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브레즈네프

끄레믈의 서기장들(Ⅱ) : 덫에 걸린 시베리아 불곰

twinkoreas studycamp 2021. 5. 17. 20:14

 

 

 

 

레오니트 일리취 브레쥐네프(Л. И. Брежнев, 1964~1982 재임) 3

 

김태항(정치학 박사)

 

 

 

'The First Stinger Missile' 아프카니스탄 침공의 마지막 두 해 동안 350여대의 항공기와 헬기가 스팅어 미사일 등에 의해서 격추되었다. 소연방(Soviet Union)은 10년 동안 60만명을 투입하여 1만5천여명이 사망하고 400여명이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다.(wikipedia)

 

 

 

 

 

레닌주의자(Leninist)들을 압도한 레넌주의자(Lennonist)

 

‘프라하의 봄’이 소련제 탱크에 의해 뭉개져 ‘프라하의 겨울’로 변했지만, 엄혹한 한파 속에서도 꽃은 피어나고 있었다. ‘프라하의 봄’이 짓밟히던 그즈음에 조직된, 체코의 언더그라운드 락 밴드인 ‘Plastic People of the Universe’의 에피소드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은 경찰을 피해 다니며 몰래 게릴라식 연주를 하다가, 결국 1976년에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 밴드에 대한 터무니없는 재판은 수백 명의 지식인들을 자극했고, 이들은 1977년 1월 1일 공개된, 이른바 ‘77 헌장’ 선언문에 서명하게 된다.

 

 

Plastic People of the Universe (straysatellite.com)

 

 

체코의 반체제 인권 운동의 상징인 ‘77 헌장’을 통해, 체코 지식인들은 자율성을 위한 운동에서 권력에 대한 도전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 헌장의 첫 대변인이자 철학자인 얀 빠또츠카(Jan Patočka)는 8시간에 걸친 경찰의 심문을 받은 후 사망했는데, 빠또츠카의 사망 이후,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이 체코의 정신적 저항의 지주가 되었다.

 

선언문에서 이들은 브레쥐네프가 서명한 헬싱키 협정¹의 마지막 조항, 즉 ‘표현의 자유’를 준수해 줄 것을, 체코 정부에 정중히 요구했으나, 정부의 답변은 지식인들에 대한 체포였다. 그중 한 사람이 극작가이자 락 뮤직 애호가이며,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는 하벨이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4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하벨은 공산주의 비판과 관련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가 되었다. 비틀스(The Beatles)를 좋아했던 하벨은 당시에 레닌주의자(Leninist)가 아니라, 레넌주의자(Lennonist)로 불렸다. 이후 1997년 ‘77 헌장’ 20주년을 맞이하여, 하벨의 제안으로 밴드 ‘Plastic People of the Universe’는 재결성되었다.

 

빠또츠카( Jan Patočka)는 훗설(E. Husser)과 하이데거(M. Heidegger)의 마지막 문하생이었다.(ceskatelevize.cz)

 

 

 

 

 

브레쥐네프 시대의 혁신적인 고문방법

 

브레쥐네프 시기,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탄압은 총살이 기본이었던 스딸린 시대와는 좀 달랐다. 1967년 까게베(KGB) 의장에 등극한 안드로뽀프는 반체제 인사들에 대해 ‘정신요법’이라는 혁신적이고도 창조적인 치료법을 도입했다. 이 새로운 제도에 따라 까게베는 정상적인 재판과 관계없이, 설령 증거가 없더라도 사회 안전을 위한 예방 차원에서, 선제적으로 ‘정신병’이 있어 보이는 시민들을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할 수 있었다.

 

총살 아니면 굴라크(수용소)라는, 단순한 스딸린 시대에 비하면, 상당히 업그레이드된 방법인데, 병원에서 사람들은 장기간 약물 ‘치료’를 받았다. 실제로 지속적인 약물 투여는, 뼈를 으스러뜨리면서 살점이 튀고, 유혈이 낭자했던 과거의 낡은 고문 방식보다 훨씬 능률적이었으며, 고문하는 까게베 직원들도 힘이 덜 들었다. 물론 치료 비용은 발전된 사회주의 국가가 전액 부담했다.

 

‘환자’들이 진단받은 질병 목록을 보면, “도덕관념이 강한 척한다”, “사회개혁에 관한 편집광적인 환상에 빠져있다”, “자신의 인격을 과대평가하고 있다”, “현실인식이 빈곤하다” 등의 다분히 추상적이며 막연한 죄목이었다. 까게베는 사회정화 차원에서, 이러한 ‘정신이상자’들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시킨 후, 각종 약물을 투입하여 이들을 살아있는 시체로 만들었다.

 

‘정신이상자’들이 진단받은 질병 목록 중에서 가장 해괴한 질병은 ‘진실 추구 강박증’이었다. 일례로, 붉은 광장(красная площадь; 끄라쓰나야 쁠로쉬지)에서 소련의 체코침공 반대시위를 한 죄로, 1968년 정신병원에 수감된 빅또르 파인베르크(В. И. Файнберг)는 다음과 같은 의사의 처방을 들었다.

 

“당신의 병은 반대 의견을 가졌다는 것이다. 당신의 견해를 포기하고, 올바른 관점을 수용하는 순간, 당신은 석방될 것이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1979) : 덫에 걸린 시베리아 불곰

 

아프카니스탄에서 우크라이나 방면으로 철수하는 소비에트연방 기갑부대

 

 

브레쥐네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된 논거는, 그가 핵전력을 포함한 소련의 군사력을 미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만들어, 소련의 위상을 높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소련 국방비의 대폭적인 증가가, 궁극적으로 소련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일시적인 유가 폭등에 따른 막대한 군사비 지출은 오히려 인민들의 삶의 질을 갉아먹었고, 미국과의 무제한적인 군비경쟁은 유가가 폭락할 경우,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시한부적인 운명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을 트리거(trigger)로 유가가 폭등하게 되었다. 고유가로 인한 수익은 소련 정부를 식량 폭동과 정권 붕괴(궁정 쿠데타)의 가능성으로부터 구해주었다. 사실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 전의 러시아는 주요 농산물 수출국이었으나, 혁명 후 50년이 지나자 세계 최대의 농산물 수입국이 되었다. 소련 인민들이 먹는 빵의 3분의 1이 수입 곡물로 만들어졌고, 소, 돼지, 닭 등 가축들도 미제 사료를 먹었다.

 

여하튼 브레쥐네프 정권은 고유가로 인해, 방대한 예산을 국방비에 투입할 수 있었고, 1970년대 후반에는 미국과 대등한 핵전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역시 이러한 자신감으로부터 나타난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직접적인 군사개입은 미국의 베트남 개입의 데자뷔(déjà-vu)처럼, 덫에 걸린 꼴이 되었고, 소련 붕괴의 단초가 되었다.

 

사실 소련이 악순환이라는 늪에 빠지게 된 계기는, 1977년 NATO를 협박하기 위해

최신형 중거리 미사일 SS-20을 동독에 배치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에 미국은 성능과 정확도에 있어서 비교 우위에 있는 퍼싱(Pershing) II 미사일과 그리폰(Gryphon) 중거리 크루즈 미사일의 서독 배치로 대응했다. 결과적으로 10분 만에 모스크바 강타가 가능해진 것이다. 소련으로서는 칼을 들고 협박하다가, 총에 맞게 되는 처지에 몰리게 되었다.

 

브레쥐네프는 1974년 발병 이후 주요 정책 결정을 까게베 의장인 안드로뽀프, 그로미코 외무장관, 우스찌노프 국방장관에게 넘겼다. 특히 대외정책의 경우 강경파인 우스찌노프의 입김이 셌다. 안드로뽀프 역시 강경파에 속했고, 그로미코의 경우 소심하면서도, 상당히 신중한 비둘기였다. 결국 대외정책의 이니셔티브는 까게베와 군부 등 매파가 쥐게 되었다.

 

1978년 4월 소련에 낭보가 전해졌다. 공산주의 성향을 지닌,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 소속의 청년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친미 행보를 보이던 다우드 정권을 붕괴시키고, 타라키를 수반으로 한 혁명평의회를 설치한 것이다. 타라키, 아민, 카르말 등이 쿠데타의 주역들이었는데, 사실 이들은 권력에만 눈이 먼 얼치기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껍데기만 사회주의자들인 이들의 어설픈 급진 정책은, 국민의 대다수를 이루는 무슬림들의 반발을 사면서, 격렬한 반정부 투쟁을 초래했다.

 

이듬해인 1979년 1월에도 예기치 않은 소식이 모스크바에 전해졌다. 아프가니스탄의 접경 국가인 이란에서 미국의 오랜 동맹인 팔레비 왕가가 축출되고, 이슬람 원리주의자인 호메이니가 권력을 장악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소련을 겨냥한 군사시설과 도청기지뿐만 아니라, 주요 동맹국이자 소련 국경지역의 전초기지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란의 팔레비 왕가는 오랜 기간 미국의 사주를 받으면서 중동의 경비견 역할을 했다. 이런 이란을 상실하자, 미국은 이란과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이라크와 손을 잡는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사담 후세인은 1979년 7월 이라크의 대통령이 되었다. 소련의 경우 반미 성향의 호메이니가 친소로 넘어올 수도 있다고 자가발전을 했으나, 착각이었다. 호메이니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단호한 이슬람 원리주의자였던 것이다.

 

뒤이어 3월에는 이란 혁명의 여파로, 아프가니스탄의 서쪽 끝에 위치한, 이란 국경과 가까운 헤라트 지역에서 반정부 폭동이 발생하여, 소련 고문단과 그들 가족 등 50여 명이 잔인하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타라키는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2만 명 이상의 주민을 역시 잔인하게 학살했는데, 모스크바는 이 사태를 대단히 심각하게 주시하고 있었다. 카불의 까게베 지부와 소련 고문단은 헤라트 봉기를 보면서,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 혁명의 장래를 우려하게 되었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서두르지 않았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준비, 전략무기 제한 협상(SALT II) 비준 문제, 그리고 이미 예정된 카터와의 정상회담을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아프가니스탄 쿠데타의 주역들이었던 타라키, 아민, 카르말 간의 극심한 대립과 반목이 표출된 것이다.

 

흙수저 출신인 타라키는 인민을 의미하는 ‘할크’라는 조직의 수장이었다. 타라키는 자신이 아프가니스탄 공산주의의 아버지라고 자임했다. 타라키의 가장 가까운 동료이자 12년 후배인 아민은 미국 유학파 출신의 무늬만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리고 아민과 동갑인 카르말은 아프가니스탄에서 명망이 높은 ‘파슈툰’ 귀족 가문 출신의 금수저였다. 그는 깃발이라는 의미의 ‘파르참’ 조직을 이끌고 있었는데, 타라키와 아민을 무모한 혁명적 몽상가로 평가절하했다. 타라키의 ‘할크’파 역시 카르말에 대해 ‘왕족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한편, 타라키와 같은 편인 아민은 호시탐탐 타라키를 축출할 궁리만 하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들 3인의 ‘진흙탕 개싸움’이 아프가니스탄에 소련군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계속>

 

 

Signing of the Helsinki Final Act, 1 August 1975(osce.org). 왼쪽부터 키신저 국무장관, 브레즈네프 서기장, 포드 대통령, 그로미코 외무장관

 

※ 헬싱키 협정¹이란, 1975년 7월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 개최된 유럽 안전보장 협력회의(CSCE; 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에서 알바니아를 제외한 유럽의 모든 국가와 미국 캐나다 등 35개국이, 최종 의정서(Helsinki Final Act)에 서명한 것을 의미한다. 주요 내용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형성된 유럽의 국경선을 상호 인정하고,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며, 경제적, 과학적, 인류 공동체적 영역 등에서 서로 협력할 것 등을 촉구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