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전쟁의 양상

전쟁 이후 군사적 국가주의 강화 : 정전협정 위반 사건들

twinkoreas studycamp 2021. 3. 16. 23:22

 

 

과거사에서 비극 자체에 함몰되지 않고 자주국방의 원천을 찾는 것은 후대의 정당한 권리이자 의무라고 할 수 있다.

 

북과 남의 정전협정 위반사건들과 교전사건들은 쌍방의 세뇌교육과 국가주의를 공고히 하면서 군사적 역량을 증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조선의 군사적 도전에 대응하면서 한국의 무기체계와 방어태세가 강화되었다. 또한 일련의 비극적 사건들은 쌍방의 국가주의를 강화시키고 종국적으로 군사강국화로 귀결되었다.

 

한국의 언론이 보도한 조선의 정전협정 위반은 1960년대가 295건으로 가장 많았다. 분단 이후 전쟁(1950~53)을 제외한 2015년까지 총 677건의 50%에 가깝다.

 

정부자료에서도 북의 주요한 정전협정 위반은 1967년에 300건을 넘었고 1968년에 378건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하였다.

 

북은 1960년대~1970년대에 걸쳐 중·소에 대한 등거리외교를 통해서 경제원조와 군사원조를 이끌어내면서 자립경제의 강화와 자력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무력을 구축하는데 집중하였다. 휴전 이후 북의 군사행동은 1967년~1968년에 가장 직접적인 양상을 드러냈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은 중·소와 조선·베트남(월맹)의 대미 군사공조가 절정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1967년 12월 25일 호치민 베트남민주공화국 주석은 미국의 패전이 확실하다고 언명했고, 라디오하노이 등은 이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보도했다.

 

인민전쟁과 장기항전을 지휘한 보 응우옌 지압(Vo Nguyen Giap, 武元甲)은 1968년 5월 프랑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구정(Tet·뗏)을 기한 대공세가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고 전쟁을 선거에 이용하려던 린든 존슨 행정부의 야심이 좌절되었다고 주장했다(L’Humanite, 1968.6.4).

 

지압은 미국의 현대식 공군력으로도 전쟁의 결과를 결정할 수 없었다고 회고하였고, 베트남전쟁의 경과는 1967년~1972년 조선의 대남전략에도 투영되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지 않았고, 민주당이 시작한 두 전쟁은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공화당에 의해 정지되거나 종식되었다.

 

조선은 1967년 1월 19일 한국의 해군 초계호위함 PCE-56함(당포함)을 해안포로 공격해서 침몰시켰다. 당포함은 동해에서 어선을 보호하다가 불시의 공격을 받고 승무원 39명이 사망하였다.

 

 

1968년 울진 삼척 조선 인민군 특수부대 침투사건

 

 

1968년 1월 17일 휴전선을 넘은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124부대 30여명은 청와대 근처까지 접근해서 군경과 총격전을 벌였고(1.21사태), 1월 23일 미국의 푸에블로호(Pueblo Incident)가 조선 해군에 의해 나포돼 원산항에 억류되었다. 승조원 82명은 11개월이 지나서야 석방되었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으로 향하던 핵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호와 구축함 3척을 원산만 근처로 급파하고, 항모 2척과 잠수함 6척을 추가로 파견하여 응징태세를 보였지만, 베트남전과 대북공격을 병행하지는 못하였다.

 

미국은 소연방에 중재를 요청했지만 거부 당하자 조선과의 비밀협상을 통해서 승무원 귀환에 합의하였다. 조선은 선체를 돌려주지 않고 해체해서 평양으로 옮겨서 지금까지 전시하고 있다.

 

1968년 10월 30일~11월 2일에는 한국의 베이붐세대(60년대생)에게 세뇌적인 반공교육이 강화되는 비극적 사건들이 연발하였다. 조선의 특수부대가 세 차례에 걸쳐 울진·삼척에 잠입해서 12월 28일까지 게릴라전을 전개하면서 민간인을 포함한 쌍방의 인명피해가 다수 발생하였다(울진삼척무장공비침투사건). 특수부대원(무장공비)은 총 111명이 죽었고 5명이 생포되었다.

 

훗날 진위논란이 제기된 ‘이승복 어린이 피살사건’은 1998년 언론개혁시민연대가 선정한 ‘대한민국 오보 50선’에 포함되었으나, 2006년 대법원은 오보가 아니라고 판결하였다. 논란이 된 조선일보 보도와 다르게 피해자 증언을 그대로 보도한 중앙일보 기사(1968.12.11)가 액면 그대로 사실이라면 당시 초중등 교육에 미칠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피투성이 長男 必死의 申告 : 一家 4명 죽인 共匪들 發惡 [강릉=현지취재반]

 

9일 밤 平昌郡 ○○面 ○○里 李錫雨 씨(32) 집에서 빚어진 공비의 4명 참살사건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공비들의 만행이 무차별하고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이날 밤 8시30분쯤 아랫마을에서 이삿짐을 날라주고 싸릿문을 들어선 李씨는 집안 퇴비더미 뒤에서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 순간 이 그림자는 李씨에게 달려들어 칼로 李씨의 엉덩이를 찌르자 李씨는 비명을 지르며 ‘왜들 이러시오, 소라도 줄 테니 좋게 얘기합시다’고 애원했으나 공비들은 ‘소는 필요 없다’면서 총부리를 들이대고 ‘안방으로 가자’고 했다.

 

李씨는 안방으로 가는 체 하다가 공비들이 한 눈 파는 틈을 타서 부엌을 거쳐 담을 넘고 집 뒤에 있는 20미터 높이의 계곡을 뒹굴어 졸도했다. 이 때 아버지 李씨의 비명과 괴상한 소리에 놀란 장남 學官 군(14)이 방문을 열고 나오자 공비들은 ’이 새끼는 뭐냐?’ 하며 대검으로 여섯 번 찌른 후 퇴비더미에 처박았다.

 

공비들은 이어 안방에 침입, 놀고 있던 2남 承福 군(9)을 죽이자 옆방에서 메주를 쑤다가 달려온 李씨의 처 朱文河 여인(32)이 장녀 承淑(7), 2녀 承女 양을 껴안고 애들만이라도 살려줄 것을 애걸하자 이들 3명까지 찔러 죽인 후 닭 3마리와 옥수수 가마를 강탈, 도망쳤다.

 

공비들이 사라진 뒤 30분 만에 퇴비더미 속에서 의식을 회복한 장남 學官 군은 피투성이가 된 채 약 50미터 떨어진 崔大吉 씨 집으로 기어가서 ‘공비가 우리집 가족을 다 죽었다’고 알린 후 기절해버렸다.

 

崔씨는 李군의 말을 듣고 곧 1킬로쯤 떨어져 있는 경찰·예비군 초소에 ‘릴레이’ 신고, 군·경·예비군 수색대가 즉시 현장에 출두, 뒷산에서 2명을 사살했다.”

 

이 사건은 1974년 8월 15일 ‘문세광사건’과 함께 북에 대한 적개심을 고조시키고 유신체제의 등장, 군사적 국가주의, 병영국가화를 공고히 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문세광사건은 당시 육영수 여사의 피격 진상에 대한 역사적 논란을 초래하였다

 

1969년 4월 15일에는 승무원 31명이 탑승한 미 해군 정찰기(EC-121)가 조선의 해안포에 의해 격추되면서 승무원이 전원 사망하였다. 미국은 항모 엔터프라이즈호를 급파해서 보복공격을 준비하였지만, 베트남전쟁과 한반도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조선도 한국군과 미군 및 유엔사가 정전협정을 위반했다고 주장해 왔다.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력을 최대의 위협으로 간주하는 조선은 공중을 통한 정찰 및 훈련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로동신문>에서 주장한 정전협정 위반사례는 9천여건에 달하고, 1990년대(2,595건)가 많은 것은 당시 국제정세와 체제위협에 대한 우려가 투영되었다. 조선의 매체는 사소하거나 경미한 위반까지 일제히 보도해서 통계적으로 많은 숫자가 나왔다(남북한 군사충돌로 본 분단 70년사, 김용현).

 

1971년 말에 한국의 대간첩대책본부는 그해 1월부터 11월까지 59회에 걸쳐 무장공비 177명이 침투해서 68명이 사살되고 35명이 생포되었다고 밝혔다.

 

이어서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살사건(문세광 사건), 1976년 판문점사건(미군 2명사망 미류나무 도끼사건), 1983년 미얀마 아웅산묘역 폭파사건(각료 등 17인 사망) 등이 발생하였다.

 

 

1996년 강릉 특수부대 침투사건

 

1989년 동유럽의 급변과 1994년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체제불안과 붕괴론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조선은 1996년 9월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 26명을 상어급 잠수함으로 동해안에 침투시켰다.

 

이 사건으로 한국군 12명을 비롯해서 예비군 및 경찰 2명, 민간인 4명이 사망하였고, 침투작전을 진두지휘한 북측 인사는 공화국 영웅(2회)에 선정되었던 김동원 대좌(정찰국 해상처장)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