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으로 10월 26일은 기념비적인 날이다. 1597년 10월 26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상유십이척((尙有十二隻)의 기개로 명량대첩을 거둔 날이고,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조선을 넘어 만주로 진출하던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날이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권총을 격발했다. 그를 변호했던 안동일 변호사, 강신욱 변호사 등이 남긴 사료에 따르면, 김재규는 자신의 서랍 속에 태극기와 권총을 보관하면서 시기를 기다리다 안 의사의 의거일에 거사했다는 유언을 남겼다.
한국 현대사에서 박정희 죽음과 전두환 등 신군부의 등장 및 광주학살, 그로 인한 항쟁의 과정에서 이른바 ‘10.26 사태’는 결정적 분기점이었지만, ‘대통령 시해사건’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사건 진상의 뒷면을 보려하지 않았다.
최근 개시된 김재규 재심의 핵심은 살인행위 자체에 대한 변론이 아니라 ‘살인의 목적’에 관한 역사적 평가에 있다. 법조계에서는 재심의 주요과제로 10.26사태에 대한 비상계엄의 타당성 문제, 비상계엄 이전에 발생한 사건에서 민간이었던 피고인(김재규)에 대한 군사재판 소급적용의 문제, 내란목적(국헌문란)의 진위 문제를 꼽는다.
2020년 5월 김재규의 유족들은 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서울고법은 오랜 심리 끝에 2025년 2월 19일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 검찰이 재항고를 통해 제동을 걸었으나, 2025년 5월 대법원은 서울고법의 재심 결정이 타당하다고 보고 검찰의 재항고를 기각했다.
이처럼 김재규 재심은 검찰과 법원의 ‘뜨거운 감자’이지만, 그러나 사건발생 46년이 지난 즈음에 사건의 뒷면을 직시하는 것은 한국민주주의의 장래에 필요한 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대법원, 내란목적 살인에 대한 박빙(긍 8 : 부 6)
1979년 말에 김재규의 내란목적 살인혐의에 대해 군사법원과 항소심은 사형선고를 내렸지만, 대법원 상고심에서 ‘8(긍정) 대 6(부정)’이라는 박빙의 판결이 드러났다.
만약 다수의견의 대법관 8명 중에서 1명만 판단을 달리했다면, 김재규의 내란목적 살인은 부정될 수 있었다. 이런 까닭에 소수의견 대법관 6명은 전두환 군사독재체제에서 이런 저런 보복과 불이익을 당했다.
올해 시작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에 대한 재심은 사건발생 46년 만이고, 그의 교수형이 집행된 지 45년 만이다. 서울고법 형사7부(이재권 부장판사)에서 시작된 첫 변론에서 김재규의 변호인단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인해 발령된 비상계엄은 위헌·위법하므로 보안사(사령관 전두환)에서 김재규를 체포 및 수사할 법적 권한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변호인단은 “10·26과 지난해 12·3 비상계엄은 45년 만의 데자뷔”라면서 “윤석열이 45년 전의 김재규를 불러왔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의 변론 요지는 김재규의 총격은 박정희 개인에 대한 살인사건이며 국헌문란이 아니라 박정희를 살해함으로써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취지이므로 내란목적 살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김재규는 보안사령부에 체포된 지 한 달 만에 군법회의에 의해 기소되었고, 1심에서 16일만에 내란목적 살인 및 내란수괴 미수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어 항소심은 6일만에 김에게 사형선고를 했다. 그리고 대법원에서 변호인들의 끈질긴 변론으로 박빙판결이 내려졌으나, 사흘만에 김의 사형이 집행됐다.

김재규, “원천을 때려버렸다.” : 목적과 수단에 관한 역사적 논란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을 둘러싼 진술과 증언들을 종합하면, 김과 박정희는 모두 경북 구미 출신으로 1946년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 동기로 시작해 5사단 사단장(박)과 36연대장(김)으로 인연을 맺었다.
김은 법정 진술에서 “나는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주장하면서 내란목적 살인이 아니라는 뜻을 분명히 했다.
훗날 언론인 문일석의 취재에 따르면, 김재규의 친동생 고 김항규씨(1997년 별세)는 10.26사태의 보름 전에 김으로부터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설 때 물러설 줄을 알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절대로 물러설 성격이 아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또한 고 안동일 변호사 등이 남긴 기록에서는 김이 박정희정권의 탄압을 받았던 장준하 선생을 높이 평가했으며, 의원직 제명을 당했던 김영삼 신민당 당수와도 소통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 김항규씨의 전언에 따르면, 김은 법정 최후진술에서 “제 나이 한 10년이나 20년 끊어 바치더라도 좋으니까 이 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 놓자, 나는 대통령의 참모인 동시에 대한민국의 고급관리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 충성하고 이 국민에게 충성할 의무가 있지 않느냐, 결국 나의 명예고 지위고 목숨이고 또 대통령 각하와의 의리도, 이런 소의에 속한 것은 한꺼번에 다 끊어 바친다, 대의를 위해서 내 목숨 하나 버린다, 그래서 원천을 때려 버렸다.”고 토로했다.
“박 대통령은 나 개인에게 있어 사적으로 친형제나 다름 없었다. 나는 나의 정분을 야수와 같은 마음으로 끊었다. 나는 처음부터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 나의 생명을 독재 체제와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각오하였다. 민주화의 과정에서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그 희생을 줄이는 것이 나의 대의였다. 생명은 고귀한 것이며, 똑같은 것이다. 많은 사람을 희생시키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내가 스스로 나의 목숨을 끊을 수 있도록 해주시오. 10.26 사태는 오로지 나의 책임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1980년 1월24일 김재규 최후진술)
김의 재심을 요구하는 유족이나 재심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은 김의 살인행위 자체에 대한 변호가 아니라 내란목적 살인이 아니라는 김의 일관된 주장을 역사적으로 재평가하자는 취지에 동의한다.
최근에 확인된 김재규의 법정진술에 따르면, 당시 청와대의 실세였던 차지철 경호실장이 궁정동 안가의 만찬에서 캄보디아사태(킬링필드)를 들어 2백만명에서 3백만명까지 죽는 판에 (부마항쟁에 대해 우리도) 탱크로 밀어버리자는 취지로 극언을 하자 박 대통령이 스스로 발포명령을 내리겠다는 식으로 호응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김은 이러한 정황을 자신이 내란 및 국헌문란을 목적으로 총격살인을 감행한 것이 아니라는 근거로 주장한 것이다.
김재규 자의식에 투영된 삼중신(三重臣) 김문기
김재규는 단종복위모의에 연루돼 극형을 받았던 김문기 공조판서 겸 삼군도진무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그는 막후에서 김문기도 사육신의 반열에 속해야 한다는 일부 사학자들의 견해를 촉진하면서 국사편찬위원회를 비롯한 국사학계의 논의에 영향을 미친 장본인이란 시각도 있다.
결국 사육신 문제는 복잡한 찬반 논란을 거쳐 기존 사육신 6명과 김문기를 모두 헌창하는 것으로 봉합됐고, 이에 따라 동작구 사육신역사공원에는 김문기를 포함한 7명의 가묘가 조성돼 있다.
이로 인해 김재규의 거사의 배경에는 김녕 김씨의 역사적 인물인 김문기와 동시대의 야당지도자였던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영향이 작용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됐다. 실제로 그의 친동생인 고 김항규씨는 말년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형이 문중에 대해 특유의 자부심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원래 김문기는 세조의 김종서 제거 및 단종 축출에 대해 찬동하지 않았지만 표면에 드러나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당시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 핵심 문신들은 단종 복위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무신 출신 성승과 유응부의 가담을 이끌어냈으나 상황변화에 밀려 거사의 타이밍을 놓쳐 밀고에 의해 실행되지 못한 행위에 의해 역적으로 단죄되었다.
당시에 성승과 함께 유이한 무신이었던 유응부는 모의를 주도하던 문신 후학들의 문약(文弱)을 지탄했다. 그는 취조 및 고문을 당하는 자리에서 성삼문 등을 바라보며 “서생과는 일을 꾀하지 말라더니 과연 그렇구나”라며 거사를 미룬 것을 개탄했다. 김문기도 주저하는 문신 후학들에게 만약 안에서 거사가 이뤄지면 자신이 밖에서 통제할 것이므로 결행을 주저하지 말라고 격려했으나 거사는 이뤄지지 못했다.
당시에 세조의 신임으로 공조판서와 삼군도진무를 겸직했던 김문기는 의외의 인물이었다. 이로 인해 그는 극악한 고문과 사지가 찢기는 거열형을 당했지만 죽는 순간까지 수양대군 일당의 왕실쿠데타와 단종복위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사육신과 김문기 등은 복위거사의 실패로 역적이 되면서, 오늘날로 말하자면 내란을 주도한 수괴급으로 지목됨에 따라 그들 집안의 남자들이 처형되었고, 그들의 배우자와 딸들은 정난공신들의 노비로 끌려가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이로 인해 김녕김씨 문중도 풍지박살이 나면서 각지로 흩어져 수백년 동안 가문을 숨기고 살아야 했다고 한다. 270여년이 흘러 세조의 직계혈통이 매우 희박해진 영조의 연대에 이르러 김문기도 복권되면서 충의공(忠毅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이어 정조는 국가의전록(儀典錄)인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에 단종복위사건과 관련돼 희생된 이조판서 민신, 병조판서 조극관, 공조판서 김문기를 ‘삼중신(三重臣)으로 책록하여 사육신과 함께 추앙하도록 지시했다. 김재규는 평소에 충의공파의 후손이란 점을 자부했다고 전해진다.
내란이란 무엇인가? : 법리와 역사적 평가
역사적으로 계유정난(단종복위모의)을 비롯해 내란 및 반란으로 규정된 사건들은 ‘역사는 승자의 역사’라는 말처럼 한 면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한국 현대사에서 5.16군사쿠데타(박정희), 10.26사태(김재규), 12.12군사반란(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그리고 최근의 12.3비상계엄(윤석열)은 모두 내란 및 반란으로 범주화될 수 있는 동일한 성격이 아니다.
하지만 서울중앙지법(지귀연 부장판사)은 논란이 된 윤석열 구속취소 결정에서 별도자료를 통해 수사와 재판이 위법하게 진행됐다는 취지로 사형집행 45년만에 재심이 결정된 김재규 사건을 예시했다. 그러나 김재규에게 오래 전에 규정된 ‘내란목적 살인’에 대한 재심과 이제 시작된 윤석열의 ‘내란목적 계엄’에 대한 법원의 판단과 역사적 평가는 해당 사건들의 상당한 시차와 상이한 역사적·사회적 배경에 따라 두 사건이 ‘내란’이란 외관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비대칭적으로. 비평행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
김재규의 내란살인, 김대중의 내란음모, 운석열의 내란계엄이란 말은 각각 성격과 실제가 다르지만, 한국 민주주의가 좌우진영 대립에 의한 내란 및 계엄의 징크스와 프레임에서 탈각하기 위한 대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환기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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