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오산과 미비의 전쟁

6.25 전쟁 : 오산과 미비의 한국전쟁(2)

twinkoreas studycamp 2021. 6. 6. 20:33

“필자는 이 연구를 진행하며 끝없는 죽임과 시체로 인해 밤이면 자주 가위눌려 헛소리와 땀으로 범벅된 채 잠 못 이루며 집필을 중단하곤 하였다가, 자신도 모르게 종교적이 되어가고, 끝내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 죽은 영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변화된 모습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박명림, 한국 1950 : 전쟁과 평화, 서문에서, 2002.9)

 

 

미 해군의 함포공격(이중근 편역, 6.25전쟁 1129일)

 

 

전쟁의 시작

 

전날 새벽에 조선인민군 949군부대(의무대)는 전선에 야전병원을 설치하였다. 최용건 민족보위상(국방부장관)은 군 일선에 ‘남측의 38선 침범’에 대한 반격명령을 하달하였다.

 

한국전쟁은 서해안에서 시작되었다. 내무성 38선 경비여단(최현 소장)이 가장 먼저 옹진반도에 진입했고, 766유격대(오진우 총좌)의 일부 대대가 산악지대와 동해를 통해서 강릉, 삼척, 울진 등에 침투했다.

 

1950년 6월 25일 인민군이 옹진군을 점령하고 군인민위원회를 설치하였다.(사진=한국 1950 : 전쟁과 평화, 81쪽) 전쟁 이전에 한국의 관할이었던 개성과 옹진반도는 조선으로 넘어갔는데, 전쟁구상에서 중요하게 고려하였던 ‘방어선 1/3 단축’이 정전협정에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한국전쟁은 현대 전쟁의 본질을 자신의 체제를 상대에게 강요하고 이식하는 것으로 이해했던 스탈린의 관점이 투영된 것이었다. 당시에 한국인들은 전쟁의 시기를 ‘인공’(인민공화국)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의 준비단계에서 조선의 지도부는 스탈린의 부정적인 반응을 무마하기 위해서 옹진반도와 개성 등을 장악하는 제한적 작전이나 한국군의 반응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남진하는 조건부 전쟁을 제시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파죽지세로 남진하는 것이었다. 빠르게 진격하는 만큼 배후의 잠재적 위험도 비례해서 점증하다가 선봉부대들이 낙동강전선에서 돈좌하면서 그 위험이 폭발하였다. 9월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은 허리가 잘리는 치명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평양 주재 대사였던 스티코프(Terenti F. Stykov)가 기습상륙 가능성을 예견하고 대비책을 모색했다는 견해도 있다. 그의 부관이 전한 기억에 따르면 스티코프가 본국에 미군의 인천상륙 가능성을 여러 차례 보고하며 이에 대비할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당 중앙에 전달하지 않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크게 불리해지자 도리어 스티코프가 직무태만으로 견책을 받았다고 한다(전현수 역, 쉬띄꼬프 일기).

 

조선의 전선사령부는 김책 사령관(대장), 강건 참모장(중장), 김일 군사위원(중장), 김철 정치위원(소장) 등으로 구성되었다.

 

의아하게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전쟁이 발발한지 일주일 이상 지난 시점인 7월 4일에 김일성 수상을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김일성 최고사령관 - 김책 전선사령관 - 강건 전선사령부 참모장 등으로 전쟁 사령탑이 확립되었다.

 

 

전쟁에 대한 오해 : 폴리스 액션

 

페렌바크(T.R.Fehrenbach)의 'This Kind of War'에 따르면, 6월 25일 일요일 아침에 38선에서 터지는 폭음에 잠을 깬 최초의 미군 장교는 국방경비대 1사단 12연대의 부고문관으로 복무중이던 다리고(Joseph Darrigo) 대위였다. 그는 전쟁발발을 직감하고 개성의 12연대 본부로 복귀하면서 개성역에서 연대병력의 인민군이 무더기로 하차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7월 1일 일본에서 미8군 제24사단(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 제21연대 1대대(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 소속 400여명이 C-55 수송기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이들은 각자 탄환 120발과 2일치 전투식량을 휴대했는데, 대부분이 20세 이하였고 실전 경험이 20%를 넘지 않았다.

 

이른바 ‘스미스 기동부대’는 부산에서 성조기와 태극기의 물결과 악대의 연주 속에서 출전해서 7월 6일에 수원과 오산을 잇는 도로를 1차 방어선으로 구축하였다. 이들은 개인화기 외에 4.2인치 박격포 2대와 60밀리 무반동포 4개, 75밀리 무반동포 2개, 로켓포 6개, 소형야포 6개를 보유했지만, 단 한 개의 대전차지뢰도 없이 T-34 전차(소연방제)를 맞이하였다.

 

페렌바크는 이런 미비(unpreparedness)를 “20세기의 표준적인 무기로 무장한 군인 앞에 앉아있는 오리와 같은 신세였다”고 비판했다. 러스(Martin F. Russ)는 장진호 동계전투를 재구성한 ‘BREAKOUT’에서 한국전쟁의 초기상황을 이렇게 집약하였다. “미군은 플로리다주와 비슷한 면적의 한국에서 두 달 이상 농민출신 인민군에게 쫓겨 다녔다.”

 

일본에서 급파된 부대들은 당면임무를 ‘police action’으로 알고 있었다. 트루먼(Harry S. Truman) 미 대통령은 군사개입의 성격을 UN의 이름으로 행하는 ‘police action’으로 규정했기 때문이다. 스미스 대대의 전초병들은 수원방면에서 내려오는 인민군과 조우하여 첫 발포를 주저하였다.

 

 

종교전쟁의 성격 : 십자군은 누구이고, 순교자는 누구인가?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의 예상대로 전쟁초기에 존 무초(John J. Muccio) 주한 미국대사는 전쟁 직후에 중국대륙의 내전에서 미 군사고문단이 철수했던 것처럼 군사고문단이 한국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맥아더(Douglas MacArthur) 미 극동사령관의 ‘한강 정찰보고’는 트루먼 행정부의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개입을 초래하였다. 물론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항의(대책 없는 미군 철수로 인한 전쟁 발생)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던 맥아더는 가난한 나라의 헐벗은 군중의 피난행렬에서 출애굽(Exodus from Egypt)을 연상하고 모세(Moses)와 같은 사명감으로 십자군전쟁(Crusades)을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평가는 남과 북에서 극단적으로 상반되지만, 그가 전쟁 중에 얼마나 많이 어떻게 기도했는지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미국과 UN의 빠른 개입을 이끈 인물은 리 UN 사무총장, 맥아더 사령관, 트루먼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의 발발과 확전에 드러난 상대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오산과 미비의 전쟁을 초래한 근본적 원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종교적 세계관을 고려하지 못하면 앞으로도 한국전쟁의 진정한 화해는 어려울 것이다. 

 

 

확전의 당사국 : 북진하는 미국과 남진하는 중국

 

한국전쟁이 3년전쟁으로 확전된 것은 당시의 세계질서를 오산하고 인간 및 사회에 대한 이해가 미비했던 전쟁기획자들과 확전주의자들의 합작품이다.

 

1950년 9월 27일 미 합참은 세 가지 명령을 하달하였다. 첫째, 인민군을 분쇄하라. 둘째, 가능한 한반도를 통일해라. 셋째, 소연방과 중국의 개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보고하라. 마셜(George C. Marshall) 국방장관은 38선 돌파에 대한 판단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일임하였다.

 

마오쩌둥은 “제국주의자들이 이웃의 영토를 침범하면 중국 인민이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고 경고하였고, 저우언라이는 파닉까르(Kavalam M. Panikkar) 인도대사에게 한국군이 38선을 넘으면 관망하겠지만 미군과 UN군이 38선을 넘으면 파병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전쟁이 세계전쟁으로 비화할 조짐을 보이자 소연방(Soviet Union)은 전쟁의 배후자에서 중재자로 변신하여 쌍방의 휴전을 제의하였다. 그로미코(Andrei A. Gromyko) 유엔 대표는 38선을 경계로 휴전하고 외국군을 철수시키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맥아더와 이승만은 북진을 선택하였고, 미군은 진격을 계속하면서 인민군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10월의 승리감은 잠깐이었고, 1953년 7월까지 계속될 ‘3년전쟁’으로 가는 재앙의 문이 열렸다.

 

미군의 진격은 중국의 개입을 초래하는 확전의 계기가 되었고, 중국군을 어리숙한 농부들로 간주했던 군사적, 문화적, 인종적 우월감은 커다란 낭패를 보게 되었다.

 

9월 이후 전세가 매우 불리하게 반전되자 스탈린은 미국을 극동의 이웃으로 삼는 방안이나 조선의 망명정부를 만주지역에 허용하는 방안을 거론하여 개입 여부를 놓고 고민에 빠진 중국 지도부의 심기를 더욱 자극하였다.

 

당시에 중국공산당 정치국회의는 오랜 내전으로 인한 후유증과 사회주의 건국의 초기 조건을 고려하여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는 신중론이 많았다. 미군 지휘부가 중국의 개입 가능성을 희박하게 본 이유와 맥락을 같이 한다.

 

미 극동사령부는 중국의 경고를 엄포로 간주하였고, 개입하려는 의도가 있더라도 파병의 시기를 놓쳤다고 판단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한반도 서북부에 대한 중국의 지정학적 이해를 간과하거나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미국은 전쟁의 원인이 된 분단 획정과 확전의 계기가 된 중국의 개입에 대해서 무신경을 드러낸 것이다.

 

마오는 생각이 달랐다. 시간문제일 뿐이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어렵다고 보았고,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전쟁이라면 한반도가 가장 좋은 전장(battle field)이라고 역설했다. 중국은 6월부터 60만명에 달하는 제4야전군을 조선과의 접경지대로 이동시켰고, 9월에는 9개 군단(38개 사단)을 압록강 전면에 배치하였다. 미군 정찰기들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 산간지대로 야간이동을 전개한 중국군의 동향을 포착하지 못했다.

 

10월 8일에 중국인민지원군의 선발대에 진격명령이 하달되었으나 곧이어 정지명령이 내려졌다가 10월 13일에 재개되었다. 최종적으로 10월 19일부터 주력부대의 도강이 본격화되었다.

 

중국의 생각의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다. 중국인민지원군은 세계 최강이라던 미군을 38선 이북에서 격퇴했지만, 민간인을 포함하여 쌍방의 엄청난 인적 피해를 초래한 ‘3년전쟁’으로 확전시킨 당사국이 되었다.

 

 

벽보에 써놓은 가짜 뉴스 : 미국의 철회, 중국의 불개입

 

10월 14일 김일성 인민군 총사령관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서 미군과 UN군의 38선 돌파를 새로운 사태로 규정하고 항전을 독려하였다.

 

10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의 요청으로 브래들리 합참의장과 러스크 국무차관을 대동하고 태평양의 웨이크섬(Wake Island)으로 날아가서 전쟁종결에 대비한 수습방안과 한반도의 전후복구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 사령관은 중·소의 본격적인 개입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견해를 밝히고, 추수감사절(11월 하순)까지 전쟁을 종결하여 성탄절에는 미군 병사들을 일본으로 귀대시킬 계획이라고 보고했다.

 

11월~12월 동계전투를 앞두고 중국인민지원군 18만명이 서북부의 미 8군을 에워싸는 포위기동을 시작하였고, 동북부에는 12만명이 미 10군단과 해병제1사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봉산 근처에서 차량사고로 숨기 전에 워커(Walton H. Walker) 미8군사령관은 중국의 개입을 상수로 놓았다면 미군의 대응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소회를 남겼다.

 

서울에 잔류했던 시민들은 인상적인 두 장의 선전벽보를 기억하였다. 하나는 전쟁발발 직후에 트루먼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손을 뗀다고 발표했다는 가짜 뉴스였고, 다른 하나는 인천상륙작전 직후에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가짜뉴스였다(김성칠, 역사 앞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