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봄 2

서울의 봄 : 해태제과의 전설

영화 ‘서울의 봄’이 누적 관객수 1,300만명을 넘어 장기흥행에 성공하면서 1979년~1980년의 사회상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다. 실제로 유신체제의 붕괴로 인한 정치적 해빙은 12.12 군사반란에도 불구하고 척박한 노동현장에 변화를 가져왔다. “3월 2일부터 8시간 노동제를 시행한다.” 1980년 2월 마지막 날에 해태제과 현장관리자들이 각 파트의 작업자들에게 공지한 내용이다. 이로써 해태제과 노동자들은 1976년부터 요구했던 8시간 노동제를 마침내 실현했다. 그 여파로 롯데, 오리온 등 동종업계의 주요 기업들도 8시간 노동제로 돌아섰다. 장시간 노동의 대표적 업종이었던 제과업계에도 ‘서울의 봄’이 온 것이다. 해태제과 여성노동자들은 ‘봄의 전령사’였던 셈인데, 하지만 그들이 봄을 알리는 과정은 험난하..

서울의 봄과 정병주 김오랑 정선엽, 국난극복기장

영화 ‘서울의 봄’은 대한민국 육사 및 정치군부의 흑역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2.12 군사반란은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궁정동 안가에서 피살된 지 불과 두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발생했다. 이 영화는 전두환이 이끄는 ‘하나회’ 일당이 전방부대의 병력까지 서울로 불러들여 군 지휘부를 농락하고 정치권력을 찬탈한 사건을 일부 픽션을 가미하여 시간대별로 촘촘하게 재구성한 것이다. 당시 군사반란을 진압하려던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소령(정해인 분)은 공수여단 반란군들에게 복부 등에 총탄 6발을 맞고 사실상 두 동강이 났고, 반란세력은 그의 시신을 특전사 뒷산에 방치했다. (이런 행태를 옛 사람들은 '개만도 못한 짓'이라고 했다.) 수개월이 지난 후에 육사 25기 동기들이 나서 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