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고르바초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Ⅴ) 소련의 붕괴

twinkoreas studycamp 2021. 8. 8. 15:38

 

 

김태항(정치학 박사)

 

 

미하일 쎄르게이비치 고르바초프(Михаил Сергеевич Горбачев) 5

 

 

성난 소비에티쿠스의 반란(tass.ru)

 

 

뻬레스뜨로이카의 위기

 

고르바초프는 침체된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마르크스-레닌주의적 경제 관념에 아담 스미스(Adam Smith)적 요소를 첨가하기로 했다. 즉 그는 뻬레스뜨로이카의 본격 가동을 위해 국유 기업의 자치 확대(расширение самостоятельности) 및 사기업 활동, 부분적 사유화 허용 등 사적 영역의 활동 범위를 확대한 것이다.

 

이렇듯 고르바초프는 고(故) 아담 스미스를 초빙하여 꺼져가는 경제에 불꽃을 피워보고자 했지만, 오히려 물자 부족은 만성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고르바초프 시대에서도 노멘끌라뚜라들은 질산이 첨가되지 않은 질 좋은 사씨스끼(сосиски; 소시지)와 유기농 채소를 자신들만의 특별 상점에서 충분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다.

 

뻬레스뜨로이카 정책의 효과가 나타나야 할 1989년 시점의 소련 경제는 사실상 붕괴(крах)의 위기로 돌입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국민총생산이 10~30% 가까이 급락했다. 이에 따라 근로자들의 실질 노동 임금은 10~40% 감소했고, 실업자 수는 10~15% 증가하였으며, 몇몇 지역에서의 실업률은 이 수치를 월등히 능가하고 있었다. 문제의 핵심은 고르바초프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부터 국민총생산과 생활 수준이 꾸준하게 하향 곡선을 그렸다는 것이다.

 

레닌은 자신의 사후에 시신을 방부처리하여 영원히 보존하도록 한 적이 없고, 또한 자신의 동상을 이렇게 크게 만들라고 한 적도 없다. (Lenta.ru)

 

1980년대에서 90년대로 넘어가는 시점에 고기, 치즈, 설탕 등 필수 식료품들의 생산이 급격하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모스크바 시민들조차 닭고기나 달걀을 사기 위해 보통 3~4시간 동안 줄을 서야만 했다. 특히 1989년 여름부터 인민들의 삶의 질은 가파르게 하락했는데, 이로 인해 전국적으로 파업이 쓰나미처럼 퍼져나갔다.

 

같은 해 7월에는 시베리아의 광부들이 기본 소비품(치약, 비누, 소시지, 신발 등)의 공급을 요구하면서 파업에 돌입했다. 광산 당 위원회 위원인 발렌찌나 알리소브나(Валентина Алисовна)는 당시의 처참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우리는 돼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유감스럽긴 하지만 사실입니다. 작업장의 환경은 한 세기나 뒤떨어져 있습니다. 집에 가면 전기도 없어요. 집 천장에서는 물이 쏟아집니다. 나는 자본주의자는 아니지만, 이 체제는 우리를 위해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1989년~90년 사이에 해외에서의 고르바초프의 인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아프가니스탄 철군을 필두로, 모스크바의 암묵적 양해에 의한 동유럽 국가들의 자율성 확대와 민주화, 독일 통일의 가시화, 소련의 선제적 군축 선언에 대한 서구 국가들의 환호, 모든 형태의 살상용 미사일에 대한 폐기 협상 개시 등으로 고르바초프는 1990년 노벨평화상 수상과 더불어 글로벌 아이돌급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1991년 여름경에 고르바초프의 경제개혁은 자신의 초라한 정치적 입지와 마찬가지로 최종적인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연방정부의 엄숙한 명령으로 출동한 탱크는 러시아공화국 깃발을 든 젊은 엄마가 안고 온 아이의 커다란 유모차처럼 되어버렸다.(tass.ru)

 

정치개혁

 

고르바초프는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개혁을 위한 처방전인 뻬레스뜨로이카의 표류 원인이 소련공산당 관료들의 저항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경제개혁을 하기 위해서는 정치개혁이 우선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르바초프는 1988년 6월, 제19차 특별 당대회에서 서구식 의회제도의 도입과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제의 도입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정치개혁안을 제시했다.

 

1989년 3월 2,250명의 인민 대의원 중 2/3가 비밀투표로 선출되었고, 상설 의회로서 소비에트 연방 최고회의가 구성되었다. 1990년 2월 고르바초프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의 지도적 역할을 포기하기로 결정한 것과 더불어, 대통령제의 신설을 제의했다.

 

1990년 3월에는 고르바초프가 인민대표자 대회에서 간접선거로 연방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또한 같은 해 7월, 제28차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서기장에 재선됨으로써 외형상으로는 고르바초프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 서기장과 개혁의 속도와 방법을 놓고 갈등을 벌이던 옐찐이 같은 해 5월 러시아공화국 인민대표자 대회에서 러시아공화국의 최고 권력기관인 최고회의 의장에 당선되는데, 이는 대단히 미묘한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법적으로 소비에트 연방이 우위에 있지만, 영토와 각종 자산에 있어서 연방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러시아공화국을 장악한 옐찐이 실질적인 힘을 획득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옐찐은 1990년 6월 11일 러시아공화국의 주권(主權)을 선언하면서, 러시아공화국 헌법이 소비에트 연방 헌법의 우위에 있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써 러시아공화국은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고, 발트해 연안국들과 협력관계를 유지하면서 연방 정부와 대립함에 따라 각 공화국들의 독립 움직임 역시 빨라지게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정치개혁을 통해 권력을 공고히 한 후 뻬레스뜨로이카를 더욱 가속화하고자 했지만, 체제 혼란기적 상황에서 소련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미리 포기하는 등 자충수를 두었고, 결과적으로 권력이라는 죽을 정성껏 쒀서 옐찐에게 바친 격이 되었다.

 

시베리아 출신의 거구인 옐찐은 자신의 길에 방해가 되는 장애물들을 밀어내는 데에 능숙한 불도저 같은 인물이었다. 측근이었던 수하노프의 말마따나 그는 제도적인 게임의 법칙을 거부하는 반골이자, 지독한 권력지향형 인물이었다.

 

결국 옐찐은 1990년 7월 12일 개최된 제28차 당대회 벽두에 소련공산당 탈당을 선언하고, 끄레믈의 대회장을 박차고 떠남으로써 고르바초프에게 정면 도전을 선언한다. 이듬해인 1991년 6월 12일 옐찐은 러시아공화국 전체 국민의 직접선거로 거대한 러시아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러시아공화국 헌법에 보장된 대통령 선포권에 의해 고르바초프 연방 대통령의 각종 법령, 포고령, 비상계엄령 등을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게 된다.

 

이로써 고르바초프는 사실상 껍데기만 걸친 소비에트 연방의 대통령일 뿐이고, 옐찐이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쿠데타세력이 농성하던 청사를 가차 없이 포격한 탱크들 

 

 

8월 쿠데타와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1990년 시점의 고르바초프는 사면초가에 처해있었다. 개혁 세력은 물론 보수파로부터도 지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양쪽 세력 모두 고르바초프를 압박하고 있었다. 길거리에서는 고르바초프를 타도하자는 플래카드가 등장했다. 특히 보수 강경파는 고르바초프에게 개혁을 중단하지 않으면, 실각할 수도 있음을 경고했다.

 

고르바초프는 1990년 11월 24일 연방 붕괴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신연방 조약의 초안을 제시하였다. 1991년 4월 모스크바 외곽의 노바-아가료바(Ново-Огарёво)에서 고르바초프는 신연방 조약의 체결과 관련해 9개 공화국 지도자들과 회동했다.

 

적대적 관계였던 옐찐 역시 고르바초프의 제안에 응하면서 4월 23일 이른바 ‘1+9 선언’에 합의하게 된다. 여기서 1은 연방 대통령으로서의 고르바초프를 상징하고, 9는 러시아, 우끄라이나, 벨라루시, 아제르바이잔, 우즈베끼스탄, 까자흐스탄, 끼르기즈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따지키스탄 등 9개 공화국을 의미한다.

 

고르바초프는 9개 공화국의 동의를 받아냈지만, 상당한 양보를 해야만 했다. 각 공화국의 경제운용 상의 자율성이 대폭 확대된 것이다. 다시 말해 연방 정부는 사실상 허수아비가 되었고, 고르바초프 자신은 ‘바지사장’으로 전락한 것이다.

 

이래서인지 고르바초프는 신연방 조약안의 최종 조인 작업에 머뭇거렸고, 이 와중에 보수 강경 세력들은 조약 체결을 막기 위해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결성하여 쿠데타에 돌입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쿠데타의 주역들 대다수가 고르바초프가 임명한 인물들이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뻬레스뜨로이카와 글라스나스찌 정책으로 흔들리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보호하고, 무너져가는 소비에트 연방을 유지하기 위해 소련공산당을 더욱 강화하여 전통적인 중앙집권주의를 복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삼일천하에 불과했다. 주도 세력들의 준비 부족, 우유부단, 그리고 군부와 까게베(KGB) 세력들 간의 내부 분열에 따른 자멸로 쿠데타는 실패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고르바초프만 배제하면 소련 사회가 쿠데타에 동조하리라고 착각한 것이다.

 

양복 안에 방탄조끼를 입은 옐찐은, 러시아 최고 소비에트 건물인 벨르이돔(Белый дом; 현 러시아 연방 정부청사) 앞에 등장한 탱크 위로 기어 올라가, 모스크바 시민들에게 쿠데타 저지 호소를 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민주주의 세력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무명의 옐찐이 일약 세계적인 인물이 되는 순간이었다.

 

루슬란 하즈불라또프(Р. И. Хасбулатов) 최고 소비에트 의장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영웅이자, 러시아공화국 부통령인 알렉산드르 루쯔꼬이(А. В. Руцкой)는 벨르이돔에서 옐찐의 안전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2년 뒤, 같은 장소에서 농성을 하는 이들에게 옐찐은 탱크 포사격을 가한다.

 

고르바초프는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 등 자신이 임명한 사람들에 의해 감금되었다가 옐찐의 세력들에 의해 풀려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권력은 자연스럽게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인 옐찐에게로 넘어가게 되었고, 동시에 옐찐은 러시아공화국 내에서의 모든 공산당 활동을 불법화했다. 이로써 그는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을 위해 필요한 국내적 환경을 구축할 수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실패 3일 뒤인 8월 24일 밤 중앙TV를 통해 자신의 서기장직 사퇴와 함께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의 해산을 권고하면서, 사실상 소련공산당의 해체를 선언한다. 같은 날 우끄라이나공화국 역시 독립 선언과 함께 연방을 탈퇴한다.

 

벨라베쉬스까야 숲 표지석(belmarket.by)

 

1991년 12월 8일 옐찐은 영국 여왕보다도 실권이 없는 고르바초프에게 마지막 결정타를 가하는데, 사냥 매니아였던 브레쥐네프의 여러 사냥터 중의 한 곳이자, 벨라루시의 수도인 민스크(Минск) 근교 벨라베쉬스까야 숲(Беловежская пуща)에서 옐찐과 우끄라이나 대통령인 끄라프추크(Л. М. Кравчук), 벨라루시 최고회의 의장인 슈스께비치(С. С. Шушкевич) 등 슬라브 3국의 지도자들이 비밀 회동을 했다.

 

이들은 “국제법적 주체이자 지정학적 실체로서의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СССР)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공동선언문에 서명하면서 독립국가연합(СНГ; CIS)의 출범을 선포했다. 소련이 사망했음을 공개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이와 관련, 무엇보다도 아이러니한 사실은, 이들이 이러한 소식을 고르바초프보다 미국의 대통령인 부시(George H. W. Bush)에게 먼저 알린 것이다. 스딸린 시대라면 이들은 모두 ‘인민의 적’이자 ‘미제 간첩’의 죄목으로 처형 대상인데, 고르바초프의 혈관에는 흐루쇼프의 DNA가 흐르고 있었다.

 

13일 뒤인 1991년 12월 21일에는 까자흐스탄의 수도 알마아타에서 발트 3국과 그루지야를 제외한 11개 공화국 정상들이 모여 독립국가연합 창설협정에 서명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소련은 소멸하게 되었다.

 

 

 

1991년 12월 25일 성탄절 저녁 모스크바 중앙방송은 소비에트 연방 대통령 사임 성명서를 낭독하는 고르바초프의 육성을 들려주면서 “소련은 죽었다(Союз умер; 싸유즈 우몌르)”라고 보도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