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최고 매출액을 경신한 영화 ‘왕사남(왕과 사는 남자)’이 관객 2000만명돌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역대 1위 명량도 1761만여명에서 기록을 멈추었지만, 왕사남이 사상최초 2000만명 이정표를 세울지 관심을 모은다.
모 언론사가 AI를 통해 예측한 왕사남의 최종관객수는 1717만여명으로 명량을 넘지 못할 것으로 나타났지만, 현재의 기세가 4월에도 이어지면 이러한 예측을 뛰어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역사극 왕사남이 대기록의 반열에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영화 ‘명량’도 그러했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역사적 대사건을 바탕으로 웃음과 눈물을 자아내는 한(恨)과 인간미를 드러내는 K-컬처의 풍자와 비극으로 관객의 공감을 불러오기 때문일 것이다.
K-소프트파워의 한 축인 K-컬처에서 영화 및 사극의 잠재적 비중은 지대하다. 또한 왕사남, 자산어보(정약전)처럼 조선시대 유배(귀양)의 역사 속에 담긴 독특한 소재들은 무궁무진하다. 영월의 청령포처럼 추사 김정희의 제주, 영창대군과 광해군과 연산군이 모두 유배 및 유폐되었던 강화도 등은 역사의 비극을 자연 속에서 재해석할 수 있게 해준다.
승자의 기록을 뒤집는 역사적 반전
한반도 역사상 희대의 명군으로 칭송을 받는 세종대왕의 장손인 단종(이홍위, 노산군)은 어린 나이에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났지만, 이 영화를 통해 다시 한번 재조명됐다.
배우 유해진(엄홍도 역)이 웃음을 자아낸다면, 배우 박지훈(노산군 역)은 그렁그렁한 눈가의 표정 연기로 눈물샘을 자극한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단종애사가 많은 이들의 눈물을 자아낸 것은 골육상쟁의 비극에서 기인한다.
세조(수양대군)는 왕권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김종서를 비롯한 선왕 세종의 충신들을 폭력적으로 제거한 것은 물론이고, 집권 이후에도 사육신을 비롯한 저항세력을 그 가족들까지 잔혹하게 처단했다.
또한 세조는 성삼문 등 문신들의 집안 남자를 모조리 처형하고, 그들의 부인과 딸을 집현전에서 동고동락했던 신숙주 등 정난공신들에게 전리품으로 하사하여 노비로 삼게 했다.
단종의 비극에 대한 애도는 노산군의 죽음에 대한 동정을 넘어선다. 수양대군에 저항했던 이들의 기개와 그들 집안에 가해진 잔인하고 야비한 보복에 대한 민초의 기억들은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단종복위 충신열전에서 왕따 신세 : 이징옥
‘역사는 승자가 기록한다’는 말처럼 단종복위에 관한 역사는 여전히 논란이 지속된다. 엄흥도를 둘러싼 사소한 이견들이나 사육신에 유응부와 김문기를 넣고 빼는 문제를 둘러싼 후손들의 지리한 논쟁은 차라리 영예로운 편이다. 단종복위를 위한 거사가 아니라 반란수괴로 지목된 함경도절제사 이징옥은 오늘날까지 변방의 여진족 수장과 같은 이미지로 남아 있다.
그는 세종의 시대에 북방의 4군 6진을 개척해 오늘날 한반도(국가)의 영역을 획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김종서에 의해 발탁돼 북방 족속들과의 전투에서 수훈을 세웠던 무장이다.
함경도 절제사로 북방을 지키던 이징옥은 갑자기 귀경하라는 하명을 받고 한양으로 향하던 중 김종서의 죽음을 알아채고 회군하여 반란을 일으킨 인물로 기록된다.
하지만 세종으로부터 단종을 지키라는 특명을 받았던 김종서와 그의 긴밀한 관계를 고려하면, 이징옥이 느닷없이 황제를 칭하며 국토를 참절하려는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들은 승자의 역사왜곡이라는 역사적 반론도 만만치 않다.
실제로 영·정조시대 남인의 거두로서 영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의 문집에는 이징옥에 대한 다른 관점이 담겨 있다.
이절도(李節度) 징옥(澄玉)이라는 자는 양산(梁山) 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무용(武勇)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중략)
김종서(金宗瑞)가 강계부사(江界府使)가 되어 징옥이 충성스럽고 또한 용맹함을 알고 자신의 후임으로 천거하였다. 이때 나이 스물 둘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위가 올라서 북방절도사(北方節度使)가 되었다. 새서(璽書)로 그를 효유하였다.
"경의 위엄과 무예가 크게 떨쳤으니 옛 사람이라 하여도 그보다 더하지는 못할 것이다. 오랑캐들이 모두 와서 복속하였으니 내 매우 가상히 여긴다. 모름지기 과인의 지극한 뜻을 이루었다. 길이 북도(北鄙)의 양장(良將)으로 내 마음에 부합하라."
드디어 군영에 이르러 육진(六鎭)의 번호(藩胡)들로 날래고 용감하며 기사(騎射)를 잘하는 자 3천 명을 뽑아 모두 아장 아래에 나누어 예속시키고 부대로 삼았다. 열읍을 순시할 때마다 그들을 시켜서 각기 국경을 나가서 맞이하고 보내고 하였다.
광묘(세조)께서 선양을 받으시고 은밀히 박호문을 보내어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징옥은 그를 의심하고 말하였다.
“일찍이 밀교(密敎)가 있기를 '국가에 큰 일이 없으면 나를 부르지 않겠다'고 하셨다. 지금 다른 장군이 그 온다는 소리도 숨기고 와서 나와 교대하려 하니 어째서인가?”
호문은 감히 숨기지 않았다. 마침내 그를 죽이고 모의하여 군사를 일으켜 곧장 경사로 나아가고자 하였고, 그 휘하에 약속하였다.
"내가 강을 넘어서 천조에 명을 청하면 상왕(단종)을 복위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를 날 밝는 대로 결행할 것이다."
종성부사 정종이 그 모의를 알고 그날 밤에 사람을 시켜서 판상에 숨어서 그가 깊이 잠든 틈에 그의 오른편 어깨를 찍어 끊었다. 징옥이 놀라 일어나서 그 칼을 빼어 맨몸으로 솟구쳐올라 왼손으로 수백 명을 쳐 죽이고, 그 자신도 어지러이 날아드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이때 나이 24세였다.
충신 의사가 이를 듣고 암암리에 눈물 흘리지 않는 자 없었다. 광묘 3년(1457년)에 원통하게 죽은 자를 위해 초혼하고 그 공양을 동학사(東鶴寺)에서 베풀었을 때, 특별히 이징옥을 금성대군과 여섯 신하의 반열에 썼다.
오호라, 성인이 그 꺼리는 바를 가지고 의를 해치지 않으심으로 하여 천고에 인신된 자에게 그 마음을 다해 힘쓰는 충성을 권하게 하셨으니, 그 뜻이 또한 멀리까지 미치지 않을 것인가. (樊巖先生集 券55 傳 李節度傳)
사후에도 반전을 거듭한 기억 투쟁
조선 초중기의 왜곡된 역사기록과 평가를 바로잡고 신원에 앞장섰던 정조를 비롯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 김종서와 사육신 등이 재평가되었고 충무공 이순신도 높이 헌창되었다. 이 시기에 이징옥도 관직이 복원됨으로써 그가 적어도 역적의 수괴는 아니라는 반전이 있었다. 그런데 세조의 혈통을 자임하는 후대의 주도로 다시 관직이 박탈됐다.
수백년 전에 죽은 자에 대해 관직을 복원했다가 다시 박탈하는 해괴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구한말의 대표적 친일파 매국노였던 이완용이 조선왕조에 당한 억울함을 풀어준답시고 이징옥의 관직을 다시 복원시켰다고 한다.
이런 반전은 당대에 '승자의 기록'을 주도했던 한명회의 사후에도 반복됐다. 연기생활 28년만에 1000만 영화의 기록을 보유하게 된 배우 유지태가 열연한 ‘한명회’는 살아서 네 번이나 1등공신에 봉해진 권신이었지만, 사후에 부관참시(剖棺斬屍)로 파묘와 목이 잘리는 참형을 당한 후에 시신의 목이 도성의 한복판에 내걸렸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한명회는 사후에 박탈됐던 관직이 다시 복원됐다.
세종의 장손인 노산군을 죽음으로 몰고 간 한명회가 훗날 희대의 폭군으로 기록된 연산군에 의해 부관참시를 당한 것은 역사의 기묘한 되갚음이다. 압구정의 한명회는 살아서 청령포의 노산군, 교동도의 연산군(생모 윤씨 사건)과 악연으로 얽혔고, 사후의 노산군은 결과적으로 연산군을 통해 사후의 한명회를 단죄한 셈이다. 실제로 한명회로 대표되었던 훈구파와 적대하던 사림파의 사관들은 단종 복위의 정당성을 지지했고, 한명회의 부관참시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노산군은 후대에 이르러 단종으로 복위되었지만, 광해군(중종반정)과 연산군(인조반정)은 영원히 '군'자를 떼지 못했다. 승자의 왜곡된 기록이나 편향된 평가의 여부를 떠나, 광해군과 연산군의 사후 복위는 중종과 인조의 정통성을 부정하여 조선왕조의 계통질서(종묘사직)에 일대 혼란을 초래할 반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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