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영세무장중립/한반도 중립화 논의

한반도 중립화 논의(4) 오스트리아 영세중립 재조명

twinkoreas studycamp 2021. 11. 3. 16:39

분단과 전쟁 이후 한반도 중립화에 대한 논의가 지속된 것은 허약한 완충국가의 운명에서 벗어나 자주독립과 평화번영을 누릴 수 있는 국가의 존재양식으로서 영세중립국이 갖는 매력 때문이었다.

 

또한 영세중립은 분단과 전쟁의 원인이었던 남과 북의 적대적 관계를 하나의 국가의 틀 속에서 평화적으로 해소하고 재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매혹적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매력과 매혹은 빛을 잃어갔다. 장면 정부 이후 역대 정부의 냉소 속에서 대중의 관심과 열의가 뒷받침되지 않는 중립화 논의는 일부 민족지사들의 고색창연한 민족주의 담론처럼 점점 고립화되었다.

 

1955년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은 한국의 중립화 논의에서 오랫동안 하나의 대안적 모델로 인용되었다. 한반도와 오스트리아의 다른 점보다는 비슷한 점에 방점을 둔 논의들은 중립화의 필요성이나 정당성을 설파하는데서 용이했지만, 현실적으로 작동 가능한 중립화 추진전략을 세우려는 노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판 데어 벨렌(Alexander Van der Bellen) 오스트리아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 (대한민국 외교부)

 

 

오스트리아 방식의 적용 가능성에 대한 재고

 

오스트리아 모델은 보다 철저한 이해에 기초해서 한반도의 미래전략에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해서 박수희는 오스트리아식 영세중립화 통일방안의 한반도 적용 가능성에 대한 재고’(한국과 국제사회 제52, 2021)에서 기존의 논의가 무시하거나 생략하고 넘어간 대목들을 환기시켰다.

 

그에 따르면 선행연구들은 오스트리아가 왜 영세중립을 선택했는가에 대한 천착이 이뤄지지 않았다. 비슷한 역사적 배경과 분할점령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와 오스트리아가 다른 길을 걷게 된 이유를 주로 내적인 통합의지 및 능력의 차이에서 찾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다 보니 남과 북이 오스트리아와 같은 경로를 따라 밟으면 통일에 접근할 수 있다는 생각이 50여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일부 오스트리아 학자들조차 비슷한 견해를 피력해 왔다.

 

박수희는 미 CIA의 문서를 토대로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화에 실질적 영향을 미친 경제적 요인 등 구체적 원인들을 찾으려고 했다.

 

CIA 문서에는 소연방(Soviet Union)이 오스트리아 안에 있는 독일자산을 포기하는 대가로 6년에 걸쳐 15천만 달러에 상당하는 현물을 받기로 하고, 정유시설을 건네는 조건으로 10년 동안 석유를 받기로 했다(오스트리아는 소량의 산유국가). 결론적으로 소연방은 막대한 경제적 반대급부를 챙기고 오스트리아를 떠난 것이다.

 

당시에 동서 진영은 서로 다른 이유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통일 혹은 중립화에 대한 구상을 검토하고 있었다. 19509월 경에 미 국무부는 인천상륙작전의 상승세를 고려하여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검토했다. 미국이 전황을 낙관했고, 중국인민공화국의 개입 가능성이나 군사적 파괴력을 크게 고려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러나 UN군이 관장하는 선거를 통해서 선거와 헌법절차를 거친 중립화통일은 미몽으로 끝났다. 미국과 동질적이고 서구에 친화적인 체제를 전제로 한 중립화방안은 한국전쟁에서 확인된 쌍방의 지정학적 불능성을 냉철하게 고려하지 못한 몽상으로 드러났다.

 

애초에 미국은 서독을 대소 최전선국가로 상정하여 비무장 중립화를 고려하지 않았다. 반면에 남한은 대소 최전선국가도 아니었고, 대중 최전선국가는 새로운 중국과 교전을 하기 전까지 그런 개념 자체가 없었다.

 

한국전쟁 전까지는 미국이 중국의 내부 상황을 봐가면서 대만의 본토상륙을 지원했을 가능성이 더 컸다는 점과 한국전쟁의 한 원인을 제공한 애치슨 라인을 고려하면 차라리 대만이 대중 최전선국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당시 대만 지도부는 한반도보다 대만 및 양안에서 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우려했고, 장제스 등은 미국과의 군사동맹 및 동아시아 집단안보체제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한국의 이승만, 태국의 왕실, 필리핀 등에서도 같은 목소리를 냈지만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에 조응하는 서태평양조약기구를 구성할 용의가 없었다.

 

2차대전에서 승전한 국가들로 구성한 북대서양조약기구에 비해서 2차대전에서 모두 식민지(전범국 부역국가)였던 국가들로 서태평양조약기구를 구성하는 방안은 미국의 균형감각에 부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즉 미국에게 한국·대만 등은 그런 필사적인 보호조치를 받을 만한 전략적, 지정학적 가치가 없는 나라들이었다. 하지만 한국전쟁에서 새로운 중국의 존재감과 일본 열도의 지정학적 위약성을 절감한 미국은 한국·대만의 지정학적 가치를 재평가하게 되었다.

 

박수희의 연구에서도 확인되었지만 오스트리아의 적극성은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동북아에서 한국전쟁이 3년째를 맞이하며 휴전협상이 본격화되었던 19536월에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은 네루 인도 수상에게 자국의 영세중립을 통한 단일국가로서 주권회복 방안을 소연방에게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애초에 미국은 한반도보다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중립화에 훨씬 더 소극적이었다. 다만 오스트리아의 적극성과 소연방의 양해가 이뤄질 경우에 대비하여 미국은 몇 가지 전제조건을 관철하려고 했다. 이를테면 오스트리아가 유사시에 미국과 서유럽의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4강의 보장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의 단독 결정으로 중립화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미국은 오스트리아가 핀란드와 같은 친소적 중립화(Finlandization)로 인하여 사회주의 종주국의 영향권에 속하지 않도록 주권을 확고하게 보장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나아가서 오스트리아 중립화를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등의 중립화와 연동시키려는 맞불 작전을 모색했다. 말하자면 교차 중립화인데, 오스트리아가 게임이 복잡해지는 것을 원할 리 만무했다.

 

또한 미국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군사적으로 오스트리아를 대소전진기지로 확보하는 것이 서유럽의 방어에 유리하다고 보았다. 실제로 미 국무부의 오스트리아 중립화에 관한 의견조회에 대해서 합참은 매우 부정적인 견해를 회신했다.

 

이에 따라 1954년 베를린회담에서 소연방이 오스트리아 중립화 방안을 타진하자 사실상 반대의사를 밝혔고, 1955년 오스트리아는 소연방과 국가조약을 체결하고 스위스식 영세중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미국과 서유럽은 오스트리아의 결행에 반대했지만, 국가조약에 반영된 영세중립의 실질적인 의미를 검토하면서 서방의 입장이 반영된 것을 확인하고 영세중립 인정으로 선회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소연방과 체결한 국가조약(13)에 따라서 미사일, 잠수함, 어뢰, 전투기, 30km 이상 발사 가능한 총포류, 살상용 생화학물질 등을 보유할 수 없게 됨으로써,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은 다소 불안하게 출발했다. 또한 소연방은 오스트리아가 미국이 주도하는 군사동맹이나 군사작전에 가담 혹은 협력하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이러한 사정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영세중립이 외부에 성공적으로 비쳐지는 것은 영구적인 분단을 피하면서 내적 혹은 국제적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주권국가로 독립하여 장기평화를 구가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스트리아 영세중립은 형식 및 절차에서 미···프가 서명한 다자조약에 의해서 국제법적 보장이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UN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었던 4개국이 모두 상황을 인지하고 내용을 공유한 상태에서 적극적이든, 암묵적이든 비문서적으로 추인한 국제법적 효과가 70년 가까이 지속되고 있다.

 

 

오스트리아 국가조약(The State Treaty of 1955)

 

 

 

오스트리아의 내·외부협상 (‘트윈 코리아 : 한반도의 지정학적 재탄생인용)

 

1934년 오스트리아는 나치독일과 동맹을 맺고 히틀러의 제3제국에 귀속됨으로써 전후에 패전국의 일부로 간주되었고, ···프에 의해 독일과 함께 분할점령되었다.

 

소연방(Soviet Union)은 오스트리아 내부의 혁명화를 지원해서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사회주의화를 기도했지만 실패하였다. 소연방이 추천한 임시수상이었던 레너(Karl Renner)는 사회주의자였지만 공산당, 사회당, 국민당 등을 망라한 거국적이고 중도적인 정부를 구성하여 자국의 주권회복을 도모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 국가는 오스트리아와 같은 경로를 밟지 못하고 좌·우 중도파가 폭력적으로 제거되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한창이던 195111월과 이듬해 2월에 오스트리아는 스위스와 같은 영세중립국을 지향하고 세계 어느 국가에도 편향되지 않은 균형외교 정책을 천명하였고, 자국의 문제를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제기하여 주변국의 관심과 협력을 구하였다.

 

내부협상과 외부협상에 임하는 오스트리아 지도자들의 자세는 한반도국가의 영세중립 전략에서 중요한 참고가 될 수 있다.

 

 

(4대 연합국에 의해서 분할 점령된 오스트리아) 독일과 마찬가지로 양 진영이 균등분할하지 않고 서구 진영이 좀더 많은 지역을 점령했다. 반면에 한반도는 거의 정확하게 반분되었고, 비록 산악지대가 많기는 하지만 소연방의 점령지역이 미국보다 더 넓었다.

 

···프는 오스트리아에 관한 전후처리를 논의하면서 오스트리아의 주권(대표성)을 인정하지 않다가, 1954년부터 베를린 4개국 외무장관회의부터 오스트리아 장관의 참석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이듬해 4월 소연방은 모스크바 각서(Moscow Memorandum)를 통해서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화를 승인하였다. 그해 1026일 오스트리아 의회는 헌법개정을 통해서 외국과의 동맹과 외국군 의 주둔 및 기지를 금지하는 영세중립을 선언했다.

 

소연방은 동독을 비롯한 동유럽 일대를 일국 사회주의의 동맹지대 및 제국주의 진영과의 완충지대로 바라보았다. 따라서 서독이 재무장하면 과거처럼 오스트리아와 새로운 형태의 연방을 만들어 동부전선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 것으로 우려했다.

 

당시에 미국도 한반도의 정세를 비슷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미국은 소연방의 팽창과 새로운 중국의 확장을 경계하면서, 조선이 한반도를 통일하면 중·소를 등에 엎고 일본 열도를 위협할 것으로 간주하였다.

 

결론적으로 미국과 소연방은 이념과 체제가 달랐지만 오스트리아와 한반도에 대한 지정학적 이해는 열강의 이빨’(Teeth of Powers)을 드러냈다. ·소는 독일-오스트리아에 적용한 4개국 분할점령과 다르게 일본-한반도에 대해서 한반도만 분할점령하였다.

 

이러한 차이가 한반도 문제의 다자적 해결을 어렵게 하는 구조적 요인이 되었고, 다자협의는 20069.19 공동성명까지 50년이 넘도록 사실상 전무하였다. 다자협상(muitilateral negotiation)은 비용이 많이 들지만, 오스트리아처럼 내부협상에서 성공한 경우에 보편적 이성과 합리적 타당성을 관철시키는데 유리할 수 있다.

 

반면에 미·소의 양자협상(bilateral negotiation)은 비용이 적게 들 수 있지만 양극화된 대립구도에서 제3자의 부재로 인하여 중도적·절충적 대안을 관철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한반도 국가의 심각한 내적 균열이 상승작용을 하면서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과 극적으로 대조되는 전쟁의 참화를 겪게 되었다.

 

4.19혁명 이후 한국의 정당들이 제기한 오스트리아식 영세중립 방안은 제도적 측면만 강조하고, 오스트리아의 내부협상에서 나타난 영세중립의 진정한 동력으로서 국민적 합의가 미비하였다. 또한 한반도 지정학과 강대국 이해관계에 대한 피상적인 접근으로 실질적인 추진동력을 갖기 어려웠다.

 

반면에 오스트리아는 미·소의 상충적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새로운 국가의 정체성에서 동유럽과 인접한 완충지대라는 측면과 미국의 마샬 플랜(Marshall Plan)에 참여하여 동방에서 서방으로 통하는 입구라는 측면이 균형을 이루도록 하였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쇼프(Khrushchev) 부상하면서 소연방의 유럽정책이 전환되었다. 스탈린은 제국주의와 전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면서 스위스와 스웨덴의 중립에 대해서 비판적이었다.

 

스위스의 중립을 미국에 대한 맹종이라고 규정하였고, 스웨덴의 중립노선을 스웨덴 국민들이 제국주의를 거부한 결과로 평가하면서도 NATO에 가입하려는 제국주의적 경향이 강하다고 비난하였다. 흐루쇼프는 소연방과 세계 공산주의를 평화적 수단으로 추구한다는 평화공존을 특수한 유형의 계급투쟁으로 규정하였다.

 

전후에 소연방은 미국과 독일·오스트리아·한반도·베트남에 대한 포괄적 합의를 논의하는 가운데 중립화를 조건으로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수용하였지만, 서독이 NATO에 가입하자 오스트리아가 서독에 편입을 희망할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졌다.

 

흐루쇼프는 오스트리아문제를 서방과의 협상에서 퀴드 프로 쿼’(quid pro quo)로 접근했다. 미국도 출구전략의 일환으로 한반도 중립화를 검토했지만 바이마르화(Weimarization)의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에 따라 점차 소극화되었다.

 

195528일 몰로토프(Molotov)는 소연방 최고회의 보고에서 오스트리아문제를 독일과 분리할 수 없지만 오스트리아의 독립을 위해서 국가조약이 속히 체결되어야 하고, 서독의 재무장에 대한 우려를 불식할 수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이는 오스트리아를 동맹국으로 만드는 대신에 완충지대(중립국)로 삼겠다는 신호였다.

 

소연방은 오스트리아 정부에 외국군의 군사기지 및 군사동맹을 금지하는 서약을 자발적으로 천명할 것을 요구하였다. 과거에 강대국에 의한 타율적이고 강제적인 중립화는 또 다른 강대국에 의해 무력화되었다는 점에서 소연방이 요구한 오스트리아의 자발적 의지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요건이었다.

 

195534일 소연방 정치국은 서독의 재무장 문제와 오스트리아 철수를 연계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오스트리아 정부에 국가조약 체결에 앞서 자발적인 영세중립 선언을 권고하였다.

 

411일 라브(Julius Raab) 오스트리아 총리와 휘글(Leopold Figl) 외무장관은 스위스모델에 기초한 영세중립 선언과 의회 설득을 약속하는 모스크바 각서’(Memorandom)를 체결하였다. 미코얀 부수상과 몰로토프 외무장관은 조약의 효력발생 이후 미···프의 주둔군이 1231일까지 철수하는 것에 동의한다고 밝혔지만, 4국의 실제 철수시점은 앞당겨졌다.

 

5154개 점령국 대표와 휘글 외무장관이 비엔나에서 국가조약을 조인하였고, 오스트리아 의회는 외국군의 철수시한이 만료되는 1026일에 헌법개정을 통해서 영세중립을 선포하였다.

 

소연방은 각서 외에 별도로 중립화에 대해서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 중립화의 자율성을 부각시켰다. 서구의 시각에서 모스크바의 크렘린(Kremlin)에 투사된 음흉한 북극곰의 이미지는 사회주의 외교정책을 냉전적 시각으로 접근한 것으로, 오스트리아 영세중립 사례는 좀더 폭넓은 시야를 제공한다.

 

오스트리아의 게르트너(Heinz Gaertner) 국제관계연구소장은 한반도 통일방안에서 독일방식보다 오스트리아방식이 더 유용하다고 주장했다(Neutrality for Korea? PeaceNet, 2015).

 

게르트너는 냉전종식으로 흡수통일한 독일과 한반도는 지정학적으로 다른 점이 많고, 냉전이 본격화되기 이전에 분할점령된 후에 중립화를 통해 독립한 오스트리아의 사례가 탈냉전 이후 한반도의 현실과 유사한 점이 많다고 주장하였다.

 

독일통일은 동독을 지배하던 소연방의 불관여가 결정적 계기가 되었지만, 한반도에 대해서 미국과 중국은 그런 유형의 결정을 내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와 한반도의 커다란 차이점도 존재한다. 오스트리아는 분할점령이 10년으로 제한되면서 한반도처럼 두 개의 상이한 체제가 뿌리 깊게 자리잡지 않았고, 동족상잔의 내전은 물론이고 수 십 개국이 관여한 국제전을 겪지도 않았다.

 

소연방의 정책전환에는 오스트리아 공산당이 선거와 연합전선에서 실패하고 사회혁명을 주장하는 노동조합의 가두진출이 사회적 지지를 획득하지 못한 것과 3년 동안 지속된 한국전쟁에 의한 피로감이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도 스탈린 사후에 흐루쇼프의 평화공존론이 부상하던 시기에 오스트리아의 영세중립을 통한 주권회복 전략과 소연방의 대외전략이 맞아 떨어졌다. 또한 일부 극좌세력을 제외한 다수의 정파와 일반 여론이 주권의 조속한 회복과 영세중립을 지지한 것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패전국의 일부로 간주되었던 오스트리아가 종전 10년만에 영세중립국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던 내적 동력이었다.

 

1955515일에 체결된 오스트리아 국가조약은 소연방이 오스트리아의 일부를 분할하여 사회주의 동맹국으로 만들지 않는 대신에 오스트리아가 나치독일의 동맹국으로 전락했던 전철을 밟지 않도록 균형을 기하여 영세중립에 필요한 현실적 조건을 명시했다는 점에서 한반도 국가의 영세중립에 대한 구상에서 독일기본법과 함께 구성적 맥락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첫째, 4대국은 오스트리아가 주권을 가진 독립적, 민주적 국가로서 재건되는 것을 승인하고, 오스트리아의 독립과 영토적 불가침을 존중한다. 독일과의 평화조약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독일(·서독)이 승인하도록 보장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어떠한 정치적, 경제적 합병을 금지하고, 오스트리아는 이를 승인하고 보장함으로써 독일과의 합병이나 통합을 초래할 수 있는 일체의 협정이나 행동을 취하지 않을 것을 서약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