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국가(World Politics)/우크라이나(Ukraine)

키이우(키예프)의 운명과 비핵화 딜레마

twinkoreas studycamp 2022. 2. 26. 21:08

러시아의 침공에 맞선 우크라이나 기갑부대에 경례를 하는 어린이. 남자 아이는 장난감 소총을 어깨에 메고, 여자 아이는 커다란 토끼인형을 들고 있다.

 

 

러시아의 예상과 달리 우크라이나가 수도의 옥쇄작전으로 나오면서 키예프 함락은 예상보다 지체되고 있지만, 원래는 2월 27일~28일경에 키예프가 함락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만약 키이우가 함락되더라도 우크라이나 정부, 군인, 민병대가 항복하지 않고 게릴라전을 벌이면, 우크라이나가 '푸틴의 베트남', '푸틴의 아프카니스탄'이 될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인종적으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슬라브인종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언어와 문자를 달리하는 상이한 민족이다.   

 

엄연한 독립국가인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가 침략국가의 손에 들어간다는 것은 국망으로 간주될 수 있다. 물론 파리가 나치에 함락되었다고 해서 프랑스의 항전이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대외적으로 프랑스는 국격을 상실했다.

 

마찬가지로 키이우의 함락은 우크라이나의 국치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국가적 굴욕과 별개로 러시아-우크라이나전쟁은 현재의 국제질서에 커다란 의문을 초래할 것이다.

 

부다페스트 각서에서 우크라이나의 핵무기 포기에 대한 대가로 안전보장을 약속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이를 뜯어말리겠다고 약조한 국가들(미국, 영국)과 부다페스트 각서를 공증한 UN이 무기력하게 대응하는 것은 비핵화의 정당성에 찬물을 끼얹는 충격적 사변이다.

 

심지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핵전쟁 가능성마저 시사함으로써 비핵화에 관한 다자조약의 실효성에 근본적 회의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핵개발 동결을 조건으로 경제제재에서 벗어나려는 이란이 '러-우전쟁'의 영향을 배제하려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가히 양가적이다.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저항을 상징하는 그림(우크라이나 화가의 작품)     "더럽혀지지 않음과 위태로움의 긴장, 그리고 결연함"                     그림 속 화염병의 불꽃은 가을의 낙엽처럼 절제와 한계를 상징하는 듯하다. 

 

 

종국적으로 미국의 예상대로 키예프 함락 이후 젤렌스키를 비롯한 정부요인들이 폭력적으로 제거되고 '괴뢰정권(Puppet regime)'이 수립된다면, 우크라이나는 리비아처럼 한반도 비핵화 논의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다.

 

러시아군의 키예프 진공에 대한 저지선을 구축한 우크라이나 정부군

   

 

 

 

우크라이나 국방위원장, "핵 포기는 역사적 과오"  

 

최근 쿨레바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94년 비핵화 당시 미국이 확약한 안전보장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비판했다.

 

1994년 12월 7일 미국, 영국, 러시아는 부다페스트에서 우크라이나의 비핵화에 대한 대가로 국가안보와 주권독립을 보장하기로 했다(UN General Assembly Security Council A/49/765). 이에 따라 우크라이나는 핵탄두 1천8백여개를 러시아로 반출해 폐기했고, 1996년에 비핵화를 완료했다.

 

키예프 외곽에서 러시아군의 호위차량이 우크라이나군의 중화기 공격으로 파괴된 모습

 

미국은 카자흐스탄에서도 ‘사파이어 작전’을 비롯한 정교한 비밀작전으로 핵무기 해체는 물론이고 일체의 핵물질과 연구진까지 완전히 미국으로 반출하였다. 

 

미국은 핵무기 및 핵물질을 반출하는 ‘협력적 위험감소’(Nunn–Lugar Cooperative Threat Reduction)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사파이어작전(Code Sapphire)을 전개했다. 넌(Sam Nunn) 상원 군사위원장과 루가(Richard Lugar) 상원의원은 페리(William James Perry) 국방장관과 공조하여 항공기, 전함과 같은 무기체계에 제한하는 국방예산의 틀을 뛰어넘었다.

 

‘넌-루가 프로그램’은 ‘다른 수단에 의한 방위’라는 구상에 기초해서 미국안보에 기여하는 것이라면 비군사적 영역이라도 국방예산에 포함하는 새로운 개념을 채택하였고, 핵무기 및 관련시설의 폐기와 핵물질 반출과 과학자·기술자에 대한 프로그램을 통해서 카자흐스탄의 영구적 비핵화를 실현하였다.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에 상층부가 파괴된 키예프의 고층아파트

 

당시에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는 몇 개의 핵무기라도 유지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주변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만약의 경우에 협상의 지렛대로 사용할 수 있는 소수의 핵무기를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2018년 투르치노프 우크라이나 국가안보 국방위원장은 핵무장 포기를 역사적 과오로 규정했다. 그는 핵무기를 반출한 러시아는 크림반도를 강점하고 이를 견제해야 할 미국과 영국은 사실상 수수방관했다고 개탄했다.

 

우크라이나군은 키예프 50km 전방의 진입로에 위치한 다리를 폭파하여 러시아 기갑부대의 전격전을 지연시키고 있다.

 

이번에 전면 침공을 받은 우크라이나는 국가존망의 기로에서 정체성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끝까지 저항해도 기존 체제는 무너지고 친러 정권이 수립될 가능성이 크고, 극적인 종전협상으로 중립화(핀란드화)에 합의하더라도 돈바스지역 등에 대한 상당한 양보와 영토축소가 불가피하다.

 

결론적으로 우크라이나는 핵무기를 모두 내놓았지만 강대국의 안전보장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젤렌스키 정부는 비정한 국제정치의 한복판에서 길 잃은 아이처럼 되어 버렸다.

 

러시아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폐허가 된 아파트

 

 

<부다페스트 각서>(UN General Assembly Security Council A/49/765).

 

1. 우크라이나의 독립과 주권 및 현 국경선(영토의 완전성)을 존중한다.

 

2. 우크라이나의 영토보전 또는 정치적 독립성에 대한 위협 또는 무력 사용을 삼가고 자위권 또는 유엔 헌장에 따른 기타 사유에 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크라이나에 대하여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3. 우크라이나 주권에 내재된 권한행사를 자국의 이익에 종속시키거나, 그 어떠한 형태라도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경제적 강압을 삼가한다.

 

4. 우크라이나가 무력사용에 의한 피해자가 되거나 핵무기가 사용되는 무력행위의 위협을 받았을 경우에는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가 지체 없는 조치를 취한다.

 

5. 핵보유국이나 핵보유국과 함께하는 조직이나 연합이 자국에 공격을 감행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크라이나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는다. (핵무기에 관한 소극적 안전보장·NSA)

 

6. 4개국(미 영 러 우크라이나)은 위에 언급한 약속에 의문이 생기면 협의를 진행한다.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은 항전을 결의했고, 키예프 함락 이후에도 게릴라전 가능성이 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항전세력의 주축이 우파 민족주의 민병대라고 주장하면서 우크라이나 군인들에게 총구를 돌려 젤렌스키 정권을 전복하라고 촉구했다.

 

 

휴지조각이 된 안전보장 각서

 

러시아연방의 2014년 크림반도 점령과 2022년 돈바스 파병 및 키에프 진공은 강대국들이 비핵화 대가로 내건 안전보장(체제보장)이 20~30년 지나면 휴지조각이라는 생생한 기록이 될 것이다.

 

이에 따른 국제적 파장이 심각해질 것이다. 당장 한반도에 미칠 영향은 비핵화의 근본조건인 북의 안전보장에 대한 강대국 담론이 더욱 불신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허약한 완충국가들의 동맹가입(편승)을 부추겨 진영대결과 신냉전을 심화시키고, 군비경쟁과 핵보유 열망을 촉발해서 비핵화 및 군축에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브레진스키(Zbigniew K. Brzezinski)와 미어세이머(John J. Mearsheimer) 등은 한반도와 우크라이나, 폴란드를 지정학적으로 가장 위태로운 지역으로 보았다. 한반도에서도 서북지역의 역사는 더욱 그러했다. (이하 <트윈 코리아 Twin Koreas : 한반도의 지정학적 재탄생> 인용)

 

 

2차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1941년 키예프를 점령하자 소비에트연방은 특수부대를 잠입시켜 도시 전역에 대한 대규모 원격 폭파를 감행했다. 나치는 키예프의 유태계,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을 학살했다. 전략적 요충지인 키예프는 양측의 공방으로 천년고도의 유산들이 폐허가 되었다.

 

 

복배수적(腹背受敵)의 지정학

 

고대 중국은 한반도 일대를 ‘흉노의 팔’로 바라보았고, 근대 일본은 한반도를 ‘예리한 칼’로 바라보았다. 거꾸로 보면 중국대륙을 등지고 일본열도를 바라보는 한반도는 복배수적(腹背受敵)의 형세가 되었다. 구한말의 유길준은 한반도가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인후(throat)에 위치하여 유럽의 벨기에와 같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한반도를 도전세력의 근거지 혹은 배후지로 경계하거나, 거꾸로 순망치한의 관계로 바라보았다. 당은 고구려와 신라를 분리하였고, 몽골(원)은 금(여진족)과 고려를 분리하려고 했다. 명·청 교체기, 청·일전쟁, 러·일전쟁, 국·공내전에서 한반도 서북부는 만주의 전략적 요충지인 랴오닝의 어깻죽지와 같았다. 이 지역 일대가 신흥세력에게 넘어가거나 협력하면 중원이 멱살을 잡히는 형국이 되곤 하였다.

 

청의 홍타이지는 한반도의 서북부를 명과 분리해서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였고,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국·공내전 말기에 서북지역의 도움을 받았다. 1950년 말에 펑더화이가 이끄는 중국인민지원군은 서북부 산간지대의 미군 및 UN군을 강타하고 평양을 거쳐 이듬해 서울까지 진공했다.

 

동북 3성과 서북지역의 지리적 연결성은 동북아의 세력변동 및 패권의 교체기에 한반도를 전쟁으로 안내하는 가교였다. 이나바 이와키치의 만선사관(滿鮮史觀)은 내선일체(內鮮一體)의 확장판이었다. 이나바는 조선의 역사가 만주의 흥망성쇠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었으며, 압록강을 사이에 둔 조선과 만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랴오닝과 서북

 

중국의 역대 왕조는 평양(서경)을 중심으로 평안도·황해도 지역을 점령하고 안동도호부(당), 동녕부(원)를 설치해서 한반도에서 북방을 지향하는 세력이 발흥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 및 제거하고자 하였다. 고·당전쟁의 살수대첩·사수대첩에서 대패한 당은 고구려의 랴오닝 진공을 경계하였고, 고구려의 전승탑을 부수고 안시성을 공략하던 당 태종은 고구려가 전선을 우회해서 베이징으로 직공할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고구려 패망 이후 한반도 국가들이 랴오닝과 분리되면서, 서북지역은 랴오닝을 장악한 새로운 도전세력들의 핵심적인 진입로가 되었다. 거란(요)·몽골(원)·여진(후금·청)의 내습은 서북의 방벽을 뚫어야만 침략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수의 침공(598년), 당의 침공 및 안동도호부 설치(645년·668년), 거란의 침공(973년·1010년·1018년), 몽골(원)의 침략 및 동녕부 설치(1253년·1270년), 홍건적의 난입(1359년·1360년), 여진(청)의 침략(1636년)에서 드러난 사실은 평양을 장악하면 개경이나 한양을 공략할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하면 물러서게 되었다.

 

명․청의 시대를 거치면서 해양세력의 충동(implus)이 한반도를 두드리기 시작하면서 서북의 지정학적 의미가 달라졌다. 명에서 ‘만력동원지역’이라고 칭한 임진왜란을 중국에서는 ‘항왜원조’라고 부른다. 마오쩌둥은 16세기 항왜원조를 20세기 항미원조로 연결시켜 조선에 대한 중국의 수호자적 이미지를 부각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두 번의 원조(assitance for Joseon)는 모두 해양세력(일·미)이 뻬이징을 압박할 가능성을 차단하고, 증조국(서북)과 수증국(요동)의 연결선을 지키려는 방어적․현상유지적 성격이 강했다. 결론적으로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한반도 국가를 굴복시킬 수 있는 핵심적 관건은 왕도(서울)의 함락이었지만, 더불어 평양을 장악하지 못하면 한반도 전체를 온전히 장악하기 어려웠다.

 

중국이 명·청 교체기에 들어서는 시점에 조선의 광해군은 명의 출병 요청과 후금의 견제로 인한 이중적 압박을 받으면서 서북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장수들은 모두 압록강으로 나가서 결전해야 한다는 것이니 그 뜻은 가상하다. 그렇다면 무사들은 무슨 연고로 서쪽 변방을 죽을 곳으로 여겨 부임하기를 두려워하는가?”(조선왕조실록 광해군일기, 1621년 6월 6일) 여기서 ‘서쪽 변방’은 평안북도를 말한다.

 

광해군은 명의 사신 원건룡이 재차 출병을 요구하자 요동(랴오닝)과 서쪽 변방의 지리적 연계성을 강조했다. “조선의 원병을 보내면 누르하치는 만리장성을 넘어 의주로 쳐들어올 것이고, 조선은 명에 조공하는 길이 막힌다. 여진족 중에서 배를 잘 부리는 자들이 배를 몰아 바다로 나가면 여순(뤼순)이 위험해진다. 압록강을 끼고 있는 평안도를 잘 지키는 것이 명을 위해서도 가장 좋은 계책이다.”

 

 

키예프 시가전에 대비하는 우크라이나 병사들

 

일본은 쇠퇴하는 중국의 패권에 다시 도전했고, 미국은 일본의 뒤를 이어 분할전략을 완수하였다. 러일전쟁에서 일본 해군은 1904년 2월 인천항을 침공했고, 육군은 한성(서울)에서 출발해서 평양을 거쳐 압록강으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그해 5월 서북단의 용암포에서 러시아군을 격퇴하고 만주로 북진해서 봉천(선양)으로 진입하는 문을 열었다. 만주와 서북부의 연결로는 1900년대의 일본과 1950년의 중국이 진입했던 동일한 공간-전략적 교두보였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은 세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제1방면은 압록강을 건너 랴오닝반도로 진공하고, 제2방면은 보하이만을 통해서 뤼순과 웨이하이를 공략하고, 제3방면은 청 왕조의 요람이었던 선양으로 직진하였다. 평양~압록강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서북의 육로와 주변 해로는 히데요시가 요구했던 정명가도의 핵심적 경로였다는 점에서 그의 후예들이 숙원을 푼 셈이다.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에 포츠머드조약에서 제정 러시아로부터 북위 50도 이남 사할린을 양도 받았다. 쿠릴열도에 대해서는 북위 48도 이남의 섬들을 차지하고자 했고, 한반도에서는 북위 40도 이남을 차지하고자 했다. 일본을 대체한 미국은 한반도의 북위 38도 이남, 베트남의 북위 17도 이남에 자국에 우호적인 동맹국을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두 번 허용하지 않았다. 보하이만(발해만)을 사이에 둔 평안북도와 요동반도의 향배는 만주의 세력판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쳐 왔다.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인민군이 패배하고 서북부가 적대적 정부에게 넘어가면 압록강을 따라 대치선이 형성되고, 요동반도와 산둥반도에 새로운 군사적 압력이 고조될 것을 우려하였다.

 

중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민해방군 소속 제4야전군을 파병했다. 이 부대는 선양군구의 전신이었고, 조선인들이 주축이 된 일종의 외인부대였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미군과 UN군이 평양을 거쳐 압록강까지 북진하자 중국 인민지원군은 10월 19일 압록강을 건너서 산악지대로 이동하여 치명적 반격을 준비하였다.

 

마오쩌둥은 해공군력이 미비한 조건에서 중국에게 유리하게 전쟁의 시기·장소·방식을 결정하는 것이 핵심적 관건이라고 생각하였다. 중국군은 구식화기로 무장했지만 겨울·산간지대·유격전을 미군에게 강요하였다. 지금은 북부전구로 편입된 선양군구는 조선과 혈맹관계를 맺은 역사적 실체로서 외부에서 ‘은둔자’로 평가하던 김정일 위원장이 말년에 열 차례 이상 방문할 정도로 친연성(affinity)을 유지하고 있다.

 

랴오닝과 서북지역, 선양군구 인민해방군과 서북지역 인민군의 관계는 ‘일련탁생’(sharing the fate of another)에 비유된다. 2017년 조선의 대중국 교역 의존도는 94.8%에 달했는데, 랴오닝성이 수출의 44.4%와 수입의 51.3%를 차지하였다(정수진·최영윤, 북한 대중국 교역의존도의 국제비교, KDI 북한경제리뷰, 2020. 4).

 

선양군구는 인민해방군의 7대 군구의 하나로 동북3성(랴오닝군구, 지린군구, 헤이룽장군구)과 내몽골 동부의 동사맹 지역과 여대경비구를 관할해 오다가 베이징군구를 포함하는 북부군구로 확대재편되었다. 유사시에 북부전구의 선봉부대는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 서북부에 진입할 수 있다. 평소의 훈련도 한반도 전역을 상정하고 있다. 특히 기계화여단을 주축으로 구성된 제39집단군의 전차부대를 중심으로 기동전을 준비하고 있다.

 

 

키예프를 압박하는 러시아의 공습

 

 

평화? : 힘에 기초하지 못한 정치적 이상의 비참한 종말

 

국제관계에 있어서 과거의 자유주의자들과 이상주의자들은 타국에 대한 힘의 행사를 도덕의 거부로 받아들였지만, 현실주의자 스파이크만(Nicholas J. Spykman)은 힘에 기초하지 못한 정치적 이상이나 비전은 생명력 없는 가치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Spykman, The Geography of the Peace).

 

스파이크만은 왕조와 정부가 바뀌어도 지속된 수많은 투쟁들은 지리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허약한 완충국가의 운명은 기껏해야 위태로울 뿐이라고 경고하였다. 그가 죽은 지 1년만에 일본제국의 일부로 간주된 한반도는 연합국에 의해 분할점령을 당하고 ‘두 개의 코리아’(Two Koreas)의 운명선이 그어졌다.

 

스파이크만이 제시한 림랜드(Rimland)는 하트랜드(Heartland)를 둘러싼 다양한 지형의 거대한 벨트로서 해안에 인접한 광범한 지대들이 서로 연결된 것을 말하는데, 그는 “림랜드를 지배하는 자가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유라시아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주장하였다.

 

유럽 변방의 우크라이나는 지정학적으로 러시아의 강대국화와 연관된 림랜드에 해당한다. 동북아에서 만주가 하트랜드라면 한반도는 만주로 이어지는 림랜드이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가 완전히 상대편에 속하는 것을 저지하려는 지정학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한반도 국가가 우크라이나, 폴란드의 비극을 잘 들여다 봐야 하는 이유다.

 

 

우크라이나의 모델 하루리아(Harulia) 등이 파리 소재 러시아대사관 앞에서 전쟁중지를 호소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스타일리스트 구트니크(Gutnyk)도 "지금 프라다쇼를 할 때가 아니다. 그런 건 모두 개수작"이라면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amp;amp;nbsp;&amp;amp;nbsp;

 

 

<우크라이나 지명 표기 변경>(주한 우크라이나대사 요청) : 국립국어원은 '크이우'를 '키이우'로 표기 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