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브레즈네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Ⅱ) : 노인정치 시대

twinkoreas studycamp 2021. 6. 7. 20:08

 

 

김태항(정치학 박사)

 

 

레오니트 일리취 브레쥐네프(Л. И. Брежнев, 1964~1982 재임) 6

 

사냥광이었던 브레쥐네프(bashny.net). 정도 차이는 있지만 레닌, 스탈린 등도 사냥을 즐겼다.

 

 

 

게란따 끄라찌야(геронтократия ; 노인정치)

 

폴란드 출신의 소련 전문가인 리처드 파이프스(Richard Pipes) 전 하버드대 교수는, 브레쥐네프가 집권 말년에 노인성 치매 증상을 뚜렷이 보였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브레쥐네프의 건강 문제는 1971년부터 시작된 고질적인 문제였고, 1974년 몇 차례의 뇌출혈에 이어, 1976년부터는 이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육체와 정신이 골고루 망가진 상황이었다. 이로부터 6년간 소련이라는 거대한 국가를 거의 반쯤은 죽어있는 사람이 통치한 것이다.

 

물론 브레쥐네프의 늙은 동료들인 안드로뽀프, 우스찌노프, 그로미코 등 끄레믈의 알리가르히(олигархи ; oligarch)들이 사실상 통치를 해왔으며, 브레쥐네프 말년에는 체르녠까가 정치국 회의를 주재하기도 했다. 불가피하게 브레쥐네프가 직접 외국 정상들이나 주요 인사들을 접견할 때는 사전에 미리 준비된, 그것도 분량이 아주 적은 한정된 내용의 말씀 자료를 읽어야만 했다.

 

브레쥐네프 체제에 이르러 이른바 노인정치(геронтократия; gerontocracy) 시대가 본격 개막되었다. 스딸린이 사망할 당시 정치국원들의 평균 연령은 55세였다. 물론 스딸린의 경우 1세대 고참 볼셰비키들의 씨를 거의 말렸기 때문에, 구성원들이 상대적으로 젊었을 수도 있다.

 

흐루쇼프 때는 평균 연령이 61세였고, 브레쥐네프 시기인 1980년에는 70세였다. 이 당시 소련 남성의 기대수명은 62세였는데, 서기국의 평균 연령은 67세였고, 정부 부처의 주요 관리자들의 평균 연령은 68세였다. 당이건 정부 부처이건 간에, 50세 이하의 사람들은 거의 보이지가 않았다.

 

 

브레쥐네프 18년 이후에 서기장으로 등장한 안드로뽀프(2년), 체르녠카(1년)는 잇달아 급사하였다.

 

 

 

체제 몰락의 아이콘

 

브레쥐네프가 서기장으로서 유일하게 열심히, 끝까지 매진한 일은 사냥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말년에 가서는 총을 들 힘조차 부족해서, 경호원들이 대신 사격을 해야만 했다. 사냥터에 동행한 전문 민간인 사냥꾼에게, 장군이라는 직함과 함께 공훈 훈장을 수여할 정도로 브레쥐네프는 사냥 중독자였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브레쥐네프 집권 후반기는 이런 식으로 굴러갔다. 끄레믈 집무실보다는 주로 사냥터에 출근하는 병든 지도자 아래서, 국가가 쇠락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모스크바로부터 약 140km 떨어진, 자비도바(завидово) 사냥터 부근의 호화로운 다촤(별장)에서 있었던 에피소드인데, 각료 한 사람이 브레쥐네프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서기장 동지! 지금 우리 인민들은 대단히 적은 봉급으로 인하여, 엄청난 삶의 고통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즉각 브레쥐네프가 대답했다.

 

“당신은 실체를 잘 모르는군요, 이 나라 어느 누구도 봉급만으로 살지 않아요. 내가 어렸을 때의 경험이 문득 떠오르는군요. 나는 열차의 화물을 운반하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만약에 상자 세 개를 운반할 때, 이 세 개를 모두 운반했겠습니까? 그중의 하나는 집으로 가져갔습니다. 우리나라 인민들은 모두가 이렇게 알아서들 먹고살고 있습니다.”

 

국가의 지도자가 이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리 놀랄 필요는 없다. 이미 그 당시 관료들의 뇌물수수는 극히 정상적인 관행이자, 자기들끼리만의 서로 돕고 사는 미풍양속이었던 것이다.

 

명색이 인민의 낙원이라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인민들은 사실상의 노예와도 같은 생활을 하고 있는데, 중앙이건, 지방이건, 당과 정부의 관료(노멘끌라뚜라)들은 봉건시대의 영주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브레쥐네프는 자신의 통치 철학을 ‘간부에 대한 신뢰’라는 말로 함축했다. 이 말은 특권 지배계층(노멘끌라뚜라)의 강화와 영속화를 의미한다. 이에 따르면 국가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누어져야 했다. 이와 관련하여, 브레쥐네프는 1968년 체코의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인 두브첵(Alexander Dubček)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에게 사회주의에 대해 말하지 마시오. 우리는 우리가 얻은 것을 지킬 뿐이오.”

 

인민들 역시 브레쥐네프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재산을 훔치는데, 아무런 도덕적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 당시 소련 사회에는 “당신이 정부의 것을 훔치지 않으면, 당신 가족의 것을 훔치게 된다.”라는 금언(金言)이 널리 회자되고 있었다.

 

역시 잘 알려진 또 다른 농담은 더욱 노골적이다.

 

이반(Иван)이 싸샤(Саша)에게 말했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부자라고 생각해.”

 

싸샤가 “왜?”라고 묻자,

 

“거의 60년 동안 모든 사람이 국가로부터 물건을 훔쳤는데, 아직도 훔칠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지.”

 

무엇보다도 악순환의 핵심은 서기장의 무위도식과 무능에 대해 어느 누구도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의 도래를 목전에 둔, 발전된 사회주의 국가의 관료들이 자신들의 개인적인 안위와 안락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을 뿐, 국가나 인민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70년대 중반부터 브레쥐네프는 당의 사업이나 국가적인 업무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날마다 TV 화면에 자신의 모습이 등장하기를 원하는 허영심은 더욱 커졌다.

 

이미 1968년도가 시작되면서, 흐루쇼프가 주도한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전당대회의 개혁 프로그램은 완전한 종말을 맞게 되었다. 스딸린을 범죄자로 규정했던 분위기도 사라졌고, ‘전 인민의 아버지’라는 단어가 슬그머니 재등장했으며, 이데올로기, 문화, 예술, 사회과학 분야에 대한 통제가 다시 강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과 정부의 각 부처에는 교양이 없고 무능력한, 출세지향적인 관료들만이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전체주의적 분위기, 선전 선동에의 몰두, 미리 규정된 이야기만 해야 하는 상황 등 전반적으로 체제가 경직되고 있었다. 경제적 실상과 실제적인 사회 분위기에 대한 언급은, 이중적인 정치문화에 의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대신에 안정, 성공적 발전, 사회적 진보라는 뜬구름 잡는 환상적 구호만이 기계적으로 생산되고 있었다. 결국 소련사회는 총체적 붕괴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수용소군도의 쏠제니찐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 군도’ 등의 저자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알렉싼드르 쏠제니찐(А. И. Солженицын)은 소비에트 정권이 제정 러시아 독재 체제의 연장이라는 주장에 대해 벼락같이 화를 내며 부인했다. 즉 짜리(Царь) 체제를 소련과 비교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짜리는 종종 백성의 삶을 향상시키려고 진심으로 노력했다는 것이다.

 

오랜 기간 인민들로부터 조롱을 받고, 무수한 일화나 우스개 소리가 널리 회자되도록 스스로 밑밥을 뿌려준 브레쥐네프는, 체제 몰락의 예언자이자 마스코트가 되었다.

 

1985년에 서기장이 되는 고르바초프가 결과적으로 소련 붕괴의 덤터기를 쓰지만, 실제로 소련이 몰락하는 데 중층적(重層的)인 역할을 한 사람은 브레쥐네프였다. 리처드 파이프스의 지적처럼 치매에 걸린 지도자가 국가를 운영하는 데, 망하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비정상적일 것이다.

 

자비도바

 

이데올로기와 현실의 모순이 극대화된 사회

 

소련이 처한 모든 문제의 기저에는 조작된 수치에 근거를 둔 각종 통계자료들과, 자본주의 체제의 관료들보다 훨씬 더 자본주의적 마사지에 길들여진, 천민자본주의화된 노멘끌라뚜라들이 있었다.

 

이들은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단절되어 있었고, 자기네들끼리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머리가 나빠도 최상의 고등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졌다. 더욱이 새로운 지배계층은 세습적인 시스템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브레쥐네프 시기는 스딸린 시기를 거치면서 완전한 계층사회를 이루었고, 온갖 권모술수, 거짓말, 사기, 뇌물, 절도 등 모든 부문에서 부패가 제도화된 체제였다.

 

일례로 볼셰비키 혁명 전 러시아는 세계적인 농산물 수출국가였는데, 브레쥐네프 시대에 들어서는 세계 최대의 농산물 수입국이 된 것이다. 만성적인 식료품 부족 현상 때문에 인민들은 항상 국영 마가진(상점) 앞에서 오랜 시간 줄을 서야 했고,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내내 육류와 계란은 모스크바에서도 노멘끌라뚜라 전용 상점을 제외하고는 냄새조차 맡기도 쉽지 않았다.

 

상황 악화의 주범은 타성에 젖은 관료들뿐만 아니라, 원시적이고도 부패한 수직적 유통체계에도 있었다. 상당량의 농산물이 창고나 철로 주변에서 썩어가거나 쥐들의 만찬 음식이 되었던 것이다.

 

브레쥐네프는 “미래는 공산주의에 달려있다”라고 선언했지만, 바로 그 순간에 그의 동료들인 정치국의 노인들은 빵과 고기, 그리고 각종 기술과 완제품 등을 수입하기 위해 수십 톤의 금과 엄청난 규모의 석유, 가스, 목재를 팔아 달러를 확보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세계 2위의 선진국이라는 소련이 천연자원 등의 원료를 주로 수출하는, 이른바 ‘식민지적’ 무역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브레쥐네프의 정치국은 인민들을 먹이고, 입히고, 살릴 능력이 없었다. 이데올로기는 비현실적이고 식상한 목표만을 떠벌렸고, 인민들은 개인적이고 물질적인 부분에 집중하였다. 국가는 무신론을 선포하였으나, 인민들의 종교적 믿음은 물밑에서 확산되고 있었다. 국가는 문화적 획일성을 강요했으나, 다양한 차원의 생동감 있는 문학과 예술이 지하 세계에서, 마치 전염병처럼 창궐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유토피아의 실현은 불가능한 일이었으며, 다만 인민들에게 유토피아를 향한 주술을 기계적으로 거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실제로 브레쥐네프 역시 공산주의 유토피아라는 미래를 믿지 않았다. 다음과 같은 브레쥐네프의 발언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공산주의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인민을 상대로 한 과장된 이야기에 불과해. 결국 인민들에게 뭔가 믿을만한 것을 줘야 하는데, 정교회 교회를 파괴하고, 짜리를 처형했으니, 무언가 대체할 것이 필요했던 것이지. 그래서 인민들에게 공산주의를 이룩하자고 한 것이야.”

 

 

브레쥐네프의 사망에 안도하는 인민들

 

스딸린이 사망했을 때는 장례식 과정에서 수백 명이 압사당하는 참사가 벌어질 정도로 애도하는 인민들이 많았는데, 브레쥐네프가 사망하자 인민들은 애도보다는 안도하는 분위기였다.

 

역대 장례식 중 가장 성대하고 화려했으나, 소련 공산당과 정부의 고위층이건, 대다수 일반 인민들이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냥 어깨를 으쓱했을 뿐이다.

 

서기장의 사망을 슬퍼한 사람들은, 정확히 말해서 아쉬워했던 사람들은 군수산업 지도자들이었다. 그들은 우스찌노프 국방장관과 함께 소련의 군수산업을 성장시키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국방력의 성장과는 반대로, 국가는 빈사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레쥐네프 시대는 스딸린 통치기의 상시적인 공포와 지속적인 가난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었던 시기였다. 고르바초프와 옐찐 시기의 혼란을 경험한 나이 든 세대는, 이러한 브레쥐네프 시대를 황금기로 기억하고 있다.

 

브레쥐네프 장례 기간에 사람들은 별다른 슬픔이나 우울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소련 인민들의 의식 속에서는 변화에 대한 열망이 자라나고 있었다. 후임으로 까게베(KGB) 의장 출신의 유리 안드로뽀프가 새로운 서기장으로 등장하자, 소련 사회에는 희망의 산들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