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오산과 미비의 전쟁

6.25 전쟁 : 오산과 미비의 한국전쟁(1)

twinkoreas studycamp 2021. 6. 2. 00:39

 

 

 

2021년 6월은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71주년이다. 조선(DPRK)의 전후세대는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의 원리에 입각해서 선제침공과 관련된 객관적 사실을 인정하고 한국전쟁을 평가하는 지적 정직성이 필요하고, 한국(ROK)의 전후세대는 어떤 부분들이 아니라 ‘3년 전쟁’의 전체적 실상에 대한 성찰적 접근이 필요하다.

 

1994년 옐친(Boris Yelchin) 러시아연방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한 외교전문들과 중국에서 공개된 문서 등에 따르면 한국전쟁의 공격개시 결정은 조선에 의해 이뤄졌다. 한국전쟁 연구자들은 한국군이 선제공격을 준비했다면 그렇게 단시간에 불리해진 것을 설명할 수 없다는 합리적 의심에 동의한다.

 

소비에트체제 연구자 웨더바이(Kathryn Weathersby)는 소연방 자료에 기초해서 한국에 대한 침공이 소연방의 승인 아래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디스토피아'(이중근, 6.25전쟁 1129일)

 

 

오산의 전쟁(Miscaculated War), 미비의 전쟁(Unprepared War)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한국전쟁(Korean War)의 전후 과정이 재구성되면서 쌍방이 은폐하거나 부인했던 여러 가지 오산과 미비가 드러났다.

 

늘 그렇듯이 전쟁은 상대방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 일어나고, 상대방의 힘을 잘 모를 때 일어난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상대를 알게 되기 마련이다.

 

한국전쟁에서 두드러진 것은 전쟁을 시작한 쪽의 오산과 전쟁을 막지 못한 쪽의 미비로 인하여 전쟁이 연장되고 피해가 커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전쟁을 시작한 쪽의 미비와 전쟁을 막지 못한 쪽의 오산이 교차하면서 한국전쟁은 ‘3년 대전쟁’이 되었다. 후대에 와서는 한국전쟁이 사실상 ‘제3차 세계대전의 축소판’이었다는 시각도 있다.

 

당시에도 어떤 관찰자는 한국전쟁의 ‘대리전 성격’을 직감하였다. 한국전쟁의 소식을 도쿄에서 접한 아롱(Raymond Aron)은 프랑스로 장문의 기사들을 전송했는데, 전쟁의 배경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남과 북을 보호국과 위성국으로 규정했다.

 

그는 “포츠담조약은 한반도의 산업집중지역을 소연방군의 점령지역으로, 농업지역을 미군의 점령지역으로 강제적으로 분할하여 서로 다른 두 체제의 위성국과 보호국을 세웠다”고 주장했다(Le Figaro, 1950. 6. 27).

 

아롱은 인민군이 승리하면 소연방의 영향력이 한반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열도로 확대된다는 점을 들어 한국전쟁을 ‘미국에 대한 소연방의 도발’로 규정하였다.

 

'항미원조 보가위국'(이중근, 6.25전쟁 1129일)

 

 

전쟁 기획자들의 오산과 미비

 

조선(DPRK), 중국, 소연방(Soviet Union)은 시기와 상황에 따라 한반도 전쟁에 대한 시각이 조금씩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미국과 UN의 참전 가능성을 경시하는 치명적인 오산을 저질렀다.

 

북방 삼각동맹은 노르웨이 출신 트리그브 리(Trygve H. Lie) UN 사무총장이 그렇게 열성적으로 최초의 UN군을 결성하는데 앞장서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트리그브 리 UN 사무총장(위키피디아)

 

조선의 전쟁지휘부는 민족적 동기, 이념적 동기, 그리고 일반적으로 전쟁으로 안내하는 여러 동기들이 혼재된 ‘혁명전쟁의 열망’과 ‘남조선 인민의 적극적인 호응’에 대한 확신으로 인하여 국제정세에 대한 냉정성을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하더라도, 노회한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안이하게 판단한 것은 미스테리에 가까운 오산이었다.

 

스탈린은 전력이 있었다. 그는 2차세계대전 직전에 히틀러와 불가침협정을 맺고 나서 나치의 침공 가능성을 알리는 정보들을 배제하였고, 심지어 그런 정보를 보고하는 것을 반국가적 행위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오산은 반대편에서도 나타났다. 미국은 신생 사회주의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의 개입 가능성을 희박하다고 단정하거나,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경고(미군의 38선 이북 진격시 군사개입)를 무시하였다.

 

조선 인민군 지도부는 전쟁 개시 이후 몇 주일 안에 대세를 장악할 것으로 오산하였고, 당시 김일성 수상은 8.15 광복절까지 전쟁을 끝내자고 독려하였다.

 

소연방의 추계에 따르면 전쟁 직전에 남·북의 군사력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인민군과 한국국방경비대는 병력과 포대(2:1), 기관총(7:1), 기관단총(13:1), 탱크(6:1), 항공기(6:1)에서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David Holloway, Stalin and the Bomb : The Soviet Union and Atomic Energy, 1939-1956).

 

소연방의 군사고문단은 인민군이 하루에 15~20km씩 진격하면 작전개시 22일~27일 안에 전쟁을 종결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흐루쇼프 회고록에 따르면,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은 베이징에서 ‘빈 틈 없는 대담한 일격’으로 단기간에 승리하자고 결의하였다. 세 지도자는 한국군의 허약한 대오가 일거에 무너지면 미국은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의 군대(국부군)가 패색이 짙어질 때 손을 떼었듯이 한반도에서도 발을 뺄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미군의 노상미사(이중근, 6.25전쟁 1129일)

 

 

확전주의자들의 미비와 오산

 

반면에 미군 극동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반격의 기세로 38선을 돌파하여 통일을 할 수 있을 것으로 오산하였고, 당시 맥아더 사령관은 추수감사절(11월 하순)까지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군사적 측면에서만 보면 양측의 오산은 서로 시기를 달리하지만 주로 공세에서 드러났고, 쌍방의 미비는 주로 방어에서 드러났다.

 

북의 전쟁계획은 남쪽에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동조가 발생하여 ‘해방전쟁’이 곧 체제혁명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전제한 것이었지만, 한국 시민들은 놀라서 침묵하거나 두려움을 안고 피난을 가는 경우가 많았다.

 

선제공격의 초반에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진하면서 군사전술적으로 성공적이었는지 몰라도, 전쟁의 목표라고 하는 ‘해방전쟁’과 ‘통일전쟁’에 대한 긍정적 상을 구축하는데서 정치적으로 실패하였다.

 

반면에 국군(국방경비대)와 미군 선발대는 전쟁 초반의 헌신적 분투에도 불구하고 현저한 군사적 미비를 드러내면서 전쟁 억지력의 부재를 고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을 제외한 것은 이른바 ‘유인설’과 ‘함정설’의 온상이 되었다. 더 근본적으로 보면 미국의 대 한반도정책의 미비가 전쟁의 비극을 초래한 주요한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전후 초강대국의 반열에 들어섰던 미국은 38선 획정과 미소 공동위의 결렬, 그리고 쌍방의 단독정부 수립과 애치슨 라인의 획정에서 무신경(insensibility)과 허술함을 드러냈다. 특히 한국전쟁 초기에 군사적 미비로 인하여 전쟁억지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국지적 봉합을 위한 저지선을 구축하지 못하고 패주하여 전면적 국제전을 불러 왔다.

 

해외에서도 미국의 대한반도 전략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냈다. 프랑스의 한 언론은 “한국이 홀로 남겨져도 조선에 맞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불행의 시작”이라고 규정하였다(Le Monde, 1950.6.27).

 

또한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38선 돌파를 감행한 것은 남쪽에서 침공세력에 대한 정당한 응징이자 통일 열망의 대변으로 칭송되었지만, 38선 획정을 주도하고 이를 비결정상태로 놔두고 철수한 미국이 스스로 경계선의 국제적 의미를 부정하고 진공해도 중국이 개입하지 못할 것이라고 예단한 것은 명백한 오산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오산에 더해서 중국 인민지원군에 대한 무지와 동계전투(winter war)에 대한 미비로 인하여 군우리전투․장진호전투에서 참패하고 총퇴각하여 서울 이남으로 물러나는 1.4후퇴를 초래하였다.

 

미비의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을 단기전으로 기획하고 결행했던 쪽에서 더 많은 문제를 야기했다. 흐루쇼프 소연방 서기장은 회고록에서 전쟁 초기에 북쪽의 탱크가 충분했다면 단기전으로 끝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미 극동사령부가 전쟁 초기에 가세하지 않은 중국군이 뒤늦게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 것도 한반도 지정학에 대한 미국의 무신경임과 동시에 전쟁 기획자들의 미비가 투영된 것이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조선과 중국의 해․공군의 미비에 비추어 성공할 수 없는 전쟁이 발발했다는 것을 입증하였고, 반면에 중국 인민지원군의 기세를 제압할 수 없는 초강대국은 휴전을 통해서 38선을 복구하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기나긴 70년을 경과하면서 한반도 국가는 ‘두 개의 코리아(Two Koreas)’로 귀결되었다.

 

6.25전쟁 1129일(이중근 편역)

 

 

 

워싱턴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Korean War Veterans Memorial)에는 한국전쟁에서 숨진 미군 3만 6천여명과 카투사(한국인) 7천여명을 포함한 4만 3800명의 이름을 새긴 벽이 2022년까지 건립될 예정이다.

 

한국전쟁의 전사한 미군의 정확한 숫자에 대해서 오랜 세월 동안 논란이 되었다. 1993년 미 국방부는 전쟁 시기에 한반도 이외의 지역에서 다른 이유로 사망한 1만 7천여명을 제외한 3만 6516명으로 확정하고, 한국전쟁 50주년을 맞이한 2000년에 미군 전사자수를 발표하였다.

 

미군의 형상은 혹한의 동계전투를 연상케 한다.(Korean War Veterans Memorial)

 

 

 

전쟁발발 71년의 평행선

 

“죽은 자들은 말이 없지만 기억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에 20세 청년으로 전쟁터에 섰던 젊은이들은 이제 91세가 되었다. 그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전후세대는 후대에게 기억을 어떻게 전수해야 할 것인가?

 

70년이 넘도록 한국전쟁의 결과에 대해서 정반대의 시각이 평행하고 있다. 한국과 미국에서는 자유민주체제를 지킨 위대한 방어라고 평가한다. 아롱은 서구진영이 바라는 방식으로 한반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평가하였고, 월츠(Kenneth Waltz)는 제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미국이 치른 성공적 전쟁으로 손꼽았다.

 

현대전쟁을 승전국의 이념과 체제를 패전국에게 이식하는 것으로 이해한 스탈린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한국전쟁의 기획자들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였다. 미국은 일본의 항복을 받고 새로운 헌정질서를 이식했지만, 중․소는 한반도 남쪽을 공략하여 그런 결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조국수호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주장하고, 중국은 세계최강 미군을 격퇴하는 금자탑을 쌓았다고 주장해 왔다.

 

양쪽의 평행은 100년이 되어도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처럼 강고하게 지속되고, 한국전쟁 자체가 발발 71년이 되도록 정전 상태로 남아있다. 이에 따라 한반도국가의 존재양식도 영속적인 비결정 상태를 지속하고 있다.

 

한국전쟁의 책임을 묻는 것은 중국과 조선의 기존 입장이 바뀌지 않는 한 난망한 일이고, 남과 북이 한국전쟁에 대해서 화해하는 일도 난해한 일로 남아 있다.

 

미국과 중국은 한국전쟁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이 국교정상화에 합의했고, 한국 정부는 중·소와 국교정상화 협상에서 한국전쟁을 거론하지 않았다. 또한 남과 북의 정상들은 2000년 이후 네 차례의 정상회담에서 한국전쟁에 관한 어떤 화제도 꺼내지 않았다.

 

아마도 한반도 국가의 존재양식이 어떤 새로운 결정상태에 이르고 나서야 한국전쟁에 대한 남과 북, 그리고 중국과 미국의 최종적인 반성과 화해가 가능할지 모른다.

 

브란트 독일 수상이 바르샤바 위령비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독일과 동유럽의 새로운 접근이 이뤄졌던 것처럼 쌍방의 위령비를 참배하고 서로 용서와 화해를 구하는 단계에 도달하는 모습은 아직은 정치적 상상력을 넘어 문학적 상상력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남과 북이 화해의 노력을 마냥 미루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노무현정부 시기인 2005년 8월 중순에 서울을 방문한 조선(DPRK) 대표단이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국립묘지 현충탑을 참배한 적이 있다.

 

현충원 참배에 대해서 림동옥 조선로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은 “참배결정은 어려운 것이었고 언젠가는 넘어야 할 관문이다. 6.15 시대에는 모든 것을 초월해야 한다는 생각이다”고 밝혔고, 이봉조 통일부차관은 “남북간 불행했던 과거를 정리하고 진정한 화해를 실현해 나가는 긴 여정의 첫 걸음이다”고 평가했다(대한민국 정책브리핑, 2005.8.14).

 

(대한민국 정책브리핑, korea.kr)

 

2005년 8월 14일 김기남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조선로동당 대남담당 비서), 림동옥 로동당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최성익 조선적십자회 부위원장,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 김정호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장, 성자립 김일성종합대 총장 등 30명이 한국전쟁 전사자 위패와 무명용사 유골이 봉안된 현충탑을 참배했다. 이들은 광복 60주년 기념 ‘자주평화통일을 위한 8.15 민족대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