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오산과 미비의 전쟁

6.25전쟁 : 전쟁외전(1) 포로, 고아, 경계인, 디아스포라

twinkoreas studycamp 2021. 6. 9. 15:32

 

초토화된 서울 중심부

 

실질적으로 보면 한국전쟁은 1년여만에 쌍방이 전쟁을 지속해야 할 주요한 목적이 종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2년간 연장되면서 사상자수가 50% 가량 더 늘어났다. 1년 동안 사상자수가 200만명이었다면, 나머지 2년 동안 추가된 100만명은 피할 수도 있었던 희생이었다.

 

지평리~원주전투(1951.1~2)에서는 중국군의 참패가 부각되었지만 초기에는 2천여명의 사상자를 낸 네덜란드 대대를 비롯해서 유엔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 미 해병대가 반격하면서 엄청난 숫자의 네덜란드군 시신을 발견했고, 15야전포병대대 소속 128명이 포로로 잡혀갔다. 한국군 사상자는 1만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포로와 고아의 문제

 

전쟁에서 탄환과 포환, 총검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굶주림과 정신적 충격, 가족의 파괴였다. 대부분의 전쟁에서 기아로 인한 죽음이 전투로 인한 사망자보다 훨씬 많다.

 

한국전쟁은 쌍방이 포로와 고아를 생각하지 않고 시작한 전쟁이고, 확전한 전쟁이었다. 이로 인해서 상당수 포로와 고아들이 비참하게 삶을 마쳤다. 해외 언론에서는 한국전쟁은 고아를 만들기 위해 시작한 전쟁이다고 할 정도로 무수한 어린이들이 부모를 잃었다.

 

1951년의 두 번째 겨울전쟁(second winter campaign)’은 첫 번째 겨울보다 참혹하지 않았지만 미군은 정찰을 수행하면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미군 병사들은 정찰의 효용성에 대해 의문을 품었고, 동료의 전사를 재수 없는 죽음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

 

무엇보다도 두 번째 겨울은 첫 번째 여름과 겨울에 붙잡혔던 미군들이 중국군 제5포로수용소 등에서 하루 평균 28명씩 사망하던 죽음의 시간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강화된 제네바 협정은 전쟁포로의 건강유지, 영양실조 및 체중감소 예방을 위한 식사를 규정하고 있지만, 중국인의 거의 절반과 북한 주민 대다수가 굶주리는 상황에서 미군포로에게 급식을 잘해 주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미군포로의 영양과 보건의료 상황은 중국군 지휘부의 의지와 별개의 문제는 아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객관적 여건이 너무 좋지 않았다.

 

페렌바크는 이런 전쟁(This Kind of War)’에서 미군 포로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이유를 열악한 조건보다 앞선 문명에 길들여진 나약함에서 찾았다. 같은 조건에서 한국군과 터키군 포로는 대부분 살아남았고, 영국군 하사관 포로들도 잘 버티어냈다고 한다.

 

터키군 포로들은 어떤 풀들을 뜯어서 먹기도 했는데 이를 지켜본 일부 고학력 미군포로들이 따라했다고 한다. 식물의 약리 작용에 대한 어렴풋한 관념이라도 있었던 미군들은 생존을 위해 인종과 문화의 편견을 뛰어넘는데 인색하지 않았던 것이다.

 

포로 중에서 사망률이 가장 높았던 것은 미군(50% 수준)이었지만, 그 중에서도 부인 및 가족이 있는 30대 이후 연령대가 20대 젊은이들보다 훨씬 많이 생환했다. 아마도 돌아가야 할 이유가 분명하고 확고할수록 생존의 확률도 좋았던 모양이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군의 조직적인 포로교화 작업에서 가난한 농촌 출신, 가톨릭신자, 흑인 출신 미군병사들은 효과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교육적, 경제적 혜택을 받았던 백인 병사들에게서 선무공작의 효과가 있었고, 오히려 아메리칸 프롤레타리아라고 할만한 저학력 흑인들에게는 이념교화가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1952년부터는 주로 포로교환 협상으로 양측의 신경전이 고조되었다. 425일 북한군, 중국군 협상대표는 “11만명의 포로가 전원 송환되기 전에는 휴전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최후통첩을 보내고 퇴장했다.

 

57일에는 거제 포로수용소장이었던 미군 준장이 북한군 포로들에게 억류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510일에 풀려났지만 도쿄 총사령부로 소환돼 대령으로 강등되고 퇴역됐다. 당시에 평양과 판문점에서 나오는 모종의 지시 및 포로협상 관련 정보가 거제도 수용소에 빠르게 전달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전투 외 이탈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1사단이 지옥터널을 뚫고 나오는 과정에서 561명이 사망하고 182명이 실종됐지만 중상을 포함한 부상자가 2,894명에 달했다. 그런데 군병력의 인적 손실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전투 외의 요인에 의한 이탈이었다. 무려 36백여명이 동상, 질병, 공황증세 등 정신적 요인에 의해서 전력에서 이탈한 것이다.

 

미군의 3.8선 이북 진격에 부정적이었던 애치슨 국무장관은 군우리·장진호전투를 제1차 불런전투(First Battle of Bull Run)의 참패에 비유했다. “8군과 10군단은 불런전투 참패 이후 최대의 굴욕이다.”

 

남북전쟁 중에 1861721일에 발생한 불런 전투는 북군이 참패하고 워싱턴으로 퇴각한 역사적 전투였다. 북군은 리치먼드를 점령하여 조기에 전쟁을 끝내려는 의도로 대공세를 취하는데, 남군의 포위섬멸 전술로 인하여 혼란에 빠진다.

 

북군은 후퇴하는 병사들과 전진하는 병사들이 뒤섞여 지휘 및 통제가 붕괴되고, 일선 지휘관들이 전사 및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기강이 무너진다. 북군의 증원군은 패주하는 병력과 뒤섞여 혼란에 빠지면서 전군이 공황상태에 빠진다.

 

당시 북군은 32,230명이었고 남군이 28,450명으로 더 적었다. 또한 북군은 460명이 사망하고 1,124명이 부상을 당했고, 남군은 사망 387명과 부상 1,582명으로 피해가 더 컸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북군은 사상자가 남군보다 적었지만 포로와 실종에서 훨씬 많았다. 북군은 1,312명에 달했고, 남군은 13명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 전투의 핵심적 교훈은 북군 지휘부가 남군의 군사적 능력을 얕잡아보고 참패한 것으로 요약된다. 애치슨이 블런 전투를 호출한 것은 상대를 잘 알지 못하고 덤비다가 깊은 내상을 입었던 북군과 같은 미군이 오산과 미비를 드러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종군기자 : 이진선의 경우

 

 

20008월에 언론인 손석춘은 중국 옌벤으로 건너가 이진선이라는 노인의 오래된 일기들을 입수하였고, 이듬해에 소설의 형식으로 엮어서 아름다운 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의 일기는 18세였던 193841일에 연희전문 철학과 등록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해 19981010일에 끝난다. 해방과 분단, 전쟁과 남북의 병영국가화’, 소연방(Soviet Union)과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해체를 거쳐 무려 60년에 걸친 흔적이었다. 막판에는 고난의 행군과 조선 변방의 기아사태가 가로놓여 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진선은 일제 강점기에 연희전문 철학과를 나와 당시 백남운 교수 등으로 추정되는 교수들의 추천으로 학위 취득 및 교수직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고사하고 부인 신여린과 함께 월북하였다. 신여린은 연희전문 1년 후배이고, 두 사람은 1939년 항일 사회주의 성향의 학생들이 모인 사상연구회에서 만났다.

 

이진선은 남부군으로 잘 알려진 이현상에게서 박헌영을 잘 모시라는 당부와 함께 권총을 건네받았다고 한다. 그가 아직 젊은 나이였지만 남로당 내부에서 촉망을 받았던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로동신문> 종군기자 자격으로 서울로 내려갔을 때 장모의 죽음을 들었고, 충주 본가에 내려갔으나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의 월북 직후 아버지는 갇히고 어머니는 외아들과 남편을 잃고 충격에 빠져 숨졌는데, 아버지도 전쟁 발발 이후 후퇴하던 국방군에 의해 총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하였고 마침내 시신을 발견하여 모친 곁에 안장했다.

 

이진선은 195194일 전선취재 중에 포격 파편을 맞아 창자가 터져 나오는 복부 중상을 입고 해주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919일 평양의 집으로 돌아갔는데 갑자기 미군기의 공습을 받아 눈 앞에서 부인과 아들 이서돌이 폭사하는 참극을 겪었다.

 

1950628일 정오

서울, 서울, 서울이다. 4년 전에 쫓기다시피 떠난 서울에 이제 당당히 인민해방군과 함께 <로동신문> 종군기자가 되어 개선했다.

 

628일 밤

놈들이 황망히 동망하는 순간에도 기어이 김상룡 동지와 이관술 동지를 총살했다. 남편과 오빠를 동시에 잃고 오열하던 이순금 동지는 끝내 실신했다. (...) 김일성 수상 동지는 미군이 결코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있다고 들었다.

 

629일 밤

중국혁명에서 혁혁한 전과를 세웠던 전사들이 주력부대로 나선 서울 공격은 수나롭게 진행되었다. 춘천과 홍천 방면으로 진격한 2사단과 7사단이 주춤거려 작전상의 큰 착오가 생겼다.

 

71

춘천과 홍천을 점령한 2군단과 보조를 맞춰야 했던 인민군이 서울에서 아까운 3일을 낭비하고 다시 진격에 나섰다.

 

72

지난달 30일 미군이 개입하겠다고 공식 결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74

2군단 지휘부가 전격 교체되고, 군단장에 중국 팔로군 포병단장 출신 무정 장군이 취임했다.

 

85

인민의 군대가 승승장구하고 있다.

 

825

지리산 이현상 동지가 이끄는 유격대가 거창의 미군사령부를 습격한 전과가 보고됐다. 100여명을 사살했다.

 

910

너무나 많은 동무들이 낙동강에서 스러져가고 있다. 미제의 폭격에 찢겨가는 동무들의 아우성에 거의 미칠 지경이다. 쉼 없이, 미친 듯이 하늘에서, 땅에서 퍼붓는 미제의 폭탄은 조선 인민의 소중한 아들들의 생명을 마구 빼앗고 있다. 폭탄은 이미 숨진 혁명전사들의 숭고한 주검까지 거침없이 난자질했다. 콸콸 쏟아지는 선홍색 피가 도랑을 이루며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난 몸서리쳤다.

 

920

청천벽력이다. 15일 미제가 인천에 상륙했다. (...) 해방전쟁이 시작되던 날(1950625) 새벽, 평양 집을 떠날 때 서돌이가 한 말이 더더욱 가슴을 울린다. (...) “우리 아들이 혁명이 뭔지 알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잘살게 아름다운 집을 짓는 거예요. 맞죠?”

 

1951915

지난 94일 남서부전선(38선 접경지대 추정) 취재 중 복부에 폭탄 파편을 맞았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뒤 깨어난 곳은 해주의 야전병원이었다.

 

1220

지난해(1950) 만포진 소련대사관에서 10월혁명 기념연회가 열렸을 때 이미 박헌영 동지와 김일성 동지가 전쟁 책임을 놓고 공개적인 논쟁을 벌였다는 말을 남로당 동지에게 들었다.

 

195212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

 

 

78세에 남긴 유언

 

이진선 말년의 유일한 벗이었던 최진이 할머니가 보관해온 그의 유언에는 부모와 처자를 혁명과 전쟁의 와중에 모두 잃고 사고무친(四顧無親)의 고독 속에서 평생을 민족의 해방과 통일, 그리고 조선의 신체제 건설을 위해 헌신했던 혁명가의 결기가 서릿발처럼 번뜩였다.

 

조선로동당 총비서 김정일 동지. 죽음을 앞둔 78세의 늙은 인민입니다. (...) 첫째. 인민대중을 참으로 중심에 놓고 당을 재건하는 혁명에 나서주기 바랍니다. (...) 레닌 동지는 사회주의는 인민대중의 창조물임을 언제나 강조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조선 민족을 태양 민족또는 김일성 민족이라 부르거나 고 김일성 주석의 생년을 기준으로 주체의 연호를 사용하는 현실은 당의 명백한 위기입니다. (...) 둘째. 진정한 인민의 지도자가 되길 바랍니다. (...) 중국 공산당의 주은래나 등소평 동지, 그리고 월남공산당의 호지명 동지처럼 소탈한 인민의 벗으로 거듭나기 바랍니다. (...)”

 

아직 오지 않은 동지에게. (...) 우주의 한 부분인 삶은 우주가 그러하듯 아직 우리에게 진실을 온전하게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 비록 그들의 평생은 물질적으로 호화로웠는지 모르지만 올바르거나 아름다운 삶은 분명 아니었습니다. (...) 민중의 투쟁만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삶의 공간을 민주화해왔습니다. (...) 러시아혁명은 공산당선언에 비추어보더라도 지나치게 일찍 온 혁명이었습니다. 사산의 운명을 띠고 온 혁명입니다. 하지만 그 실패가 아무런 교훈을 주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참담한 좌절은 사회주의를 이루려면 아직 더 인류가 성숙해야 한다는 진실을 알려줍니다. (...) 삶은 그 뿌리부터 나눔이요, 사랑인 까닭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당신을 사랑합니다.” (손석춘, 아름다운 집, 415~426)

 

 

 

 

 

경계인 : 김성칠 교수의 경우

 

 

한글로 국사를 엮은 조선의 역사의 저자인 고 김성칠 서울대 사학과 교수는 한국전쟁 초기의 기록을 일기 형식으로 남겼다. 이를 역사 앞에서 : 한 사학자의 6.25일기로 엮어 펴냈다.

 

김성칠 교수는 경북 영천에서 태어나 대구고보를 거쳐 1937년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금융조합 이사로 활동하다가 1941년 경성제대 사학과에 진학했다. 이듬해 조선어문학과에 입학한 이남덕 여사와 캠퍼스 커플이 되었다.

 

민족주의자이자 중도주의자였던 경계인김성칠은 1951109일 새벽 3시반~4시반 경에 영천 고향집에서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피격됐다. 당시 38세였다. 그의 일기는 194512월에 시작해서 19514월에 끝난다.

 

부인 고 이남덕 여사는 김성칠과 9년 반 동안 함께 했고, 결혼 생활은 7년 반이었다. 그리고 홀로 남아 31녀를 키웠다. 이 여사는 나중에 이화여대 국문학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김 교수가 돌아가신지 50년이 더 지난 시점인 1993년에 남편의 일기를 세상에 공개하였다.

 

전쟁일기의 무대가 된 정릉골 손가장 마을의 안주인은 이남덕이었다. 유난히 큰 집에 살림을 차린 덕에 대문을 열어놓고 지냈다.

 

전쟁 중에 넓은 집은 누가 찾아와 문을 열어줄 때까지 남편과 6촌 시동생이 숨을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는 핑계거리가 되었다.

 

집이 넓다 보니 인민군 1소대와 국군 십 수명이 머물기도 했다. 대신에 닭, 오리, 염소, 토끼, 개를 키우고 텃밭을 가꾸는 전원생활의 낙도 있었지만, 전란으로 궁핍해진 살림에 아이 셋을 키워야 했던 생활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때 점심을 먹고 온 인민군들이 가져온 밥을 마저 먹지 못하고 많이 남겨놓고 가서 식량난으로 고생하던 시절에 큰 행운으로 여기면서도 곡물을 주식으로 하는 한민족의 기아감의 정체를 봤다고 회상했다. 한 그릇을 담아 두 숟갈 정도만 더 얹으면 될 것을 정량을 채우지 못하니 마냥 굶주림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19501010일 경 한국군이 함경도 원산에 이르렀다는 보도가 있을 때도 뒷산에서 가끔 조선인민군 등의 게릴라 부대가 출몰했다고 한다.

 

2012년에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남덕 여사는 너무 일찍 잃은 남편에 대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좌익의 편에 서지 않았으나 시대적 경향이 경향인지라 좌익 편에 친구들이 많았다. 동란 때문에 좌우는 불구대천의 원수가 돼 중도입장에 서 있는 그로서는 친구들 모두를 잃게 된 것이다. 그의 중도주의는 서양의 자유민주주의사상이 가장 가깝다는 뜻에서 리버럴리스트로 자칭한 것이며, 나의 이해로는 동향의 성현-공자의 중용의 도나 불타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의 사상에 근원을 둔 것이 아닐까 한다.”

 

 

중도 민족주의자의 피격

 

6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사학자 김성칠은 남북 당국의 협상태도를 나란히 비판하였다.

 

먼저 북측이 이승만 대통령 등 9명을 제외하고 통일하자고 제안한 것에 대해 이남에서 김일성 수상 등을 제외하자고 제안해놓고 이북에서 듣지 않는다고 소위 북벌(北伐)을 한다면 국민은 수긍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되묻는다.

 

그 다음에 남측의 대응을 꾸짖었다. “제안의 내용은 우물쭈물 비밀에 부치고 이른바 호소문을 가져온 사람들을 잡아서 전향시키고 방송을 하고 하니, 아무리 억지의 제안을 가져왔대도 사자(使者)의 형식으로 월경해온 사람들을 잡아서 족지는 것이 도리에 어긋남이며, (중략) 국민은 또 어떠한 교묘한 고문을 썼기에 일껏 결심하고 넘어온 사람들로 하여금 그토록 쉽사리 변절하게 하였을까 하고 다시 한번 생각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627일에는 이렇게 썼다. 새벽 라디오에 신성모 국무총리 서리의 특별방송에서 정부가 수원으로 옮겨가게 되었다고 한다. 앞산에선 대포를 걸어서 불을 뿜고, 후퇴하는 것으로 보이는 군인들이 모자에 풀을 꽂은채 산에서 내려왔다. 오후 라디오에선 공보처에서 신 총리서리의 발표는 오보이고 대통령 이하 전원이 중앙청에 집무한다고 발표하고, 국방부 정훈국 보고과장 김현수가 특별방송으로 맥아더 사령부의 전투 지소를 오늘 즉각 서울에 설치하고 내일부터 미군기가 직접 전투할 것이라면서 장병과 국민은 전선과 직장을 사수하라고 했다. 이 연설은 이날 반복적으로 방송했다.

 

96일 일기에는 미군기가 밤낮으로 서울의 하늘을 찾아오니 등화관제가 엄격해졌다고 썼다. 그런데 두 아들을 의용군으로 보낸 70대 노부부와 병든 며느리, 아이 네명이 굶주리게 된 앞 집(유씨댁)은 일부러 불을 꺼놓고 인민군이 찾아와 총으로 위협해도 끄지 않았다. “총을 쏘라우. 이대로 창사가 곯아 비틀어져 죽는 괴로움보다는 차라리 총을 맞아 죽는 것이 좋지. 폭탄이 떨어져서 한꺼번에 다 죽으면 더더욱 시원하겠지.”

 

716오늘은 용산방면에 대폭격이다. “B29인 성싶은 미기의 여러 편대가 차례차례 폭탄을 던지고 가고 또 오고를 두어 시간 동안 계속했다. 이른바 해방촌이 맹폭을 받아 수천명의 무고한 사상자가 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글 다음에 기가 막힌 대목이 이어진다. “폭탄이 쏟아지는데 높은 곳에 올라가 비행기에 손수건을 흔든 여인이 있었다고 한다. 미친 사람이 아니고 그날 아침에 전출명령을 받은 어떤 가족이었다고 한다.”

 

104인민위원회가 서울시민에게 총검으로 전출을 강요할 때 입은 그래로 가라. 가는 곳엔 집과 살림과 먹을 것이 다 마련되어 있다. 짐은 맡겨두면 잘 보관했다가 나중에 보내주마고 하였다. 그들의 가재도구는 지금 고물시장에 넝마로 나돌고 있으니 그들이 전쟁에 지지 않았더라도 들리는 바 리(), () 인위(人委) 구성의 인적 소질로 보아 얼마나 양심적으로 보관되었을는지는 자못 의문되는 점이다.”

 

725종로 화신백화점에서 공습경보 싸이렌에 지하실로 대피했다. 공급이 두어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폭탄이 떨어진 듯 백화점이 통째로 울리고 기총소사하는 소리가 연거푸 귀창을 찢을 것만 같았다.”

 

731돈암동 전차가 통했으나 빈번한 공습으로 탔다가 내렸다가 하느라고 걷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린다. 비행기가 뜨면 그 자리에 붙어버리고 승객은 내려서 골목길, 처마 밑으로 대피한다.”

 

84폭격이 날로 심해져간다. 서울 변두리에도 소이탄, 로켓탄을 퍼붓는다. 청량리, 창동역 방면을 폭격했다는 소문이 났다. 미아리 유지(油脂) 공장을 잿더미로 만들었다는 소문도 있다. 미 공군기가 미아리 방면을 공격할 때는 우리 집 지붕마루 위에서 거꾸로 내리박히는 것 같아 아슬아슬했다.”

 

816일본도 손을 들지 않을 수 없었던 미국의 힘과 겨뤄서 자꾸만 이겨나간다는 사실은 조선 사람으로서 어깻바람이 나는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내 처지의 여하를 초월해서 일종의 민족적 긍지를 갖게 하는 사실이다.”

 

821“<인민보>에 실린 김일성 장군의 8.15기념사에서 “8월을 해방의 달로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 말은 생각하기에 따라선 8월 안으로 전쟁을 결말짓지 못하면 승리의 기회를 놓치고 말 것이란 의미로, 좀더 깊이 생각하면 다시는 더 싸워나갈 기력이 없다는 말과 같이 여겨진다.”

 

831맥아더가 김일성에게 강경한 조건으로 항복을 요구했다. 2주일 내로 조선사변을 끝마치겠노라고 성언하였다. 이북측이 더 전쟁을 계속할 기력이 없어졌다는 말을 들었다.”

 

이날 자택으로 찾아온 학생이 선생님은 이 전쟁을 어떻게 보십니까?”라고 묻자, 김성칠 교수는 첫째는 동족상잔함이 슬프고, 둘째는 미군과 조선 사람이 겨루어 방금 피를 흘리고 있는데, 우리는 오히려 미군에 마음을 붙이고 있는 사람이 많게끔 되었으니 이 사실이 슬프다고 답했다고 적었다.

 

95, 배추 씨를 파종하라는 지시에 마지 못해 응하면서도 당장 식량대용을 공급해주는 호박밭을 갈아엎어야 한다니 어이 없는 일이다. 토지개혁으로 토지를 얻은 농민들도 계획파종과 현물세와 성출 때문에 골치를 앓고 있다.”

 

910인민공화국의 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한글전용이다. 그런데 한글을 전용하다보면 저절로 말씨가 부드러워져야 하는데 갈수록 어려운 한문 문자투성이가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

 

김 교수는 모스크바 등으로 격리된 조선인들이 한두 세대 묵은 조선어로 이념서적을 번역하고 평양은 이를 직수입하여 신성시함으로써 이런 폐단이 생겼을 것이라고 보았다.

 

915대한민국 관리, 군인, 경관, 대한청년단원, 민보당원, 기타 대한민국을 위하여 일한 사람은 모두 자수하라. 자수한 사람은 무조건 포섭하고 그 신분을 보장한다. 그렇지 아니한 자는 엄정한 처단을 받을 날이 올 것이다.”(공고문)

 

그러나 내무서로 자수서를 써 간 사람들 중에 상당수가 풀려나지 못했다고 한다.

 

916나를 회색분자, 기회분자라고 욕할는지 모르나 내 기회주의는 한번도 어느 편이 승세인가 하고 기웃거리지 아니라였고, 어느 편이 올바른가 하고 마음 속으로 따져보긴 하였으나 그 어느 편에 좇아서도 보다 더 출세하려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품어본 일이 없으므로 내 양심에 물어보아서 부끄럽지 아니하였다.”

 

그제(914) 밤에 청취된 일본 라디오방송에서 유엔군이 4만명을 증강하기로 되어 9,10월 중에 2만명, 11,12월 중에 2만명이 오게 됐다고 한다. 크게 낙심한다. 식량난으로 하루 이틀을 다투고 있는 마당에 전쟁을 언제까지 끌려는 것인가?”

 

그러면서 지인이 했다는 말을 떠올린다. “백성을 다 죽인 후에 독립은 해서 무얼 하며 통일을 한들 무얼 합니까?”

 

9.28 “새벽부터 인민군이 버리고 간 군수물자 약탈극이 벌어졌다. 아직 국군과 유엔군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 기미를 알아채고 서로 식료품과 피륙을 차지하려고 아수라장을 연출한 모양이다. 낮때가 지나서야 미군이 들어와 소탕전을 하는 모양이다.”

 

9.29 “새벽에 인민군 유격대가 기습하여 마을 한복판에서 미군과 격전이 있었다. 보는 이들은 모두 인민군의 왕성한 공격 정신을 찬양하였었다. 그들이 어느 편에 서 있는 군사임은 별문제로 하고 조선 사람이 그처럼 용감하다는 말에 나는 허덕 좋았다.”

 

1010동네 반장이 반원 명부를 적을 때 일부러 한자로 써야 한다고 하니, 한글전용에 대한 반동이 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사실로 드러났다.”

 

1016수많은 남하애국자들의 호령이 추상같아서 정부를 따라 남하한 우리들만 애국자이고 함몰지구에 남은 너희들은 모두가 불순분자라고 하니, 고금천하에 이런 억울한 일이 또 있을 것인가?”

 

1110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조교수 강대량(姜大良)이 찾아왔다. 도피생활을 하던 그가 한 말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그는 내가 서울에 와서 가장 상심한 것은 나의 정체가 탄로난 것보다, 인민군이 패주했다는 사실보다, 인민공화국의 정치가 철두철미 인심을 잃었다는 것이라고 토로했다. 쫓겨난 며느리를 편드는 시어머니는 없다는 격으로 인심이란 으레 그런 것이거니 짐작은 가지만, 지금 서울시민의 적색에 대한 감정은 단순히 그러한 것 이상의 뿌리 깊은 무엇이 있는 것 같다.”

 

이날 강대량은 추위가 오면 전국은 또 얼마쯤 달라지지 않을까요?”라고 반문했는데, 김성칠은 무서운 사람들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로 겨울전쟁에서 판세가 뒤집혀 서울은 다시 함락되었다.

 

1126일에는 맥아더 원수가 일선 장병들에게 신의주 공략을 11월 안으로 서둘러야 한다고 독려하고 진두지휘에 나섰다는 뉴스를 접하고 김일성 사령관의 8.15 발언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술회하였다. 김 교수는 쌍방의 이런 다짐 속에 담겨진 전쟁의 장기화를 감지하고 더욱 커질 인적 피해와 황폐화를 우려하였다.

 

1130일에는 거의 두 달 전 소식인 중국인민지원군의 도강에 대해 적었다.

 

123일 전쟁 속에서도 익살은 죽지 않았다. “농촌에서는 ‘3만지라야 살 수 있는 세상이라고 했다. 이는 3만개의 지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밖에서 보아 있는지 만지 한 마을에, 집인지 만지 한 집을 지니고, 사람인지 만지 할 정도로 처신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뜻이다.”

 

124“<서울신문>은 하루 빨리 원자탄을 써야만 한다고 강경히 주장했다. 원자탄을 우리 땅에 제발 써주십사하는 태도는 그래도 명색이 일국의 대신문으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1215미 트루먼 대통령이 유엔군은 여하한 사태에 당면해도 절대로 한국에서 철퇴하지 않는다고 성명을 하여 모두들 얼마쯤 안도의 빛을 보인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일으켜서 마침내 외세를 끌어들이고, 그 결과는 외국군대가 언제까지나 있어주어야만 마음이 놓이지 그렇지 않으면 불안해 견딜 수 없다는 이 나라의 몰골에 술이라도 억백으로 퍼마시고 얼음구멍에 목을 처박아 죽어버리고 싶은 심경이다.”

 

전쟁 이후 서울을 떠나지 않았던 김 교수는 중국인민지원군의 서울 진공을 앞두고 고향으로 피난하였다. 그리고 괴한의 총격을 받고 숨졌다.

 

 

디아스포라 : 정찬우의 경우

 

 

정찬우는 남에서 태어나 만주와 북에서 자란 디아스포라, 항일과 사회주의를 확신하지만 전체주의와 전쟁을 미화하지 않았던 인간으로, 극좌와 극우가 극성하던 시절에 저항했던 경계인으로, 전쟁포로(군인)가 아니라 빨치산(민간인)이라는 기이한 신분으로 경험했던 혹독한 경험을 수기로 남겼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김일성 수상의 명령으로 김책 전선사령관으로부터 경남 교육위원 임명장을 받았던 정찬우(1929~1970)의 수기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안재성 작가는 김일성대 역사학과를 졸업하고 평양여고 교사로 임용된 22세 젊은이가 195074일 경상남도 교육위원 및 전선사령부의 문화선전대 책임자로 발탁된 이후 평양에서 서울을 거쳐 진주로 내려가는 과정과 체포 이후 포로생활을 소설의 형식으로 재구성하였다.

 

정찬우는 1951년에 체포돼 수용소에서 2년을 보내고 목포교도소 등에서 8년 동안 수형생활을 하다가 10년만에 출옥하였다. 이때 나이는 33세였다. 어릴 적에 떠났던 방장산 일대의 본가를 찾아갔지만, 엄청난 폭행과 고문의 후유증 등으로 8년 후인 41세에 생을 마쳤다.

 

그의 삶은 남과 북에서 모두 버림받았던 진보성향 중간파의 운명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안 작가는 후기에서 정찬우의 수기는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의 관념적인 작전명령과 실제 전선에서 전쟁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이들 간의 괴리가 얼마나 큰가를 잘 보여준다고 일갈했다.

 

또한 전쟁은 개개인의 이기적인 생존본능을 극대화시켜 평범하던 보통 사람들을 무서운 괴물로 만든다. 자유평화나 민족해방 같은 그 어떤 위대한 명분을 내세우든 상관없이, 오랜 교육과 훈련을 통해 쌓아온 사회적, 개인적 교양과 양심과 인간애를 근원에서 해체시켜버린다고 개탄했다.

 

좌익 중에서도 극좌파였던 박창섭, 이봉춘이나 우익 중에서도 극우파인 이 간수장이나 모두 선량하고 약한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기생충 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결코 정신병자들이 아니다. 이기적이고 교활하고 현실적인 인간일 뿐이다. 또 얼마나 가문과 가족에 충실한 인간들인가? 이남이나 이북이나 그런 자들이 권력을 잡고 있는 게 현실 아닌가? 좌익 중에서도 훌륭한 사람이 얼마나 많고 우익 중에서도 훌륭한 사람이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실권을 잡은 자들은 따로 있다. 이들은 기생충이 아니라 바로 몸뚱이가 되어버렸다.”(안재성,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274)

 

자기(정찬우)도 그랬지만, 이들 역시 사회주의의 기본정신에는 찬동했을지 몰라도 전쟁을 원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북 정권은 그러나 이들을 참혹한 전쟁터로 내몰았고, 이남 정부는 이들을 끝까지 단죄하려고 이토록 끈질기게 괴롭히고 있었다. ‘도대체 이남이나 이북이나 뭐가 서로 다르단 말인가? 제도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나 같아서, 돈과 권력을 차지한 악마 같은 인간들에게 지배당할뿐이다.”(286)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의 공세에 한미연합군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문화선전대는 713일 청주가 함락될 때까지 며칠간 수원에서 대기했다.

 

화약고가 터지고 건물기둥이 허물어져 화염을 뿜는 평택을 지나, 부서진 트럭과 불탄 지붕이 시야를 가로막는 천안을 지나, 사람과 말의 시체가 썩어 악취가 코를 찌르는 조치원을 지났다. “도로 옆에 여인이 쓰러져 가슴을 드러낸 채 내장이 흘러나오고 옆에서 갓난 아이가 울다 지친 얼굴로 엄마의 가슴을 매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