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고르바초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Ⅴ) 금주령

twinkoreas studycamp 2021. 7. 26. 21:05

 

 

김태항(정치학 박사)

 

 

미하일 쎄르게이비치 고르바초프(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ев) 3

 

 

미네랄 서기장

 

고르바초프가 당면한 주요 현안들은 농업 부진에 따른 대규모 곡물 수입, 경제 침체, 과학기술 분야의 후진성, 근로의욕 이완, 정치 냉소주의 만연, 지하경제의 팽배 등인데, 특히 곡물의 경우 불구대천의 원수인 미국으로부터 6년 동안 지속적으로 대규모 수입을 해야만 하는 굴욕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고르바초프 지도부가 야심 차게 들고 나온 깜짝 카드가 금주령인데, 이는 처참하게 실패한 정책으로 기록된다. 이들은 안드로뽀프의 후예들답게 음주에 따른 무단결근, 각종 사고, 범죄 등을 줄임으로써 노동 생산성을 늘리고자 했지만, 이 조치는 음주를 중단시키기는커녕 인민대중들을 불편하게 만들고, 짜증 나게 했을 뿐이다.

 

어찌 보면 금주령은 소련 인민들의 역린을 건드린 사건이었다. 일례로 농업 문제만 하더라도, 비효율적인 집단농장 제도가 문제의 핵심인데, 집단농장은 소련형 사회주의 체제의 근간이자 타부(taboo)라 건드리지도 못하고, 공격 대상을 인민들의 유일한 낙이자 안식처였던 알코올로 정한 것이다. 결국 어설픈 이상주의적 정책 추진으로 고르바초프의 인기도 하락하게 된다.

 

1열 우로부터 고르바초프(첫번째), 그로미코(두번째), 리가초프(네번째). 2열 우로부터 솔로멘쩨프(첫번째), 3열 우로부터 옐친(두번째) 등이 포진한 모습. 러시아 초대 대통령인 옐친은 모스크바 당서기와 당 중앙위원 및 정치국원을 역임했다. (wikipedia.ru)

 

금주령의 주창자들은 두 명의 정치국원, 즉 이고르 리가초프(Е. К. Лигачёв)와 알코올 중독자였던 미하일 솔로멘쩨프(М. С. Соломенцев)였는데, 이들은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이 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리가초프는 안드로뽀프가 발탁한 인물로 인간 사회의 도덕적 타락에 염증을 느낀 보수적인 금욕주의자였다. 고르바초프와 마찬가지로 리가초프 역시 브레쥐네프의 세력권에 휩쓸리지 않은 독립적인 인물이라 안드로뽀프가 모스크바로 불러들인 것이다.

 

술을 전혀 마시지 않는 그는 이미 고향인 똠스크(Томск)에서 금주령을 시행한 전력이 있었다. 솔로멘쩨프는 알코올 중독자에서 단주(斷酒)로 전향한 인물로 누구보다도 알코올과의 전쟁에 열정을 기울였다. 이 두 사람은 알코올의 생산과 판매를 엄격히 제한하도록 정치국원들을 설득했다.

 

사실 음주는 수 세기 동안 러시아인들의 삶에서 골칫거리였지만, 위안거리이기도 했다. 추운 날씨 탓도 있겠지만, 제정 러시아 시대의 전제 체제에 이어, 인민의 낙원이라는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 들어서도 인민들에 대한 탄압은 제정 러시아에 못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알코올에 마취되어 삶의 고통을 완화하고자 했다.

 

니꼴라이 2세 즉위 행사에 운집한 군중(zen.yandex.ru)

 

러시아인들이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는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꼴라이 2(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Романов)의 등극식 때 발생한 비극적인 참사를 봐도 알 수가 있다. 제정 러시아 시대엔 새로운 짜리(царь)가 즉위하게 되면, 백성들에게 선물을 나눠주는 풍습이 있는데, 니꼴라이 2세는 맥주와 컵 등을 대관식 기념으로 나눠줄 계획이었다.

 

모스크바 외곽에 위치한 하듼까 초원(Ходынское поле)에는 이른 새벽부터 선물을 받기 위해 수십만의 백성들이 어슬렁어슬렁 모여들고 있었다. 이미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커다란 맥주통을 실은 마차들이 도착하자 사람들이 몰려가기 시작했다.

 

이때 갑자기 술이 곧 동이 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자 수십만의 인파가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들었고, 병사들이 이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이 비틀거리면서 넘어지고, 짓밟히면서 무려 천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했다. 부상자도 수천 명에 달했다.

 

사람들은 하듼까 초원의 대참사를 니꼴라이 2세 시대에 대한 불길한 전조로 여겼다. 실제로 니꼴라이 2세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후 예까쩨린부르크(Екатеринбург)에서 볼셰비키들에 의해 가족 모두가 총살당한 뒤, 소각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우리는 보드카와 함께 공산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라면서 198544일자로 금주운동 명령을 내렸다. 소련공산당의 발표와 동시에 보드카의 가격은 세 배로 뛰었고, 맥주와 와인의 생산량은 80% 가까이 줄었다.

 

금주령에 결코 동참할 생각이 없었던 소비에트 연방의 알코올 애호가들은 싸구려 밀주를 사서 마시거나, 설탕을 구입하여 직접 술을 만들어 먹었다. 이로 인해 정부 세입의 17%가 줄어들었고, 전국적으로 설탕의 품귀현상을 초래하였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소련에서 가장 큰 이익이 나는 전매 사업을 지하로 몰아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1920년대 미국의 금주법으로 마피아들의 밀주 유통사업이 창궐했듯이, 소련에서도 국가의 주류 판매 독점권을 지하 범죄집단이 차지하게 되었다.

 

밀주를 제조하기 위한 설탕이 사라지면서, 술이 품귀현상을 빚자 애주가들은 알코올 냄새가 나는 것은 모조리 마셨는데, 공업용 에탄올, 부동액, 창문 세척제, 향수, 스킨로션 등을 마시다가 많은 사람이 죽었다.

 

러시아의 남부 지역에서는 질 좋은 비노(вино; 와인) 생산지이자 유명한 포도밭들이 무차별적으로 베어져 사라졌다. 금주령으로 인해 젊은 사람들의 마약 중독 비율도 2.5배 증가하였다. 포도주 한 병을 사기 위해 끝도 보이지 않는 줄에 서있던 사람들은 고르바초프를 생수만 마시는 미네랄 서기장이라면서 투덜거렸다.

 

설익은 이상주의이자 전형적인 관료주의적 조치였던 금주령은 처참한 실패를 맛보면서, 1988년 슬그머니 사라지게 된다.

 

 

체르노빌(Чернобыль) 참사 : 총체적 체제붕괴의 조짐

 

1986426일 우끄라이나의 수도 끼예프 근처에 위치한 체르노빌의 원자로 하나가 폭발했다. 순식간에 방사능 물질이 이 지역 전체와 인접 공화국인 벨라루시(Беларусь)까지 확산되었다.

 

원자로 폭발 후 몇 시간 동안 원전 인근에 사는 수천 명의 주민들이 치명적인 방사능에 노출되었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아무런 조치도 연락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몇 년 뒤 이 지역 주민들 상당수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수만 명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백혈병 발병률도 치솟았다. 체르노빌 원전 기술자들과 직원들 본인은 물론 가족들까지 피폭되었다.

 

소련 정부의 합동조사단은 폭발이 일어난 지 19시간 후에 현장에 나타났다. 그리고 이 지역 주민들의 대피는 재앙이 일어난 지 36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시작되었다. 이들은 이미 방사능에 충분히 피폭된 상태였다.

 

원전 반경 30km 내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두 번째 대피는 사건 발생 거의 열흘이 지난 55일에 시작되었다. 이들 역시 방사능에 피폭되었다. 주민들이 버리고 떠난 반려동물들은 병들고 굶주리다가 경찰들에게 모두 포획되어 사살되었다.

 

사고 발생 이틀 뒤인 428일 스웨덴의 대기오염 감시센터가 방사능 구름을 감지하면서 전 세계는 커다란 핵 재앙이 발생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소비에트 연방의 정부조사단은 볼셰비키적 비밀주의를 고집하면서 필요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을 다량의 방사능에 노출시켰다. 사고 발생 거의 3주 뒤인 514일 고르바초프는 처음으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했다.

 

세르비나(russian7.ru)

 

핵물리학이나 방사능에 대한 지식이 없는 비전문가들이 체르노빌 복구 작업에 긴급 투입되었듯이, 체르노빌 참사는 중앙통제 명령체제의 실패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단적인 예로 합동조사단장이었던 셰르비나(Б. Е. Щербина) 부총리도 참사 5년 뒤인 19918월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사망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체르노빌 참사로 인해 그동안 형식적인 슬로건에 불과했던 글라스나스찌(정보공개) 정책이 대폭 확대되게 되었다.

 

소련 붕괴의 전주곡인 듯, 체르노빌 참사가 일어난 지 불과 4개월 만인 1986831일 흑해에서 러시아판 타이타닉사건으로 불리는 대참사가 발생하는데, 정기 여객선 나히모프 제독호가 러시아 화물선과 충돌·침몰하여 400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같은 해 106일에는 다탄두 핵미사일 16기를 탑재한 소련의 핵잠수함이 대서양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사건이 발생했다. 사고가 난 잠수함이 깊은 바닷속으로 영원히 잠수한 것이다.

 

러스트 경비행기 사건(www.thisdayinaviation.com)

 

 

19875월에는 서독 출신의 마티아스 러스트(Mathias Rust)라는 19세의 청년이 독일로부터 자신의 경비행기를 타고 날아와 모스크바의 끄레믈 광장을 두 번 선회한 후 성 바실리 대성당(Храм Василия Блаженного) 앞에 착륙하는 희대의 사건이 발생했다.

 

세계 최고 수준의 방공망을 자랑한다는 소련의 방공 시스템을 뚫고, 아무런 저지도 없이 소련 권력의 심장부에 민간인 경비행기가 착륙했다는 소식을 들은 고르바초프는 경악했다.

 

분노에 찬 고르바초프는 군이 뻬레스뜨로이카에 저항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신을 물 먹였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고르바초프는 국방장관을 비롯한 군 장성들에게 이 사건을 교통경찰한테 듣고 알았나요?”라며 조롱했다.

법정에 선 러스트(time.com)

 

국방장관인 세르게이 소콜로프는 즉각 사임했고, 150명이 넘는 군 고위 장교들이 해임되거나 징계를 받았다. 신임 국방장관엔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드미트리 야조프(Д. Т. Язов)가 몇 단계를 건너 뛰어 파격적으로 임명되었다.

 

198812월에는 아르메니아(Армения) 공화국 중부 지역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여 2만 명(최대 5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주변 지역이 초토화되었다.

 

19896월에는 시베리아 가스관 누출 폭발사고로 근처를 지나가던 열차 두 량이 파괴되었고, 8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그야말로 대참사의 연속이었다.

 

1981년 바르샤바의 미히니크(cvce.eu)

폴란드의 자유노조에 동참한 지식인이자 저명한 언론인이며, 동유럽 민주화에 커다란 기여를 한 아담 미히니크(Adam Michnik)는 소련의 체르노빌 참사 등 여러 가지 사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러시아 땅은 공산주의자들을 위해 50년 정도는 견딜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은 버틸 수가 없다. 폴란드에서는 19808월 인간들이 파업을 했다. 소련에서는 현재 무생물들이 파업하는 것이 목격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