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영세무장중립/한반도 중립화 논의

한반도 중립화 논의(1) 대한제국(1897~1910)

twinkoreas studycamp 2021. 5. 4. 18:46

 

조선의 중립화를 제기한 유길준(1856~1914)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성을 아시아의 인후(throat)로 비유하면서 벨기에의 지정학적 조건과 유사하다고 보았다.

 

 

유길준 선생(하남문화원). 하남시 검단산 기슭에 묘소가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인후에 위치하고 있어 마치 유럽의 벨기에와 같고, 그 국제적 지위로는 중국의 공방이어서 불가리아와 터키의 관계와 같다. 불가리아는 동등지례로 세계 각국과 조약을 체결할 권리를 갖고 있지 못하지만 우리나라는 갖고 있다. 공방의 반열에서 외국의 책봉을 받는 일은 벨기에의 경우는 없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일이 있다. 이런 까닭에 우리나라의 체세는 실로 벨기에와 불가리아 양국의 전례를 겸하고 있다. 불가리아를 중립화한 조약은 유럽의 강대국들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고 한 계책에서 나온 것이고, 벨기에를 중립화한 조약은 유럽 강대국들 상호 간의 자국보호를 위한 방책인 것이다. 이로써 논하면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중립국이 되는 것이 실로 러시아를 막는 큰 계기가 될 것이며, 또한 아시아 강대국들의 상보하는 전략도 될 것이다.”(유길준, 중립론)

 

188512월 유길준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기 위해서 벨기에와 같은 영세중립 정책이 필요하다고 상소하였다.

 

18853월 독일의 조선주재 부영사 부들러(Hermann Buddler)가 조선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이 되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1889년 던컨(Chesney Duncan)‘Corea and the Power’에서 대한제국(1897~1910) 강대국에 의존하려는 생각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보호하는 엄정 중립’(strict neutrality)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던컨은 대한제국이 중립을 지키지 못하면 실제적 평화와 진정한 번영을 이룰 수 없다는 생각으로 헤이(John Hay) 미 국무장관에게 대한제국의 중립화를 건의했지만, “정부는 당신을 모험주의자로 간주한다는 답신을 받았다.

 

18994월 미국공사 알렌(Horace N. Allen)은 대한제국 광무황제의 중립화 지원 요청을 윌리엄 맥킨리(William McKinley) 대통령과 헤이 국무장관에게 전하면서 대한제국의 영세중립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부정적 견해를 밝혔다.

 

19001월 대한제국의 궁내부 고문으로 부임한 샌즈(William F. Sands)는 대한제국이 독립을 유지하려면 열강의 동의가 필수적이므로 스위스나 벨기에와 같이 영세중립을 선언하고 열강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고 권고했다.

 

19008월 광무황제는 조병식을 도쿄에 파견하여 고에이 도구마 귀족원의장 등에게 대한제국이 상비군 5만명을 보유하는 조건으로 열강이 중립화를 보장하는 방안을 타진하도록 했으나, 일본 정부는 국력이 피폐해진 대한제국이 그러한 조건을 충족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그해 10월에 조병식은 버크(Alfred E. Buck) 주일 미국공사에게 영세중립을 위한 협력을 요청하였고, 이듬해 광무황제는 조병식 주일공사에게 일··러 공사를 만나 영세중립을 논의하도록 지시했다.

 

1901이즈볼스키(Alexander P. Isvolsky) 주일 러시아 공사는 열강의 보장에 의한 한반도 중립화를 일본 정부에 타진하였으나, 일본은 만주까지 중립지대로 설정하거나 한반도와 만주를 양국의 세력범위로 분할하자고 제안하였다.

 

1902년 파블로프(A. I. Pavlov) 러시아공사와 주한 일·미 공사는 3국의 공동보장으로 대한제국을 중립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19039월 광무황제는 현영운을 도쿄에 파견해서 일본 정부와 영세중립 방안을 논의하도록 하였고, 1904116일 이탈리아 국왕에게 밀서를 보내 전시중립을 천명하였다.

 

1904120일 대한제국은 영세중립을 선포하고 모든 외국군대의 즉시 철수를 요구했지만, 이듬해 러일전쟁을 막지 못하였다.

 

당시 일본 신문들은 대한제국의 중립선언에 대해서 중립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고 하등의 효과도 없다고 조소하였다.

 

1942년 재미동포들이 개최한 대한국 자유회의에 참석한 헐버트(Homer B. Hulbert)는 광무황제의 독립과 중립화 의지를 증언하였다.

 

Homer B. Hulbert(헐버트기념사업회)

 

 

역사에 기록될 가장 중요한 일을 증언한다. 광무황제는 일본에 항복한 적이 결코 없다. 기꺼이 순종하여 신성한 국체를 더럽힌 적도 결코 없다. 휜 적은 있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미국의 협조를 구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만국평화회의에 호소했으나 성과가 없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유럽 열강에 호소했으나 강제퇴위당하여 전달되지 못했다. 그는 고립무원의 군주였다. 대한국인 모두에게 고한다. 황제가 보인 불멸의 충의를 영원히 간직하라.”

 

유길준의 중립화 상소 이후 100년이 넘게 흐른 20011월에 하와이대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가한 조선(북한)의 학자들은 광무황제의 영세중립 선언문 등을 제시하면서 을사늑약의 원천무효를 주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