet Union collapse?’라는 논설에서 당과 인민의 괴리,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 포기, 인종차별 및 협량한 민족주의 확산을 몰락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특히 당이 국가의 역할을 대체하고 수행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