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전쟁의 양상

한국전쟁 70년 : 미비와 오판의 전쟁

twinkoreas studycamp 2021. 3. 16. 00:16

 

 

2020년에 70주년이 되었던 한국전쟁을 끊임없이 사유해야 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한국전쟁은 동족상잔이라는 점에서 ‘카인과 아벨’의 서사를 불러들이는 민족적, 국가적 비극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데미안’에는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카인이 절대악이 아닐 수도 있다고 말하는 대목이 나온다. 1차세계대전을 반대했던 헤세는 전쟁의 당사국들이 서로 상대를 카인으로 간주하는 것을 은유했는지도 모른다.

 

새롭게 공개되거나 밝혀진 사실들을 통하여 한국전쟁의 전말을 사실에 기초하여 기억하고, 한국전쟁에 대한 양측의 입장과 태도에서 어디까지 화해할 수 있고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1950년 이후에 태어난 전후세대, 아니 1940년대 이후에 태어난 세대(한국전쟁 당시 10세 이하)까지 전쟁의 책임론에서 자유롭지만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과 태도는 전쟁을 치른 세대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전후세대는 한국전쟁이 21세기 이후 태어난 미래세대를 옭아맬 ‘잘못된 기억의 결박’을 풀어야 할 책임이 있다. 북의 전후세대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원리에 입각해서 선제침공과 관련된 객관적 사실들에 기초해서 전쟁을 평가하는 지적 정직성(intellectual truthfulnes)을 회복해야 한다.

 

남의 전후세대는 전쟁의 망각을 평화로 가는 열차의 승차권처럼 간주하는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 짖는 개가 물지 않는다는 비유는 사회주의국가의 세계관과 전쟁관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위험한 조롱이다.

 

중국․조선(북한)․베트남의 공산당 혹은 노동당이 소연방 및 동유럽 사회주의국가들과 같이 비밀주의와 음모적 양상으로 일관한 것은 아니다. 세 정당은 미국과의 전쟁을 민족문제에 대한 관점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나름대로 민족 내부의 명분을 중시하고 전쟁의 개시과정에서 최소한의 절차를 거치려고 하였다.

 

조선은 한국전쟁의 전야에 여러 단계를 거쳐서 전쟁의 명분을 축적하면서 신호(signal)를 보냈고, 중국은 미군의 38선 돌파에 대해서 명백히 무력개입을 경고하였다. 한국과 미국은 이런 동향을 엄포로 간주하거나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전쟁을 예방하지 못했다.

 

역사수정주의(historical revisionism)는 미국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주장과 이를 뒷받침하는 정황들을 체계화해서 한국전쟁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하였지만, 중․러와 미국의 비밀문서 해제를 통하여 한국전쟁이 사회주의권의 팽창의지가 조선의 대남전략과 결합되어 준비되고 실행한 북의 선제공격이었다는 점이 실증적으로 드러났다.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의 관점, 프랑스 지성들의 시각

 

시어도어 페렌바크(Theodore R. Fehrenbach)는 한국전쟁을 대하는 미국 내부의 입장에서 두 가지 전쟁관이 상충했다고 보았다(This Kind of War). 윌슨-루즈벨트-마샬-맥아더로 이어지는 전통적 관점은 한반도에서 중국군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지만, 애치슨·러스크·브래들리의 새로운 전쟁관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새로운 위상을 고려하여 사회주의중국에 현실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맥아더 총사령관은 ‘정의로운 승전’을 중시하는 반면에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서유럽과 일본의 안전보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한국전쟁은 하위개념으로 바라보았다. 한국전쟁이 중국 본토로 확전되지 않은 것은 후자의 관점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의 장 폴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레이몽 아롱 등은 한국전쟁에 대해서 상이한 견해를 드러냈다(장 프랑수아 시리넬리, 프랑스 지식인들과 한국전쟁). 프랑스공산당 기관지였던 ‘뤼마니테’(L’Humanite)는 “한국에서 미국의 꼭두각시이 중대한 전쟁을 도발했지만, 인민공화국의 군대가 한국군의 침략에 의기양양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보도하였고(1950.6.26), 사르트르를 비롯한 좌파 지식인들은 이러한 시각에 동조하였다.

 

나중에 사르트르는 조선이 미국의 계략에 빠져 한국을 공격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관점은 브루스 커밍스 등의 수정주의적 역사기술로 구체화되면서 한국의 전후세대 지식인들과 1980년대 학생운동 세대의 인식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조선을 이해하려면 조선의 시각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내재적 접근법(inherent approach)의 이론적 기초가 되었다. 인민군의 침공이라는 사실보다 해방·통일전쟁이라는 조선의 주장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 조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합리적인 예측과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좌파성향인 옵세르바티르(L’Observateur)는 조선이 한국의 혁명가들이 승리할 때까지 기다리지 못했다고 지적하면서도 소연방은 전쟁개시와 무관하다고 강조하였다.

 

중도적 성향의 르 몽드(Le Monde)는 조선의 군대가 일요일 새벽에 38선을 넘어 공격을 시작했다고 규정하고, 한국이 홀로 남겨져도 조선에 맞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을 불행의 시작이라고 보았다(1950.6.27). ‘진보적 폭력’이란 맥락에서 스탈린체제의 대숙청을 용인하였던 메를로 퐁티는 극동(Far Eastern)의 가난한 나라에서 전쟁이 발생한 것을 부당한 사태로 받아들였다.

 

일본에서 전쟁발발을 지켜본 아롱은 르 피가로(Le Figaro, 1950. 6. 27)에 게재한 글에서 조선의 군대가 한국을 침공한 것을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에 일어난 가장 심각한 일대사변으로 규정하였다. 또한 “포츠담조약은 한반도의 산업집중지역을 소연방 점령지역으로, 한국의 농업지역을 미군 점령지역으로 강제적으로 분할하여 서로 다른 두 체제의 위성국과 보호국을 세웠다. 한반도는 언젠가 불가피하게 철과 피로 통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1983년에 아롱은 회고록에서 조선의 침공이 이승만 반동정권을 타파하고 단일국가의 일부(한국)를 장악하려는 것이라는 관점에 대해서 인민민주주의 군대는 정복자 소연방이 세운 계획의 도구인 내전의 군대라고 반박하였다.

 

그는 조선 정부를 전체주의적으로 평가하고, 한국 정부를 대지주와 친일 협력자로 이뤄진 반동적 체제로 평가하면서도 자유선거의 기준에서 조선에 대한 소련의 보호와 한국에 대한 미국의 보호를 동일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동독이 서독의 아데나워정부를 반동으로 규정하면서도 무력을 동원하지 않은 점도 환기시켰다.

 

아롱은 인민군이 승리하면 소연방의 영향력이 한반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본 열도로 확대된다는 점에서 한국전쟁을 미국에 대한 소연방의 도발로 규정하였다. 레이몽 아롱은 서구진영이 바라는 방식으로 한반도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평가하였고, 케네스 월츠는 제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미국이 치른 성공적 전쟁으로 평가하였다.

 

이러한 시각들은 남과 북이 분리된 상태에서 한국이 사회주의세력의 팽창을 저지하는 방벽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대변한다. 1954년 아롱은 20세기 전면전에서 군인과 민간인이 구별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전쟁의 도덕성과 정당성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강조하였다(Raymond Aron, The Century of Total War).

 

 

오판의 전쟁 : 상대의 진의에 대한 무신경

 

역사적 전쟁은 상대방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를 때 일어나고, 상대방의 힘을 잘 모를 때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상대의 실제적인 능력을 알게 되고 상대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된다.

 

1950년 1월 19일 테렌티 시티코프(Terenty F. Chtikov) 조선주재 소연방대사는 안드레 비신스키(Andrej Y. Vysinskij) 외무인민위원에게 보낸 전보에서 1949년 3월에 스탈린이 한국이 선제공격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조선이 38선을 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고 언급했고, 1949년 9월 미군 철수 후에도 스탈린은 전쟁을 시기상조로 보았다. 마오쩌둥도 국공내전이 끝나야 조선을 원조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스탈린의 신중한 입장은 중국에서 인민해방군이 승리하고 한국에서 미군이 철수하면서 달라졌다. 트루먼 대통령은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급파하면서 지상군 파견을 천명하였고, 미 국무장관은 한반도사태에 대한 UN 안보리 결의안을 논의하기 위해 말리크(Yakov A. Malik) UN주재 소연방대사를 기다렸다.

 

그로미코는 결의안이 통과되면 미국이 파병할 것으로 우려했지만, 스탈린은 이를 묵과하였다. 전쟁이 시작되자 미 공군이 소연방과 2.5km의 거리에 있는 나진(Rashin)의 유류공급소를 폭격했을 때도 소연방은 미온적으로 항의하였다.

 

미국은 이러한 동향들은 소연방의 소극적 신호로 읽게 되었다. 한국전쟁 이후 소연방의 자체 추계에 따르면, 전쟁 직전에 남·북의 군사력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조선인민군은 병력과 포대(2:1), 기관총(7:1), 기관단총(13:1), 탱크(6:1), 항공기(6:1)에서 국방경비대보다 훨씬 우세하였고, 해군은 양쪽이 빈약하였다(David Holloway, Stalin and the Bomb : The Soviet Union and Atomic Energy, 1939-1956).

 

소연방의 군사고문단은 인민군의 작전수립을 자문하였고, 원래 계획은 하루에 15~20km씩 진격해서 작전개시 22일~27일 안에 전쟁을 종결할 것으로 예상하였다.

 

 

조선의 전선사령부는 김책(대장) 1군단 사령관과 강건(중장) 참모장, 김일(중장) 군사위원, 소장급으로 김영수 후방국장, 석산 안전국장, 김학인 검찰국장, 김철 정치위원 등으로 구성되었다. 인민군 1사단(최광 소장)이 개성방면, 2사단(이청송 소장)이 화천방면, 3사단(이영호 소장)이 철원방면, 4사단(이권무 소장)이 연천방면, 5사단(김창덕 소장)이 양구·인제방면, 6사단(방호산 소장)이 금천방면으로 진공하였다.

 

7사단 (오백룡 소장)은 화천, 양구방면을 지원하였고, 105탱크여단(유경수 소장)과 경전차부대(김철우 총좌)가 철원방면 등으로 가세하였다. 내무성 38선 경비여단(최현 소장)은 가장 먼저 옹진반도에 진입하였고, 766유격대(오진우 총좌)의 일부 대대가 산악지대와 동해를 통해서 강릉, 삼척, 울진 등에 침투하였다. 인민군 제2군단의 무정(중장) 사령관과 김광협(소장) 참모장 등이 만약을 대비한 제2 보조사령부로 지정되었고, 예하 2사단·4사단·5사단·7사단은 1군단의 주공방향에 연계해서 배치되었다. 2사단과 7사단은 춘천을 점령하고 가평으로 진공해서 최선봉의 3사단과 4사단의 서울포위를 지원하였고, 5사단은 동해안에 침투한 특수부대를 지원해서 영주, 안동 방면과 홍천, 원주 방면으로 진공하려고 했다.

 

초기에 남쪽의 군대가 예상보다 빠르게 붕괴하면서 인민군은 6월 28일 저녁에 서울까지 진공했지만, 조선이 개전(the opening campaign)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에 부합하는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였다는 증거는 박약하다. 원래 작전계획에서는 ‘해방군’이 내려가면 남쪽에서 내응하여 체제변혁을 위한 자발적인 봉기가 있을 것으로 고려했지만, 서울의 밤은 포성만 울릴 뿐 상상했던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서울을 떠난 도강파와 서울에 남은 잔류파로 분열되었을 뿐이고, 서울인민위원회(위원장 이승엽)는 의용군 소집에 필요한 젊은이들과 적극적 지지자들을 제외한 시민과 노약자들을 가능한 지방으로 소개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캄보디아내전에서 크메르루주가 1975년 프놈펜을 함락시킨 직후에도 취해졌다.

 

러시아전문가 캐서린 웨더바이(Kathryn Weathersby)는 소연방 자료에 기초해서 한국에 대한 침공이 소연방의 승인 아래 시작되었다고 밝혔다(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1945-1950 : NEW EVIDENCE FROM RUSSIAN ARCHIVES).

 

1994년 옐친(Boris Yelchin) 러시아대통령이 김영삼 한국 대통령에게 건넨 전문과 중국에서 공개된 문서 등에 따르면 한국전쟁의 공격개시 결정이 조선에서 내려졌으며, 만약 한국이 선제공격했다면 단시간에 불리해진 점을 설명하기 어렵다(Pierre Rigoulotdhk, Ilios Yannakakis, 소비에트의 기밀문서와 한국전쟁).

 

전쟁의 준비단계에서 스탈린이 반대하자, 조선은 옹진반도와 개성 등을 장악하는 제한적 작전이나 한국군의 반응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남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고 한다. 실제로 정전협정에서 원래 한국의 관할에 있었던 개성과 옹진반도가 조선으로 넘어갔는데, 전쟁구상에서 고려하였던 ‘방어선 1/3 단축’을 어느 정도 실현한 셈이다.

 

“기습은 전투력의 균형을 결정적으로 달라지게 할 수 있다”(미육군 야전교범)는 말처럼 조선의 기습공격은 주효하였다. 1950년 6월25일 일요일 아침에 38선에서 터지는 폭음에 잠을 깬 최초의 미군 장교는 국방경비대 1사단 12연대의 부고문관으로 복무중이던 조셉 다리고(Joseph Darrigo) 대위였다. 그는 전쟁발발을 직감하고 개성의 12연대 본부로 복귀하면서 개성역에 정차한 열차에서 연대병력의 조선인민군들이 하차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미군의 미비한 출발

 

1950년 7월 1일 일본에서 미8군 제24사단(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 제21연대 1대대(대대장 찰스 스미스 중령) 소속 400여명이 C-55 수송기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다. 이들은 각자 탄환 120발과 2일치 전투식량을 휴대했는데, 대부분이 20세 이하였고 실전 경험자가 20%도 되지 않았다.

 

이른바 ‘스미스 기동부대’는 부산에서 성조기와 태극기의 물결과 악대의 연주 속에서 출전해서 7월 6일에 수원과 오산을 잇는 도로를 1차 방어선으로 구축하였다. 이들은 개인화기 외에 4.2인치 박격포 2대와 60밀리 무반동포 4개, 75밀리 무반동포 2개, 로켓포 6개, 소형야포 6개를 보유했지만, 단 한 개의 대전차지뢰도 없이 T-34 전차(소연방제)를 맞이하였다. 미군은 20세기의 표준적인 무기로 무장한 군인 앞에 앉아있는 오리와 같은 신세였다(T. R. Ferhenbach, This Kind of War).

 

미 해병대 장교출신 군사학자 러스(Martin F. Russ)는 ‘BREAKOUT : The Chosin Reservoir Campaign, Korea 1950’에서 한국전쟁의 개전초기를 “미군은 플로리다주와 비슷한 면적의 한국에서 두 달 이상 농민출신 인민군에게 쫓겨 다녔다”는 말로 집약하였다.

 

한국전쟁에 장교로 참전했던 페렌바크는 한국전쟁에서 미국이 상대를 오판하여 불비한(unprepared) 전쟁을 벌였다고 총평하였다. 그는 1950년 7월을 미군 병사들에게 곤혹스럽고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묘사하였다.

 

“갈증에 허덕이던 미군은 논바닥의 물을 마시고 이질에 걸렸다. 고지는 용광로처럼 이글거리고 그늘진 곳을 찾기 어려웠고, 멀리서 푸른색으로 보이던 농토에 접근하면 악취가 진동하는 가마솥이었고, 헐벗은 산들은 프라이팬이었다.”

 

일본에서 급파된 부대들은 당면임무를 선전포고에 의한 전쟁이 아니라 ‘police action’으로 알고 있었다. 반란진압(counter-insurgency)이나 UN의 결의에 따른 군사적 강제조치(military enforcement action) 정도로 여긴 것이다.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 미 대통령은 군사개입의 성격을 조선의 침공(North Korean invasion)을 규탄한 UN의 호위를 받는(under the aegis of UN) ‘police action’으로 규정하였다. 트루먼은 파병을 UN헌장(제7장 41조, 42조)에서 규정한 ‘침략행위에 대한 안보리의 강제조치’(enforcement action)의 일환으로 비군사적 방법이 불충분할 경우에 행사하는 위력시위(demonstrations) 및 봉쇄조치를 위한 육·해·공 군사작전으로 간주한 것이다.

 

이러한 모호한 지침은 상당수 병사들로 하여금 상대방이 자신들을 발견하면 주춤하거나 돌아설 것으로 오판하게 만들었다. 선발대로 도착한 스미스 대대(미8군 21연대 1대대)의 전초병들은 수원에서 내려오는 조선인민군과 조우한 순간에 발포를 주저하였다고 한다. 페렌바크는 미국이 서전(early stage of a war)에서 참패한 근본적 이유를 병사들이 전쟁의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신적 동기가 부재했다는 점에서 찾았다.

 

많은 병사들이 일본으로 복귀하여 안락한 일상으로 돌아갈 생각만 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미군이 어리숙한 농부들의 군대로 간주하였던 조선인민군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관록을 쌓은 전사들을 선봉에 배치하였고, 이들은 ‘해방전쟁·통일전쟁’이라는 선명한 목표로 무장하고 빠르게 기동하면서 한·미연합군이 전열을 재정비하기 전에, UN 다국적군이 당도하기 전에 경남지역까지 진격하였다.

 

하지만 조선의 전쟁지도부는 미군이 그렇게 신속하게 개입할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고, 춘천방면을 비롯한 동부전선에서 예상 외로 접전을 벌이면서 전반적인 진격속도가 늦추어졌다.

 

흐루쇼프 회고록에 따르면,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은 베이징에서 ‘빈 틈 없는 대담한 일격’으로 단기간에 승리하자고 결의하였다. 세 지도자는 한국군의 허약한 대오가 일거에 무너지면 미국은 중국 대륙에서 국민당의 군대(국부군)가 패색이 짙어질 때 손을 떼었듯이 한반도에서도 발을 뺄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중국인민지원군의 초기진입 과정에서 마오쩌둥은 전문으로 은폐와 진격에 대한 구체적 지령을 하달하였다.

 

흐루쇼프는 말리노프스키 극동군 총사령관과 클리로프 극동군관구사령관을 군사고문 지도부로 조선에 파견하자는 자신의 요청을 스탈린이 묵살한 것과 제2차세계대전에서 히틀러의 침공 가능성을 믿지 않으려고 했던 것처럼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개입 가능성을 믿지 않으려고 한 태도를 비판하였지만, 스탈린의 한국전쟁에 상세하게 관여한 것으로 드러났다.

 

나중에 공개된 러시아대통령문서보관소의 자료에 따르면, 스탈린도 구체적인 지령을 내렸던 것으로 드러났다. 1950년 9월 27일 스탈린은 ‘핀시’(Pinxy)라는 가명으로 테렌티 슈티코프 대사에게 보낸 훈령에서 군사고문들에게 사단에서 분리된 인민군 후위부대의 엄호를 통해 본대를 신속히 북쪽으로 이동시키고, 본대는 전투를 통해 이동로를 확보할 수 있도록 밀집이동하고, 선발부대가 본대가 이동할 요로를 장악하여 통제할 것을 지시하였다. 특히 군사고문단은 절대로 포로가 되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러시아의 퇴역 공군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소연방은 제64독립전투항공군단을 조직하여 1950년 11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중국 선양, 단둥 등의 군용비행장에 주둔하면서 동북3성의 주요시설을 보호하고 압록강 주변의 수풍댐, 철교, 평양~원산 이북을 엄호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러시아와 미국에서 발굴된 문서들에 따르면, 소연방 공군은 6만3천229회 출격 및 1천790회 공중전을 통해서 미군 전투기 및 전폭기 1천309대를 격추하고, 조종사 120여명이 전사하고 전투기 300여대를 잃은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전쟁사의 교정은 세월이 많이 흘러서 객관적 검증이 어렵고 소연방의 해체로 정치적 의미도 모호해졌지만, 소연방의 개입을 은폐하려고 부심했던 스탈린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한 셈이다.

 

2016년에 폐간한 ‘Yanhuang Chunqiu’(炎黃春秋, 2013 제12호)에 따르면, 1956년 9월 마오쩌둥은 미코얀(Anastas I. Mikoyan) 소연방 부수상과 조선대표단에게 소연방이 주도한 작전계획이 중국에게 공유되지 않은 점과 후방 상륙(인천상륙작전)을 경고했다는 점을 한국전쟁의 문제점으로 거론하였다.

 

 

맥아더의 결단과 오산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의 예상대로 전쟁초기에 무초(John J. Muccio) 주한 미국대사는 전쟁 직후에 중국대륙의 내전에서 미 군사고문단이 철수했던 것처럼 군사고문단이 한국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1년 무초 전 대사는 한국전쟁을 회고하면서 국방경비대(한국군)의 저항과 전방의 폭우가 한국을 구했다고 술회하였다. 페렌바크는 더글라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미 극동사령관의 ‘한강 정찰보고’가 트루먼 행정부의 즉각적이고 전면적인 개입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였다.

 

독실한 성공회 신자였던 맥아더는 가난한 나라의 헐벗은 군중의 피난행렬에서 출애굽(Exodus from Egypt)을 연상하고 모세(Moses)와 같은 사명감으로 십자군전쟁(Crusades)을 다짐했는지도 모른다.

 

그에 대한 평가는 남과 북에서 극단적으로 상반되지만, 그가 전쟁 중에 얼마나 많이 어떻게 기도했는지를 상상해 볼 필요가 있다. 70년이나 지난 한국전쟁의 과정을 복기하는 것은 그 이유는 바뀌어 왔지만 미국(인)이 전쟁을 하게 되는 동기를 풍부하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맥아더의 결단으로 촉발된 미국과 UN의 신속한 개입은 미 대통령과 초대 UN 사무총장, 그리고 미국의 주요 인사들과 소통이 원활하였던 한국 대통령의 외교적 노력의 합작품이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 지도부는 중·소에 긴급지원을 요청하였다. 9월 29일 김일성 수상과 박헌영 부수상은 스탈린에게 ‘Dear Iosif Vissarionovich’로 시작하는 서한을 보내서 지원을 요청하였지만, 스탈린은 말리노프스키(Malinovskii) 극동군 총사령관을 조선에 파견하는 방안을 승인하지 않았고, 강계에 임시수도를 설치했다는 소식에 미국을 극동의 이웃으로 삼자고 일축하였다(Sergei Khrushchev, Memoirs of Nikita Khrushchev, Vol 3 : Statesman).

 

스탈린은 공군지원을 요청하는 주언라이에게 만약 조선의 정부가 패망하면 만주의 동북지역에 망명정부(government in exile)를 세우는 방안에 대한 마오쩌둥의 견해를 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10월 1일 김일성 수상은 마오쩌둥 중국 주석에게 서한을 보냈는데, 마오는 중국공산당 정치국회의에서 펑더화이의 의견을 통해서 개입의 불가피성을 설파하였다. 사회주의건설에서 산업 및 군사의 취약한 수준과 체제의 공고화를 위한 시간적 여유가 필요하다는 신중론이 적지 않았지만, 마오는 미국과의 전쟁을 시간문제로 보면서 일전을 피할 수 없다면 한반도가 가장 좋은 전장이라고 강조하였다. 자국의 영토를 피폐화하지 않고 한반도의 지형에 익숙한 병력(조선인 출신 인민해방군)과 지리적 접근성에서 유리하고 미국에게 새로운 국가를 인식시키는 기회로 보았다.

 

일주일 동안 계속된 정치국회의에서 인민지원군이라는 명칭으로 파병하기로 결정하고, 10월 8일 인민지원군 선발대에게 진격명령이 하달되었으며 잠시 대기하다가 10월 19일부터 압록강(Yalu river)을 건너 한반도 서북부로 진입하였다.

 

1950년 9월 27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세 가지 명령을 하달하였다. 첫째, 인민군을 분쇄하라. 둘째, 가능한 이승만 대통령의 체제로 한반도를 통일해라. 셋째, 소연방과 중국의 개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보고하라. 9월 27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세 가지 명령을 하달하였다. 첫째, 인민군을 분쇄하라. 둘째, 최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체제로 한반도를 통일시켜라. 셋째, 소연방과 중국의 개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보고하라.

 

조지마셜(George C. Marshall) 국방장관은 미군의 38선 돌파에 대한 판단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일임하였고, 10월 1일 맥아더는 인민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자 중국 최고지도자 마오쩌둥은 “제국주의자들이 이웃의 영토를 침범하면 중국 인민이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하였다.

 

10월 2일 소연방의 안드레이 그로미코(Andrei A. Gromyko)는 “쌍방이 38선에서 휴전하고 외국군은 철수하자”고 제안하였다. 10월 3일 주언라이 중국 총리 겸 외교부장은 카바람 파닉카(Kavalam M. Panikkar) 주중 인도대사를 통해서 한국군이 38선을 넘으면 관망하지만 미군과 UN군이 38선을 넘으면 파병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 극동사령부는 중국의 경고를 엄포로 간주하였고, 개입하려는 의도가 있더라도 파병의 시기를 놓쳤다고 판단하였다. 인민군이 파죽지세로 남진하던 시기에 신속한 완승을 위해서 파병을 하지 않았던 중국이 인천상륙작전 이후에 뒤늦게 뛰어들 가능성을 희박하게 보았던 것이다.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 조선 인민군에게 전차부대가 좀더 많았다면 전쟁에서 승리했을 것이라고 술회하였다.

 

 

한반도에서 미·중전쟁 : 끝나지 않는 한국전쟁

 

10월 13일 중국인민지원군 선발대가 한반도 북부에 진입하였고, 다음 날에 김일성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은 라디오 연설에서 미군과 UN군의 38선 돌파를 새로운 사태로 규정하고 항전을 독려하였다. 중국은 6월부터 60만명에 달하는 제4야전군을 조선과의 접경지대로 이동시켰고, 9월에는 9개 군단(38개 사단)을 압록강 전면에 배치하였다. 미군 정찰기들은 야간이동을 하는 중국군을 포착하지 못했다. 11월~12월 동계전투를 앞두고 중국인민지원군 18만명이 서북부의 미 8군을 에워싸는 포위기동을 시작하였고, 동북부에는 12만명이 미 10군단과 해병제1사단을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15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사령관의 요청으로 브래들리 합참의장과 러스크 국무차관을 대동하고 태평양의 웨이크섬(Wake Island)으로 날아가서 전쟁종결에 대비한 수습방안과 한반도의 전후복구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맥아더 사령관은 중·소의 개입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보았고, 추수감사절까지 전쟁을 종결하여 성탄절에는 미군을 일본으로 귀대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조·중·소는 미국의 신속한 파병과 증원의 가능성을 희박하다고 판단하였고, 미군 비행기의 신속한 등장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전쟁이 본격화되면서 미 전투기는 1100여대가 동원되었고, 중국인민지원군이 가세하자 1700여대까지 증가하였다.

 

전쟁 초기에 인민군 선봉부대들은 한국군과 미군보다 전투의지와 전투경험에서 앞섰지만 낙동강전선에서 돈좌하면서 전투력과 용맹성을 가진 고참병들이 줄어들고 총퇴각 명령으로 전열이 와해되었다. 반면에 미국의 극동사령부는 인천상륙작전의 여세를 몰아 압록강까지 진격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중국의 전쟁개입 가능성을 간과하여 초기에 내전의 성격이 강했던 한국전쟁이 국제전으로 비화되었다.

 

도봉산 근처에서 사고로 숨진 워커(Walton H. Walker) 미8군사령관은 중국의 개입을 상수로 놓았다면 미군의 대응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소회를 밝힌 적이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한국군이 아닌 미군 및 UN군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진하면 파병하겠다는 의사를 공표하였고, 1950년 10월에 ‘보가위국 항미원조’의 기치를 내건 중국인민지원군이 은밀하게 진입하여 전면적 반격을 준비하였다.

 

11월~12월 동계전투에서 미군 병사들은 두툼한 솜옷을 입은 중국인민지원군이 일시에 집중적으로 쇄도하는 것에 경악하였다. 인민지원군은 병력수에서 절대적으로 많지는 않았지만 다리에 힘을 모았다가 달려오는 상대를 단번에 걷어차듯이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하여 상대를 타격하려고 했다. 국공내전에서 무기가 열세였던 중국공산당(CCP)이 다수의 군대를 넓게 분산한 국부군을 기습하였던 유격전술을 재연한 것이다. 한국전쟁에서도 전쟁사에서 나타나는 허위선전과 상대에 대한 오판을 답습하였다.

 

서울에 잔류했던 시민들은 두 장의 선전벽보를 기억하였다. 하나는 전쟁발발 직후에 트루먼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손을 뗀다고 발표했다는 벽보였고, 다른 하나는 인천상륙작전 직후에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벽보였다(김성칠, 역사 앞에서).

 

쌍방의 최고사령관은 각각 8월과 9월까지 전쟁종결을 장담하고 독려하였지만, 결과적으로 양측은 모두 미비한(unprepared) 전쟁과 오판의 전쟁을 고집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