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고르바초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Ⅴ) 뻬레스뜨로이카

twinkoreas studycamp 2021. 7. 19. 13:51

 

 

김태항(정치학 박사)

 

 

미하일 쎄르게이비치 고르바초프(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ев) 2

 

 

스따브로뽈 시절

 

고르바초프 부부는 대학 졸업 후 1955년부터 스따브로뽈시에서 살기 시작했다. 당시 스따브로뽈시의 인구는 약 14만 명이었다. 이 도시는 스따브로뽈스키 끄라이(Ставропольский край)라는 지역의 지방 수도였는데, 스따브로뽈 지역의 크기는 스위스의 두배에 달했다.

 

고르바초프는 공산주의 청년조직인 컴싸몰(Комсомол)의 선전부에서 근무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고속 승진을 하여 196635세 때 스따브로뽈시당 제1서기, 39세 때인 1970년에는 스따브로뽈 지역당 제1서기, 그리고 이듬해인 1971년엔 당시 정치국원 겸 서기이자 고르바초프와 동향인 표도르 꿀라꼬프(Ф. Д. Кулаков)의 추천으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는데, 이 모두가 최연소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었다.

 

부인이란 한 남자의 두 번째 운명이다라는 러시아 속담이 있다. 이는 고르바초프에게 정확히 들어맞는 것으로 보인다. 고르바초프가 이른바 시골 촌놈이었던 반면, 라이사는 지적이고 교양이 있으며, 부지런하고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모스크바국립대 철학부를 졸업한 후, 모스크바 레닌 교육대학에서 사회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모스크바국립대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을 강의하게 된다.

 

라이사는 고르바초프에게 과음하지 않도록 조언과 견제를 많이 했고, 술 대신에 문학이나 예술에 관심을 가지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갔다고 한다. 이때의 경험이 아마도 고르바초프가 보드카 등 독주를 멀리하고, 설령 술을 마시게 되더라도 약한 술을 가볍게 즐길 정도로만 끝내는 습관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스따브로뽈 지역은 온천으로 유명한 곳이다. 끄레믈의 거물들이 휴가 또는 지병 치료차 자주 찾았던 명소이기도 하다. 특히 정치국의 두 거물인 수슬로프와 안드로뽀프가 자주 방문했고, 고르바초프는 자연스럽게 이들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더욱이 수슬로프의 경우 독·소전쟁 당시 스따브로뽈 지역의 당서기였고, 안드로뽀프 또한 스따브로뽈 출신이기 때문에 고르바초프와 인연이 깊다고 볼 수 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1978년 모스크바로 호출되어 소련공산당 농업 담당 서기로 승진하게 되고, 1980년에 최연소 정치국원이 된다. 이후 안드로뽀프가 서기장이 됐을 때, 고르바초프는 당 서열 2위에 해당하는 이데올로기 담당 서기를 맡게 된다. 이로써 고르바초프는 서기장이 될 수 있는 완벽한 자격요건을 갖추게 되었다.

 

 

변화의 바람(Wind of change)

 

소련에서 추방당한, 소련계 미국인 시인이자 작가이며,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요시프 브롯스키(И. А. Бродский)는 미국 영화 타잔1956년 제20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흐루쇼프가 폭로한 스딸린 격하 연설보다, 소련의 탈()스딸린화에 더욱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다.

 

표현이 코믹하지만, 이를 단순한 우스갯소리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아무리 폭압적인 체제일지라도, 인민대중들은 문학, 해학, 음악 등의 형식으로 자신들의 분노와 스트레스를 분출·해소하면서 저항했다.

 

일례로 억압의 철권시대로 불리는 19세기 제정 러시아 시대는 동시에 문학의 황금시대이기도 했다. 억압과 통제에 관한 한, 제정 러시아와 다를 바 없는 소련 체제에서도 음성적으로 지하문학과 음악 등이 성행했다.

 

빅또르 초이(wikipedia.ru)

 

소련과 동유럽의 인민들은 몰래 비틀스의 복제 테이프를 들었고, 브레쥐네프 시대의 말기인 1980년대에 들어서는 까레이스키(Корейский; 한국계 또는 고려인) 뮤지션인 빅또르 초이(Виктор Робертович Цой)가 소련 인민들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원주 최씨의 후손인 빅또르 초이는 레닌그라드의 전설적인 락그룹 끼노(Кино)의 리더였다. 1980년대 내내 소련 당국의 검열과 방해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 체제의 위선과 반전·반핵을 노래한 빅또르 초이의 작품은 해적판 복제 테이프의 형태로 소비에트 연방 전체로 퍼져나갔다.

 

모스크바 아르바뜨 거리(위키피디아)

 

그는 1990815일 의문스러운 교통사고로 사망을 하게 되는데, 우리의 대학로나 인사동 거리와 유사한, 모스크바의 아르바뜨(Арбат) 거리에 빅또르 초이를 기리는 벽이 있다. 필자도 유학시절 몇 번 가봤지만, 벽에는 빅또르 초이를 기리는 각종 낙서와 그림이 그려져 있고, 벽 앞에서 버스킹(Busking)을 하는 보헤미안 풍의 젊은이들과 이들을 관람하는 사람들로 항상 북적거렸다.

 

스콜피언스

 

필자의 견해로는 빅또르 초이와 더불어 80년대 후반, 외국의 헤비메탈·하드락 그룹의 모스크바 공연도 소련의 체제 변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일례로 독일의 하드락 그룹인 스콜피언스(Scorpions)‘wind of change’라는 노래의 앞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가사가 전개된다.

 

I follow the Moskva down to Gorky Park

모스크바의 고리끼 공원을 따라 내려갑니다

Listening to the wind of change

변화의 바람 소리를 들으며

 

통일 독일의 비공식 국가(國歌)로 불리기도 하는 ‘wind of change’는 스콜피언스가 19898월 모스크바 공연 후 영감(inspiration)을 받아 만든 노래로, 불과 몇 개월 뒤 벌어진 베를린장벽 붕괴(1989. 11. 9)에 이어 독일 통일(1990. 10. 3)을 보면서, 모스크바에서도 변화의 기운을 느꼈다는 내용의 명곡이다.

 

19911월 스콜피언스의 ‘wind of change’가 발매되었고, 같은 해 성탄절인 1225일 고르바초프의 사임 연설과 함께 소비에트 연방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된다.

 

무엇보다도 압권은 소련 붕괴 3개월 전인 1991928, 미국의 헤비메탈 그룹인 메탈리카(Metallica)와 호주의 하드락 그룹인 AC/DC의 모스크바 공연에 1백만 명 이상의 군중이 몰렸는데, 정복 차림의 일부 군인들과 질서 유지차 동원된 경찰들까지도 헤드뱅잉(Head Banging)을 하며 공연을 즐겼다. ‘변화의 바람변화의 태풍으로 변한 것이다.

 

 

뻬레스뜨로이카(Перестройка)

 

고르바초프의 등장은 너무 늦었던 것일까, 아니면 너무 빨랐던 것일까? (pravoslave.ru)

 

고르바초프는 19853월 서기장에 등극하게 된다. 그의 핵심 슬로건이자 트레이드 마크가 뻬레스뜨로이카인데, 우리말로는 재건, 재편에 가깝다. 뻬레스뜨로이카는 러시아어의 뻬레(пере)와 스뜨로이카(стройка)의 합성어로써, 뻬레는 영어의 접두어 ‘re()’에 해당하고, 스뜨로이카는 ‘construction(건축, 건설)’을 의미한다.

 

따라서 직역을 하면 재건축이 되는데, 고르바초프는 신축이 아닌 사회주의 체제의 골격은 그대로 두고, 일부 리모델링 작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건물의 골격이 얼마나 낡았던지, 리모델링 작업 중 건물 전체가 갑자기 무너져 버렸다.

 

고르바초프는 뻬레스뜨로이카를 추진하면서 네 가지 동원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개인과 집단의 권익(self-interest) 추구, 둘째, 대중의 비판(public criticism)과 정보에의 접근 허용, 즉 글라스나스찌(гласность; 정보공개) 추진, 셋째, 민주주의, 민주화 추진, 넷째, 법에 의한 통제, 즉 법치 준수 등이 그것이다.

 

고르바초프는 뻬레스뜨로이카에서 특히 국가의 민주화야말로 개혁을 추진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지모끄라찌야(Демократия; 민주주의)란 건강에 좋은 깨끗한 공기와도 같다. 깨끗한 공기야말로 사회주의 체제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펼쳐나갈 수 있는 요인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없이는, 소련의 발전은 실현 불가능할(невозможным) 것이다.”

 

실제로 뻬레스뜨로이카는 정치적으로는 스딸린 독재에 의해 왜곡된 레닌주의를 다시 회복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레닌주의의 주요 골자는 중앙집권주의, 일당독재, 국가 주도 지령경제, 그리고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만이 정당하다는 믿음 등인데, 이는 고르바초프가 추진하고자 하는 뻬레스뜨로이카와 불협화음(cacophony)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특히 레닌이 창조한 사회에서는 자유가 인간의 중요한 정신적 가치로 존재하지 않았으며, 레닌이 비록 중앙집권주의 앞에 민주적’(демократический; 지모끄라찌취스키)이라는 단어를 붙이기는 했으나, 민주주의적 제도가 전혀 작동하지 않는 사회였다.

 

아울러 뻬레스뜨로이카의 경제적 목표는 브레쥐네프 집권 후반기인 70년대 후반부터 본격화된 경제 성장의 둔화와 침체의 늪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브레쥐네프 시기엔 고유가의 혜택으로 재정 상태가 넉넉했음에도 불구하고, 과도한 군사비 지출, 만연된 관료주의적 비능률과 각종 부정·부패의 창궐로 인해, 특권계층인 노멘끌라뚜라를 제외한 절대다수의 소련 인민들은 기본적인 욕구 충족을 제한받고 있었다.

 

이렇게 커질 대로 커진, 축적된 체제의 불안 요소들을 고르바초프가 모조리 넘겨받게 되는데, 설상가상 고르바초프 집권기는 유가 폭락기였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 아닐 수 없었다.

 

또 다른 문제는 고르바초프가 소련공산당의 지도하에 침체되고 독단적이며, 관료주의적인 체제를, 보다 자유주의적인 모습으로 전환하기 위해 뻬레스뜨로이카를 들고 나왔는데, 이는 개혁 대상이 개혁을 주도하는 모순적인 상황을 초래했을 뿐이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뻬레스뜨로이카 추진 상황이 지지부진하자, 정책의 우스까례니에(ускорение; 가속화)와 관료들의 무사안일, 태만, 비밀주의 등을 근절하기 위해 글라스나스찌(정보공개) 확대 정책을 제시한다.

 

고르바초프는 먼저 자신과 정치국에 더 많은 정보가 보고되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뻬레스뜨로이카 정책 추진 과정에서 우군이 될 일반 인민들에게도 정보공개의 필요성을 느꼈다. 단적으로 이들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관료들을 비판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70년 가까이 자율성과 진취성이 결여되었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대부분의 소련 인민들에게 레닌주의를 기반으로 건설된 공산주의 체제는 플라톤의 이데아와도 같은 절대적인 실재였다.

 

그들은 자유의 첫 잔을 맛보기는 했지만, 아직 취기가 돌지 않았다. 글라스나스찌 정책의 효과는 체르노빌(Чернобыль) 원전 폭발 참사 이후 본격적으로 꿈틀거리게 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