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안드로포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Ⅲ) : 병상 정치

twinkoreas studycamp 2021. 6. 14. 16:34

 

 

김태항(정치학 박사)

 

유리 블라지미라비취 안드로뽀프(Юрий Владимирович Андропов) 1

 

 

안드로뽀프 서기장 장례식(funeralportal.ru)

 

 

끄레믈의 중환자들

 

18년간 끄레믈의 두목 자리를 지켰던 브레쥐네프는 19821110일 사망했고, 그의 계승자인 안드로뽀프는 198429일 사망함으로써, 정확히 15개월 동안 서기장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그는 서기장으로서의 직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

 

건강이 나빠 재임 전반기에는 일과 치료를 병행했고, 후반기 약 6개월 동안은 병상에 누워서 업무를 봤다. 이와 관련하여, 소비에트 연방의 역대 서기장들의 건강은 흐루쇼프와 고르바초프를 제외하고는 좋지 않았다.

 

소련을 기획하고 건설한 레닌은 말년에 여러 차례 뇌경색과 뇌졸중으로 쓰러져 식물인간이 되었다가 사망했다. 스딸린은 강철이라는 자신의 이름과는 다르게 이미 1930년대부터 병든 닭 신세였으며, 브레쥐네프와 안드로뽀프는 반쯤은 살아있는 상태로 집권 후반기를 보냈다.

 

그리고 안드로뽀프의 후임으로 등장한 체르녠까는 서기장에 취임하기 전부터 이미 살아있는 시체였고, 많은 사람들이 예상한 대로 역대 서기장 중 가장 짧은 13개월 동안 자리를 지켰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머지 두 명의 건강한 서기장들의 운명은 가혹했다. 개혁의 물꼬를 튼 흐루쇼프는 재임 중 축출되었고, 그의 정치적 키드(kid)이자 역대 가장 젊고 건강한 서기장이었던 고르바초프는, 레닌이 개업한 소비에트 연방을 폐업하게 되는 주인공이 되었다.

 

 

노인정치 시대의 본격화

 

브레쥐네프 시기의 국정 기조이자 트레이드 마크인 안정에 대해, 심한 불안정과 답답함을 느낀 소련 인민들은 마침내 그가 죽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새로운 변혁의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의 노인들은 생각이 달랐다.

 

그들은 퇴락하는 국가보다는 서기장 자리라는 잿밥에만 관심이 컸다. 특히 체르녠까와 안드로뽀프가 선두주자였는데, 두 사람의 공통점은 나이가 많다는 것과 건강이 아주 나쁘다는 것이었다.

 

단명에 그친 서기장 안드로뽀프(iz.ru)

 

그나마 세 살 젊은 안드로뽀프(69)72세의 체르녠까보다 좀 더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안드로뽀프의 절친이자 국방장관인 우스찌노프가 그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군부의 수장과 비밀경찰이라는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쥐고 있던 까게베(KGB) 의장 간의 막강한 조합은, 정치국 노인들로 하여금 머리를 굴릴 필요가 없게 만들었다.

 

브레쥐네프의 복심이자, 핵심 측근인 체르녠까는 당과 정부의 관료들과 정치국 일부 노인들의 지지를 받았으나, 우스찌노프의 방문을 받은 후 서기장 자리를 단념하게 된다. 우스찌노프가 직접 체르녠까를 찾아가 자신은 안드로뽀프를 지지한다고 밝힌 것이다.

 

눈칫밥의 달인인 체르녠까에게는 협박성 발언으로 들렸을 것이다. 패배를 직감한 그는, 우스찌노프에게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권력 승계는 별다른 잡음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개혁적 지성인

 

안드로뽀프는 정규 대학을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지적 수준이나 능력, 교양에 있어서 정치국의 다른 동료들보다 월등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방면의 교육을 받았고, 젠틀했으며, 사람을 끄는 매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영어, 독일어, 핀란드어 등 외국어에도 능통했고, 역대 서기장들과는 다르게 훤칠한 키를 자랑하고 있었다.

 

 

수슬로프(왼쪽)와 브레쥐네프

 

1982125, 스딸린 시대 때부터 소련 공산당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이자 차가운 막후 실력자이며, 브레쥐네프의 후계자로도 불렸던 미하일 수슬로프(Михаил Андреевич Суслов)81세를 일기로 사망했을 때, 안드로뽀프가 즉각 그의 자리를 계승했듯이 안드로뽀프는 비범한 두뇌와 정치적 자질을 갖춘 인물이었다.

 

더욱이 그는 겸손하고 청렴했으며, 똑똑하고 재능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측근으로 두었다. 그의 사실상의 후계자였던 고르바초프도 그중의 하나였다. 60년대에는 사람들이 그를 개혁적인 지성인이라고 불렀다.

 

다른 한편, 까게베 의장을 오랜 기간 재임하면서 드러난, 냉철한 권력욕의 소유자로 평가를 받기도 하는 안드로뽀프는, 권력의 정점에 오르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고, 마침내 목적을 이루게 되지만, 70이 다 된 나이에 정상에 오른 그가 할 수 있는 일과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미 그의 육체는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교조주의적 볼셰비키

 

지금의 스따브로뽈 

 

유리 안드로뽀프는 1914년 제정 러시아의 남부에 위치한 스따브로뽈(Ставрополь)에서 태어났다. 그가 아낀 고르바초프도 스따브로뽈 출신이다. 안드로뽀프는 두 살 때 부친이, 열일곱 살 때는 모친이 사망했다. 그는 이미 일곱 살 때부터 온갖 잡다한 일을 하기 시작했다.

 

1936년 리빈스크 해양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선원, 조타수, 선장의 조수 등으로 일했다. 이후 그는 삐뜨라자보츠크(Петрозаводск) 대학교에 입학을 하지만, 중도에 학업을 포기한다. 그는 훗날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의 고급 당간부 학교를 수료했다.

 

안드로뽀프는 1954년에서 1957년까지 헝가리 대사로 근무했는데, 이때가 그의 세계관에 영향을 미친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교조주의적 볼셰비키였던 그에게 헝가리의 민중봉기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헝가리 대사로서 소련의 무력 개입을 촉구한 것도 그였고, 친밀한 관계였던 임레 나지(Imre Nagy) 수상을 유인하여 죽게 만든 것도 그였다.

 

당시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점령하자, 나지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는데, 신변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그를 투항하게 만든 게 안드로뽀프였다. 나지는 루마니아로 압송된 뒤, 소련의 날조된 재판에 의해 1년 뒤 처형되었다.

 

이후 그는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중견 간부를 거쳐 1967년 까게베 의장에 취임하는데, 무려 15년간 재임을 하게 된다. 금욕적이고도 은밀한 생활과 함께, 그는 조직 내에서 무게감 있는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당 내에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수많은 고급 정보를 확보하고 장악한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병상 정치

 

안드로뽀프가 권력의 정점에 올랐을 때는 이미 그의 나이 69세였다. 브레쥐네프에게 염증을 느낀 소련 인민들은 그에게서 희망의 빛을 보았다. 당시의 소련 인민들은 두 가지 측면에서 안드로뽀프에게 기대를 하고 있었다.

 

첫째, 부패가 창궐한 시대에 안드로뽀프는 정직한 인물로 비쳐지고 있었다. 그는 브레쥐네프와 그의 일당들과는 달리, 자녀들이나 친인척들의 비리에 대한 소문이 전혀 없었다.

 

둘째, 전통적으로 러시아인들은 답답함을 느끼는 시대에는 강력한 지도자의 출현을 갈망하는 경향이 있다. 까게베 의장 출신인 안드로뽀프는 이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기 때문에 소련 인민들의 기대를 받았던 것이다.

 

그는 소련 사회의 만연한 부패와 전반적인 퇴락 상황을 누구보다도 깊숙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이른바 부패와의 전쟁에 돌입하여, 자신의 동료들과 브레쥐네프의 친인척까지도 법정에 세웠다.

 

셸로코프(위키피디아)

 

안드로뽀프가 손을 본 대표적인 인물은 브레쥐네프의 측근이자, 당시 막강한 권한을 쥐고 있었던 내무장관 셸로코프(Николай Анисимович Щелоков)였다. 그러나 셸로코프는 법정의 결정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죽음의 길을 택했다.

 

안드로뽀프의 부패와의 전쟁’, ‘질서 강화’, ‘규율 확립등에 대한 선언은 그에게 권위와 인기를 가져다주었지만, 결과는 미미했다. 흐루쇼프가 중앙과 지방의 당 조직에 손을 댔다가 축출되었듯이, 소련 사회와 조직은 이미 손을 대기가 어려울 정도로 구석구석 촘촘하게 암세포가 퍼져있었다. 노멘끌라뚜라의 생존을 위한 공범 의식에 따라 소위 그레샴의 법칙(Gresham's law)’이 견고하게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소련 사회의 상층부는 마피아 조직과 다를 바가 없었다. 더욱이 흐루쇼프의 경우 건강이라도 양호했지만, 안드로뽀프는 중환자였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철저한 기회주의와 생존의 달인들을 겨냥하여, 병상에 누워있는 해골 같은 서기장이 군기를 잡는다는 것은, 마치 계란으로 바위를 부수겠다는 격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들의 오래된 희망사항 중의 하나는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볼셰비키주의자들을 사회의 상층부에 대거 포진시키면, 사회가 변한다고 착각한 것이었다. 스딸린은 이러한 명분 하에 대학살을 감행했지만, 결과는 소련 사회의 전반적인 낙후와 퇴보였다.

 

스딸린은 유토피아를 창출하기 위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 등장하는 개들(비밀경찰)을 잔뜩 풀어 쓸만한 동물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흐루쇼프는 이러한 암울한 분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나름의 개혁을 추진했지만, 입으로만 사회주의 운운하는, 사실상의 천민자본주의적 돼지들(2세대 볼셰비키)에 의해 축출당했고, 결과적으로 스딸린의 아류이자 아주 무능한 브레쥐네프가 그나마 얼마 안 남은 개혁의 씨를 말리기 위해 확인사살을 한 것이었다.

 

 

드미트리 우스찌노프(왼쪽)와 브레쥐네프(위키피디아)

 

안드로뽀프는 198391일 회의를 마지막으로, 이후로는 정치국 회의에 아예 참석하지 못했다. 휴양지 병원에 누워서 이른바 병상 정치를 했던 것이다.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우스찌노프(77), 그로미코(76), 찌호노프(79), 체르녠까(74), 그리쉰(71) 등 정치국 노인들과 병원에서 협의를 했다.

 

평소에 병원에는 주로 체르녠까가 찾아왔는데, 그 역시 폐기종으로 호흡곤란을 앓고 있는 중환자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서기장에게 겨우 내밀어 검토를 받곤 했다. 안드로뽀프 역시 피골이 상접한, 거의 해골 같은 모습으로 서류를 검토했다.

 

체르녠까는 당료 출신으로서 최고위직에 오른 인물답게 당료들을 챙기는 데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안드로뽀프는 당료들의 배타적인 특권과 무사안일을 없애기 위해 전쟁을 벌이려 했으나, 항상 숨을 헐떡거리면서, 꾸부정한 자세로 겨우 걸어 다니는 체르녠까에게조차 그는 대항할 힘이 없었다.

 

건강 문제와 더불어, 안드로뽀프의 결정적인 약점은 경제정책 프로그램이 없다는 것이었다. 소련 경제는 유가 폭락과 함께 경화(hard currency)가 부족했고, 모스크바 시민들조차 상점 앞에서 길게 줄을 서야만 했다.

 

더욱이 부패와의 전쟁’, ‘질서 확립등을 위해 그가 주로 한 일은 대낮에 각종 작업장, 미장원, 사우나, 상점 등 사람들이 모일만한 곳에 시민 자치대와 같은 감시원들을 풀어 빈둥거리는 사람들을 색출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감시 방식은 일시적으로 인민들의 인기를 얻는 요인이 되었으나, 빈둥거리는 사람들을 색출함으로써 쇠락하는 소련 경제를 살릴 수는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