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10

미군 로이 드로이터 유해, 72년만에 귀향

한국전쟁 미군 전사자 유해의 최장기 송환기록이 다시 경신됐다.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의 유해가 4월 22일 미국 메릴랜드주 헤이커스타운에 안장됐다. 미 제7보병사단 제32보병연대 1대대 소속 로이 드로이터(Roy DeLauter)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격을 받고 사망했으나 당시에 수습되지 못했다. 미 DPAA¹⁾에 따르면, 그의 유해는 2018년 7월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추가송환 절차에 따라 북측이 넘긴 유해상자에 포함돼 있었다. 미 국방부는 유전자 감식 등을 통해서 4년여만에 신원을 최종 확인했다. 하와이 호놀룰루 국립묘지의 실종자 표지석에 새겨져 있는 그의 이름 옆에는 로제타(장미문양)이 부착됐다. 이제부터 실종자가 아니라 전사자라는 미 정부의 공식적 표식이다..

6.25 전쟁 : 전쟁외전(3) 미네소타 프로젝트

한국전쟁 당시 피살된 의사는 58명, 납치된 의사는 17명, 피살 혹은 실종된 간호사가 300여명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대 의대의 경우에는 주요 학과의 과장 8명이 납북되었고, 수십명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행방불명이 되거나 전사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사망하였다. 의료요원이 부족해지자 한국 정부는 부산(광복동), 광주(전남의대), 대구(경북의대) 등에 전시연합대학을 설치하여 의대생에 대한 교육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과 UN 등은 폐허가 된 한국을 복구하기 위한 다양한 원조사업을 시작했다. 미국이 미군정에서 전후복구를 거쳐서 1961년까지 한국에 제공한 무상원조는 31억 3,730만 달러에 달한다. 이러한 전폭적 지원은 사회주의 중국으로부터 한국을 보호하고 강화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

6.25전쟁 : 전쟁외전(2) 실종(MIA), 전쟁범죄, 유해송환

“괴물들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심연을 깊이 들여다 보면, 심연도 너를 깊이 들여다 볼 것이다.”(He who fights with monsters should look to it that he himself does not become a monster. And when you gaze long into an abyss the abyss also gazes into you.) - 니체 - 세계전쟁이 남긴 네 가지 교훈 2020년 2월에 타계한 이론물리학자 다이슨(Freeman J. Dyson)은 평론집 ‘Scientist As Rebel’에서 제2차세계대전이 남긴 교훈을 네 가지로 압축했다. 수학적 재능이 출중했던 다이슨은 세계대전 당시에 영국 공군본부에서 분석가로 활동했다...

6.25전쟁 : 전쟁외전(1) 포로, 고아, 경계인, 디아스포라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전쟁은 1년여만에 쌍방이 전쟁을 지속해야 할 주요한 목적이 종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년간 연장되면서 사상자수가 50% 가량 더 늘어났다. 첫 1년 동안 사상자수가 200만명이었다면, 나머지 2년 동안 추가된 100만명은 피할 수도 있었던 희생이었다. 지평리~원주전투(1951.1월~2월)에서는 중국군의 참패가 부각되었지만 초기에는 2천여명의 사상자를 낸 네덜란드 대대를 비롯해서 유엔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미 해병대가 반격하면서 엄청난 숫자의 네덜란드군 시신을 발견했고, 미 15야전포병대대 소속 128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한국군 사상자는 1만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포로와 고아의 문제 전쟁에서 탄환과 포환, 총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굶주림과 정신적 충격,..

6.25전쟁 : 오산과 미비의 한국전쟁(3)

정전협정 후에 김일성 수상은 “미제와 추종국가의 군대가 아니라 이승만 괴뢰군만을 상대하여 싸웠다면 우리는 벌써 조국의 통일을 이룩하였을 것이다”고 주장했고(1953.10.23. 조선인민군 제256군부대 연설), 이승만 대통령은 “중국만 개입하지 않았다면 조국의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정녕 조국의 통일은 외세를 등에 업은 일방의 무력으로 가능했던 것일까? 전쟁이라는 수단 자체를 일체의 정치적 수단을 차단시킨 비현실적인 희원적 사고(wishful thinking)의 산물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박명림, 한국 1950 : 전쟁과 평화, 2003). 박명림은 ‘희원적 사고’를 정책 결정자들이 특정의 신념과 가치체계 때문에 자신들이 보기를 원하는 것만 보고, 그 결과 정보기능의 실패라든가 정책실현 ..

6.25 전쟁 : 오산과 미비의 한국전쟁(2)

“필자는 이 연구를 진행하며 끝없는 죽임과 시체로 인해 밤이면 자주 가위눌려 헛소리와 땀으로 범벅된 채 잠 못 이루며 집필을 중단하곤 하였다가, 자신도 모르게 종교적이 되어가고, 끝내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 죽은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변화된 모습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박명림, 한국 1950 : 전쟁과 평화, 서문에서, 2002.9) 전쟁의 시작 전날 새벽에 조선인민군 949군부대(의무대)는 전선에 야전병원을 설치하였다. 최용건 민족보위상(국방부장관)은 군 일선에 ‘남측의 38선 침범’에 대한 반격명령을 하달하였다. 한국전쟁은 서해안에서 시작되었다. 내무성 38선 경비여단(최현 소장)이 가장 먼저 옹진반도에 진입했고, 766유격대(오진우 총좌)의 일부 대대가 산악지대와 동해를 통해서 강릉, 삼척, ..

6.25 전쟁 : 오산과 미비의 한국전쟁(1)

2021년 6월은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71주년이다. 조선(DPRK)의 전후세대는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의 원리에 입각해서 선제침공과 관련된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고 한국전쟁을 평가하는 지적 정직성이 필요하고, 한국(ROK)의 전후세대는 어떤 부분들이 아니라 ‘3년 전쟁’의 전체적 실상에 대한 성찰적 접근이 필요하다. 1994년 옐친(Boris Yelchin) 러시아연방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한 외교전문들과 중국에서 공개된 문서 등에 따르면 한국전쟁의 공격개시 결정은 조선에 의해 이뤄졌다. 한국전쟁 연구자들은 한국군이 선제공격을 준비했다면 그렇게 단시간에 불리해진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합리적 의심에 동의한다. 소비에트체제 연구자 웨더바이(Kathryn Weathersby)는 소연..

1951년 4월 임진강전투, 가평전투 70주년

2020년에서 2023년까지는 한국전쟁 3년에 벌어졌던 일들이 차례로 70주년을 맞이한다. 지난해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행사, 올해는 1.4 후퇴 이후 전투와 관련된 70주년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2023년에는 정전협정 70주년 행사가 기다리고 있다. 4월을 맞이하여 한국 정부는 영국과는 임진강전투, 호주․캐나다와는 가평전투의 7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1951년 : 오산과 미비로 인한 전쟁 연장 1951년이 70년 후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쌍방이 1년에 끝낼 수도 있었을 전쟁을 3년 동안 연장한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1950년 9월 27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세 가지 명령을 하달하였다. “첫째, 조선 인민군을 분쇄하라. 둘째, 최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체제로 한반도를 통일시켜라. 셋째, 소연방(..

전쟁 이후 군사적 국가주의 강화 : 정전협정 위반 사건들

과거사에서 비극 자체에 함몰되지 않고 자주국방의 원천을 찾는 것은 후대의 정당한 권리이자 의무라고 할 수 있다. 북과 남의 정전협정 위반사건들과 교전사건들은 쌍방의 세뇌교육과 국가주의를 공고히 하면서 군사적 역량을 증진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조선의 군사적 도전에 대응하면서 한국의 무기체계와 방어태세가 강화되었다. 또한 일련의 비극적 사건들은 쌍방의 국가주의를 강화시키고 종국적으로 군사강국화로 귀결되었다. 한국의 언론이 보도한 조선의 정전협정 위반은 1960년대가 295건으로 가장 많았다. 분단 이후 전쟁(1950~53)을 제외한 2015년까지 총 677건의 50%에 가깝다. 정부자료에서도 북의 주요한 정전협정 위반은 1967년에 300건을 넘었고 1968년에 378건으로 역대 최고를 기록하였다. 북은..

한국전쟁 70년 : 미비와 오판의 전쟁

2020년에 70주년이 되었던 한국전쟁을 끊임없이 사유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이라는 점에서 ‘카인과 아벨’의 서사를 불러들이는 민족적, 국가적 비극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데미안’에는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카인이 절대악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1차세계대전을 반대했던 헤세는 전쟁의 당사국들이 서로 상대를 카인으로 간주하는 것을 은유했는지도 모른다. 새롭게 공개되거나 밝혀진 사실들을 통하여 한국전쟁의 전말을 사실에 기초하여 기억하고, 한국전쟁에 대한 양측의 입장과 태도에서 어디까지 화해할 수 있고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1950년 이후에 태어난 전후세대, 아니 194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한국전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