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안드로포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Ⅲ) KAL 007편 격추사건

twinkoreas studycamp 2021. 6. 21. 14:00

 

 

김태항(정치학 박사)

 

 

유리 블라지미라비취 안드로뽀프(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Андропов) 2

 

 

KAL 007편 격추사건

 

(1983년 타임지)

 

안드로뽀프 시기의 소련은 그야말로 사면초가 상황이었다. 안드로뽀프보다 나이가 세 살 많지만, 훨씬 건강하고 정력적인 레이건(R. W. Reagan)이 소련을 악의 제국(Evil Empire)’으로 규정하면서 전방위적으로 압박하고 있었다.

 

더욱이 소련 경제를 겨우 지탱해주었던 유가가 급락을 하자 성장률은 급강하했고, 아프가니스탄은 유혈사태의 장기화로 돈 먹는 하마가 됐으며, 무엇보다도 소련 지도부를 패닉 상태에 빠지게 만든 것은, 이른바 스타워즈(Starwars) 계획으로도 불리는 레이건의 전략방위구상(SDI)이었다.

 

우주 공간에서 레이저 탑재 인공위성 등을 이용해 소련의 모든 미사일을 요격하겠다는, 당시로서는 황당무계한, 배우 출신 레이건의 일종의 사기성 발언이었지만, 소련 지도부는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듯 총체적 공황 상태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소련은 또 다른 결정타 한 방을 맞게 되는데, 소련 방공군 소속 전투기가 민간 항공기를 격추한 것이다.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이 민항기는 198391, 뉴욕 JFK 국제공항을 이륙, 앵커리지를 경유하여 김포공항으로 들어오려던 KAL 007편이었는데, 소련 상공에서 수호이(Su-15TM) 요격기가 발사한 공대공 미사일을 맞고 격추된 것이다.

 

피격된 비행기는 보잉 747 점보 제트기였는데, 246명의 승객과 승무원 23명 등 총 269명이 탑승했고, 전원 사망했다.

 

KAL 007편이 지나간 캄촤뜨까(Камчатка) 반도에서 사할린에 이르는 영역은 그야말로 미·소 양국 간 첩보전이 불꽃을 튀던 냉전의 최전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AL 007편은 기존 항로를 500km 가까이 벗어나서 소련의 방공망이 밀집돼있는 캄촤뜨까 반도를 가로질러 소련 영공을 두 시간 가까이 비행한 것이다.

 

이후 사할린 상공에서 소련 영공을 벗어나려고 하던 시점에 격추되는데,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간에 사할린 소련 국경 부근에서 보잉 707 여객기를 개조한 미국의 RC-135 정찰기가 첩보 활동을 하다가 빠져나갔다.

 

(위키백과)

 

이 사건은 수많은 가설과 억측, 유언비어를 양산했다. 그러나 현재까지 확인된 바에 따르면, KAL 007편의 기장은 최고의 베테랑 엘리트 기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인데, 이상하게도 앵커리지 이륙 시에는 자동 관성항법장치(INS)에 의한 계기비행을 했지만, 얼마 안 가서 나침반과 육안에 의존하는 시계비행(視界飛行)으로 변경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민항기를 격추한 수호이 15 요격기의 조종사인 겐나지 오시포비치가 소속된 비행단의 당직 장교는 당일 미군 정찰기로 의심되는 비행기(KAL 007)의 이례적일 정도로 멍청한 비행에 놀랐다고 한다.

 

그가 볼 때, 저런 행위는 첩보 비행이 아니라 자살 비행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국의 비행기가 아닌가 의심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방공군은 비무장 민항기에 미사일을 발사했다.

 

사실 KAL 007편 격추 사건은 미국의 레이건 정권에 정치적 잭팟(Jackpot)을 터뜨려주었다. 미국의 방공망은 KAL기의 항로 이탈을 알고 있었고, 소련군의 교신 내용도 모두 감청하고 있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레이건은 의회의 반대로 골치가 아팠던 군사비 증액 문제를 포함하여, 역시 배치 반대에 직면해있던 서독과 영국에, 중거리 핵미사일을 예정대로 배치할 수 있었다. 앓던 이를 소련이 빼준 격이었다.

 

또 다른 수확은 레이건 본인의 재선 가도에 청신호를 준 것이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레이건은 TV 화면에서 영화배우 출신답게 아주 진지하고도 설득력 있는 표정과 화술로 소련을 비난했다.

 

, 소련을 비무장 여객기의 민간인을 학살(Korean Airline Massacre)한 야만적인 국가로 규정하면서, 이전에 언급한 악의 제국발언의 적실성을 재확인함과 동시에 자신의 인기를 끌어올렸다.

 

 

정치국 노인들의 대응

 

KAL 007편이 격추되자 소련 공산당 기관지인 쁘라브다(Правда)는 즉각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831일에서 91일 사이 심야에 캄촤뜨까 반도의 소련 영공으로 비행기 한 대가 침범해 들어와 사할린 상공까지 영공 침범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방공군 소속 요격기들이 출격하여 이 비행기가 가까운 공항으로 착륙하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 비행기는 아군기들의 경고신호를 무시하고 일본해 쪽으로 비행을 계속했다.”

 

이는 전형적인 두리뭉실 오리발 보도였다. 무엇보다도 비행기 격추 사실과 희생자에 대해서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착륙 유도 행위는 없었고, 일부 경고 사격은 있었으나, 그것도 예광탄이 아닌 일반탄이었다. 따라서 KAL 007편 조종사나 승무원들이 경고 사격의 불빛을 볼 수 없었다.

 

물론 정치국의 노인들은 사건 당일 모든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오리발 작전을 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글라쓰나스찌(Гласность; 공개, 개방) 정책이 한창이던 1991125, 이즈베스찌야(Известия) 신문은 KAL 007편이 소련 방공군의 미사일 두 발에 의해 격추된 사실, 그리고 이 비행기가 군용기인지 민간 여객기인지 구분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도했다.

 

이렇듯 정치국의 노인들은 민항기 격추 사실에 대해 일주일 가까이 침묵하다가, 결과적으로 엄청난 정치적 재앙을 초래하게 되었다.

 

모든 증거 자료를 파악하고 있던 미국이 긴급 소집된 UN 안보리 회의에서, 사할린 지상 관제소와 전투기 조종사 사이의 교신 내용을 공개한 것이다.

 

사건 발생 후 거의 한 달 가까이 침묵을 지키던 안드로뽀프는 928, 소련의 모든 방송 채널을 통해 성명서를 발표했는데, 사상 유례가 없는 가시 돋친 성명이었다.

 

그는 미국이 끊임없이 미증유의 군비경쟁을 지속하기 위해 KAL기를 가지고 선동을 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여론은 압도적으로 소련의 천인공노할 만행을 규탄하고 있었다.

 

 

 

아프카니스탄 침공-KAL 격추사건-체르노빌 원전폭발로 이어진 소비에트연방의 몰락 징후들

 

 

낡은 볼셰비키적 유산의 온존

 

알렉싼드르 쏠제니친은 거짓말이 소련이라는 국가를 떠받치는 기둥이라고 지적했다. 정치국의 노인들은 쏠제니친의 지적처럼 거짓말로 대응하다가 더욱 커다란 재앙에 직면하게 되었다.

 

오리발 가설을 과학적으로 포장해서 끝까지 밀고 나가려면, 지속적으로 모든 조작된 거짓들을 깔끔하게 감출 수 있어야 한다.

 

폭발 후 체르노빌 원전 모습(Stanford University)

 

유사한 사례로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사고 때도 마찬가지였다. 소비에트 연방 역사상 가장 개혁적이라는 고르바초프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사건 초기에는 침묵으로 일관하다가 방사성 물질을 감지한 서방세계의 지적에 의해 대재앙이 드러나게 되었다.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구태의연한 볼셰비키적 대응, 즉 엄격한 계급성과 모순된 논리, 시대착오적인 낡은 이데올로기, 다수에게 의지를 강요하는 무자비한 소수의 능력, 거짓말의 보편화 등으로 상징되는 볼셰비키적 처방으로, 민항기 격추 사건을 치료하려다가 참담한 실패를 맛보게 된 것이다.

 

안드로뽀프는 소련의 역대 서기장들 중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지도자 중의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 역시 결정적인 순간에 70년 가까이 지속된 편협한 볼셰비키적 교조주의라는 교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 안드로뽀프는 정치국에 공문을 보내 젊고 정력적인 고르바초프가 후임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러나 79세의 찌호노프 총리를 필두로 한 정치국의 늙은이들은 이를 거부했다. 찌호노프는 측근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고르바초프는 아직 젊어. 서기장이라는 중요한 자리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알 수가 없어. 꼬스쨔(체르녠까의 애칭)가 적임이야.”

 

결국 정치국의 노인들은 자신들의 안위를 유지하고, 자연사할 때까지 정치국원 철밥통을 유지하겠다는 불굴의 의지로, 혹시 개혁이라는 미명하에 자신들을 몰아낼 수도 있는 젊은 고르바초프보다는, 브레쥐네프의 아바타이자 어리바리하고 보수적이며, 과거지향적 인물인 체르녠까를 선택한 것이다.

 

마침내 예측 불가능한 불의의 사고를 제외하고,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찾아오는 운명이자, 피할 수 없는 최후가 안드로뽀프에게도 다가왔다.

 

그는 조지 오웰의 마지막 작품의 제목이자, 운명적인 해가 시작된다는 198429일 사망하는데, 사망 직전 며칠 동안은 의식을 차리지 못했다. 심장만이 겨우 뛰고 있었을 뿐이다.

 

안드로뽀프는 아내인 따찌야나 안드로뽀바(Татьяна Андропова)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우리는 이렇게도 연약한 존재이다.

생은 단지 찰나(刹那)일 뿐이며, ()는 영원하다.

지구는 돌고 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