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전쟁의 양상

1951년 4월 임진강전투, 가평전투 70주년

twinkoreas studycamp 2021. 4. 22. 18:33

2020년에서 2023년까지는 한국전쟁 3년에 벌어졌던 일들이 차례로 70주년을 맞이한다. 지난해는 한국전쟁 발발 70주년 행사, 올해는 1.4 후퇴 이후 전투와 관련된 70주년 행사들이 열리고 있다. 2023년에는 정전협정 70주년 행사가 기다리고 있다.

 

4월을 맞이하여 한국 정부는 영국과는 임진강전투, 호주․캐나다와는 가평전투의 70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1951년 : 오산과 미비로 인한 전쟁 연장

 

1951년이 70년 후에 던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쌍방이 1년에 끝낼 수도 있었을 전쟁을 3년 동안 연장한 악순환의 시작이었다.

 

1950년 9월 27일 미 합동참모본부는 세 가지 명령을 하달하였다. “첫째, 조선 인민군을 분쇄하라. 둘째, 최대한 이승만 대통령의 체제로 한반도를 통일시켜라. 셋째, 소연방(Soviet Union)과 중국 공산당의 개입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보고하라.”

 

인천상륙작전으로 위기에 처한 조선 지도부는 중·소에 긴급지원을 요청하였다. 9월 29일 김일성 수상과 박헌영 부수상은 스탈린에게 ‘Dear Iosif Vissarionovich’로 시작하는 서한을 보내서 지원을 요청하였다.

 

흐루쇼프 회고록에 따르면 스탈린은 말리노프스키(Malinovskii) 극동군 총사령관을 조선에 파견하는 방안을 승인하지 않았고, 강계에 임시수도를 설치했다는 소식에 미국을 극동의 이웃으로 삼자는 말까지 하였다(Sergei Khrushchev, Memoirs of Nikita Khrushchev, Vol 3 : Statesman).

 

스탈린은 공군지원을 요청하는 주언라이에게 만약 조선의 정부가 패망하면 만주의 동북지역에 망명정부(government in exile)를 세우는 방안을 타진하기도 했다.

 

반면에 마오쩌둥은 “제국주의자들이 이웃의 영토를 침범하면 중국 인민이 방관하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했고, 저우언라이 외상은 파니까르(Kavalam M. Panikkar) 중국주재 인도대사를 통해서 한국군이 38선을 넘으면 관망하지만 미군과 UN군이 북진하면 파병할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왼쪽부터 파니까르 대사, 네루와 남매지간인 판디트(Vijaya L. Pandit) 제8회 UN총회 의장,  저우언라이 외상(Wikiquote )

 

 

 

마셜(George C. Marshall) 국방장관은 미군의 38선 돌파에 대한 판단을 맥아더 사령관에게 일임하였고, 10월 1일 맥아더는 인민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같은 날에 김일성은 마오쩌둥에게 긴급서한을 보냈다.

 

이러한 확전 분위기 속에서 10월 2일 그로미코(Andrei A. Gromyko) UN주재 소연방 대표는 “쌍방이 38선에서 휴전하고 외국군은 철수하자”고 제안하였다.

 

10월 8일에 대기중이던 중국 인민지원군 선발대에게 진격명령이 하달되었고, 중도에 잠시 대기하다가 10월 13일에 한반도 북부에 진입하였다. 10월 14일에 김일성 인민군 총사령관은 라디오 연설에서 미군과 UN군의 38선 돌파를 새로운 사태로 규정하고 항전을 독려하였다. 10월 19일부터는 중국군의 지원부대가 본격적으로 이동하였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미군 및 UN군은 서울을 수복하는데 그치지 않고 38선을 넘어 북진하였고, 중국 인민지원군은 군우리전투와 장진호전투에서 승리하여 평양을 회복하는데 그치지 않고 38선을 넘어 서울을 점령하였다.


1951년 2월 UN총회는 쌍방의 교전행위 중지 및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4후퇴 이후 중국인민지원군의 파상공세는 지속되었고, 이를 저지하는 과정에서 2월 지평리전투와 4월 임진강전투․가평전투 등이 연쇄 발생하였다.

 

양측의 진퇴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잔류했던 시민들은 두 장의 선전벽보를 선명하게 기억하게 되었다. 하나의 벽보는 전쟁 초기에 조선 인민군을 지지하는 자들이 붙인 것으로 추정되는 ‘트루먼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손을 뗀다고 발표했다’는 가짜 벽보였고, 또 다른 벽보는 인천상륙작전 직후에 한국 정부를 지지하는 자들이 붙인 것으로 추정되는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가짜 벽보였다.

 

가짜 벽보에 담긴 내용은 쌍방의 희망사항이었고, 실제로는 산산조각이 났다. 김일성과 맥아더는 각각 8월과 9월을 전쟁 종결시점으로 장담했지만, 양측의 오산(miscalculated)과 미비(unprepared)로 전쟁의 참화는 3년 동안 지속되었다.

 

 

KBS

 

 

 

1951년 4월 임진강전투, 가평 전투

 

1951년 2월 중국인민지원군이 공세는 양평 지평면(지평리) 일대에서 미 2사단과 프랑스군 등에 의해서 차단되었고, 4월에는 파주 적성면 일대에서 영연방의 연합군에 의해서 그 기세가 돈좌되었다.

 

벨기에군을 포함한 영국군 제29보병여단 5천여명은 4월 22일부터 25일까지 파주 적성면 설마리 일대에서 3만여명의 중국 인민지원군의 공세를 저지하여 전선분할 기도를 막아내고 서울 방어전선 구축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임진강 전투, 설마리 전투, 적성 전투, 글로스터 고지 전투(Gloster Valley Battle)로 불리운다. 임진강 전투는 비슷한 시기에 벌어진 가평 전투에도 영향을 미쳤다.

 

4월 23일부터 25일까지 진행된 가평전투에서 영연방(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으로 구성된 영국군 제27여단은 5배가 넘는 중국군의 공세를 저지하여 방어선 구축에 필요한 시간을 벌었다. 특히 호주군과 캐나다군의 끈질긴 저항과 뉴질랜드 포병대의 화력은 중국군의 예봉을 무디게 하였다.

 

또한 미 유타주 시더(Cedar City)에서 징병한 600명의 몰몬교도로 구성된 213부대가 한 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고 진지를 사수하였다.

 

 

정전협상과 전쟁의 병행 : 1951년 7월~1953년 7월

 

한국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의 축소판이라고 하는 것은 중국군과 다양한 국가로 이뤄진 외국군이 지상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4월 전투에서 쌍방의 소모전 양상이 심화되는 가운데 5월 26일에 UN총회 의장 피어슨(Lester B. Pearson) 캐나다 외상은 전쟁종식을 위해서 침략자에게 항복을 요구하지 말고 침략을 저지하는 것에 만족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6월 1일에는 리(Trygve H. Lie) UN 사무총장이 중국과 조선에게 유혈을 중지하고 ‘제 자리’로 돌아갈 것을 촉구하였다.

 

애치슨 미 국무장관이 이에 동의하였고, 6월 23일 야코프 말리크(Yakov A. Malik) 유엔주재 소연방대사가 휴전을 위해 쌍방이 38선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1년만에 UN, 미국, 소연방이 휴전의 필요성에 동의한 것이다.

 

이에 따라 6월 30일 리지웨이 UN군 사령관은 중국과 조선의 사령관에게 해상에서 휴전회담을 갖자는 제안하였고, 7월 1일 김일성 조선인민군 총사령관과 펑더화이 중국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이 개성에서 만나자고 수정안을 제시하였다.

 

결국은 1951년 7월 8일부터 정전협상이 시작되었지만 전쟁은 2년이나 더 지속되었다. 이듬해 가을에는 철원 일대를 중심으로 폭찹힐 전투, 상감령 전투와 같은 소모적인 고지전이 연발하였다.

 

1952년에는 쌍방이 협상전략의 일환으로 고지전투를 강화하면서 인적 손실이 지속되었고, 철원~김화~평강의 ‘철의 삼각지’와 피의 능선(Ridge) 등에서 쌍방의 인적 피해가 컸다.

 

미 종군기자들과 미군 관계자들은 고지쟁탈전이 벌어진 곳에 이름을 짓기 시작했다. 쌍방의 진퇴가 전격적으로 이뤄지던 1950년 6월~1951년 6월의 시기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현상이다.

 

해리(Harry), 이리(Eerie), 후크(Hook), 폭찹(Pork Chop), 펀치볼(Punch Bowl), 베티(Betti), 벙커힐(Bunker Hill), 볼모(Old Baldy), 티본(T-Bone), 트라이앵글(Triangle), 화이트호스(Whitehorse), 에로우헤드(Arrowhead), 캐피탈(Capital), 크리스마스(Christmas), 잭슨 하잇츠(Jackson Heights), 앵커(Anchor), 박(Bak), 베를린이스트(Berlin East), 베를린(Berlin), 부메랑(Boomerang), 카슨(Carson), 딕(Dick), 엘코(Elko), 한나(Hannah), 하이디(Hedy), 호스슈(Horseshoe), 제인러셀(Jane Russel), 켈리(Kelly), 노리 빅(Nori Big), 노리 스몰(Nori Little), 파파산(Papa-San), 파이크 피크(Pike peak), 퀸(Queen), 리노(Reno), 샌디(Sandy), 스타(Star), 톰(Tom), 테시(Tessie), 론손(Ronson), 나부리(Naburi), 스카치(Scotch), 요크·엉클(York·Uncle) ...

 

전쟁의 마지막 해에 참전한 미군 신병들은 1953년 2월~3월의 주요한 전투양상을 포격전으로 기억하였다. 전쟁 후반기에 미군을 포함한 UN군은 하루 평균 2만4천발에 달하는 폭탄을 퍼부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하루 동안 발사한 화력보다 훨씬 많았다.

 

 

중국 개입에 대한 미국의 두 가지 전쟁관

 

페렌바크(T. R. Fehrenbach)는 한국전쟁 당시에 미국 정부 내부에서 두 가지 전쟁관이 상충했다고 보았다(This Kind of War). 마찬가지로 소연방(Soviet Union)과 신생 사회주의 중국의 내부에서도 상이한 관점이 혼재하였다.

 

그에 따르면 윌슨-루즈벨트-마샬-맥아더로 이어지는 전통적 관점은 한반도에서 중국군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지만, 애치슨·러스크·브래들리의 관점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제1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의 새로운 위상을 고려하여 사회주의 중국에 현실적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맥아더 총사령관은 ‘정의로운 승전’을 중시하는 반면에 브래들리 합참의장은 서유럽과 일본의 안전보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한국전쟁을 그 하위개념으로 바라보았다. 한국전쟁이 중국 본토로 확전되지 않은 것은 후자의 관점이 반영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