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문제/북핵의 기원

북핵의 기원(3) 미국의 핵 위협

twinkoreas studycamp 2021. 5. 20. 16:54

 

 

조선(북한)이 한국전쟁에서 겪은 실제적인 상공의 공포’(air terror)는 대폭격이었지만 더 커다란 가상적 공포는 핵 공격이었다. 한국전쟁에서 나타난 미국의 대북 핵위협은 북핵의 기원에서 결정적 의미를 갖는다.

 

맥아더 사령관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핵폭탄 사용을 요청하였고, 신중한 후임자인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사령관도 최후수단으로 핵 공격을 고려하였다. 정전협정이 교착상태에 빠지자 아이젠하워 대통령도 핵 불사를 표명하면서 조선과 중국을 압박하였다.

 

 

리지웨이 사령관(미 육군)

 

파워(Tomas Power) 미 전략공군 부사령관은 한국전쟁 당시에 상부의 명령으로 원폭투하를 위한 출격대기를 한 적이 있다고 토로했다(Harry Middleton, The Compact History of the Korean War).

 

김명철 ·미평화센터(Center for Korean-American Peace) 소장은 한국전쟁에서 세 번에 걸친 핵공격 시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미국은 19507~8월에 경남 일대를 압박하는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한 위력적인 반격수단으로 핵무기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어서 195011~19513월에 군우리전투 등에서 인천상륙작전의 성과가 사라진 상황에서 중국 인민지원군과의 새로운 전쟁에서 숭리하기 위한 치명적 수단으로 핵공격을 검토하였다.

 

19501130일 트루먼 미 대통령은 우리가 보유한 모든 무기, 핵무기의 사용은 항상 검토할 수 있다고 밝혔고, 비슷한 시기에 맥아더 총사령관도 조중 국경에 코발트방사능 지대를 구축하기 위해 30~50발에 달하는 원폭을 투하할 것으로 제안하였다.

 

마지막으로 195211~19534월에 정전협정이 교착되고 포로석방 협상이 표류하자 클라크(Mark Clak) 사령관은 만주와 한반도 서북부에 대한 원폭사용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195212월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아이젠하워 당선인은 미 해군 순양함 헤레나(Herena) 호에서 휴전을 위해서 핵무기도 불사하겠다고 언급하였다.

 

래드포드 합참의장(npg.si.eu)

 

이 자리에서 래드포드(Arther Radford) 합참의장은 핵무기에 의한 대량보복을 주장하였고, 1953년 봄에 핵탄두를 장착한 미사일이 오키나와 미군기지에 배치되었다(John Torend, In Mortal Combat Korea, 1950~1953). 미국은 핵무기를 실제로 사용하지 못하더라도 휴전을 앞당기는 수단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연원을 강조하는 시각에서는 조선이 핵개발에 나선 시점을 남과 북의 단독정부 수립~한국전쟁의 시기로 앞당겨 보지만, 실제적인 움직임은 1970년대 이후에 시작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심지어는 탈냉전 이후 1990년대에 본격화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본격화 시점 : 1970년대 vs 1960년대 

 

먼저 외부의 관찰자 시점에서 보자면, 1982년 미 CIA가 위성자료에 근거해서 1979년부터 원자로를 준비했다고 본 것이나 소연방의 해외정보부가 1970년대 후반에 과학원·군부·사회안전부에 핵개발 지시를 내려졌다고 판단한 것을 참조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로동당 핵심수뇌부가 1960년대 중반에 극비리에 핵개발에 대한 방침을 결의했다는 시각도 있다. 1962년 쿠바사태에서 흐루쇼프의 퇴각을 목격한 조선 지도부는 독자적인 전쟁수행 능력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미국의 개입이나 선제공격을 억지하려면 핵무기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1962 8월 그로미코(Andrei A. Gromyko) 소연방 외무장관은 러스크(David Dean Rusk) 미 국무장관에게 비핵국가로 핵무기 및 기술을 이전하는 것을 금지하는 협약을 제안했다. 재래식 무기만으로는 안보가 취약하다고 판단한 미국이 한국에 전술핵을 배치하려던 시기에 이런 제안은 수용되지 않았다.

 

박성철 외무상(북한정보포털)

 

다음 날에 모스코프스키(Vasily Moskovsky) 조선주재 소연방 대사가 그로미코의 제안내용을 소개하자 박성철 조선 외무상이 다음과 같이 반문했다고 한다.

 

당장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지 않지만 그런 방향으로 노력하는 중이고 성과도 괜찮은 나라들에게 그런 조약을 강제할 수 있는가? 최근에 중국의 시도가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다는 보고서를 읽었다. (...) 그들은 핵무기를 다량으로 비축하면서 우리는 핵무기 제조에 대해 생각하는 것조차 안된다고?”

 

조선은 1962년에 원자력연구소 및 핵물리대학을 설립하였고, 김일성종합대학에 핵물리학부를 설치하여 전문인력 육성 및 소연방 유학을 시작하였다. 1981년 조선을 방문했던 동독의 고위인사는 귀국보고에서 조선이 원자력발전소 도입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으며, 그러한 열성에 비추어 군사적 전용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평가하였다.

 

이 보고서에는 조선의 관계자들이 우리는 핵무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는 진술이 있다. 김정일 비서는 1984년에 전방부대 하사관들을 선발해서 핵개발부대를 조직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선발 구성된 2개 연대가 황해북도 평산의 우라늄광산 확장 및 공장 건설에 투입되었다.

 

 

시발점 : 1950년대 초

 

이와 관련해서 평양을 다수 방문한 것으로 알려진 김명철 ·미평화센터(Center for Korean-American Peace) 소장은 조선이 1952년부터 핵개발의 기초를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1952년에 조선로동당 지도부는 도상록을 중심으로 과학원을 설립하도록 하였고, 전쟁복구가 한창이던 1956년에 소연방과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중국과 소연방의 협정보다 3년이나 빠른 시점이었다.

 

조선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40여년 동안 모스크바 공업물리연구소, 모스크바 바우만 고등기술학원, 모스크바 에너지연구소, 도브나원자력합동연구소, 오브닌스크물리연구소, 원자력공업대학 등에 다수의 연구자와 유학생을 파견하였다.

 

김 소장은 자신의 저술과 인터뷰 등을 통하여 한국전쟁과 새로운 전쟁은 두 가지 점에서 달라질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첫째는 한국전쟁 당시에 조선은 일본··하와이의 미군기지와 미국 본토의 대도시를 타격할 수 있는 수단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이 원자력시설을 가동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지금의 조선이 일본 열도와 미국 본토에 보복할 수 있는 수단을 가졌고, 한국(12)과 일본(51)은 물론이고 태평양 연안 100km 이내 미국의 원전(102)이 우선적인 표적이란 것이다.

 

그는 미국과 조선이 다시 전쟁을 하게 되면 미국은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된 상대(the wrong enemy at the wrong place at the wrong time)를 골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고 주장했다. 브래들리(Omar N. Bradley) 전 미국 합참의장이 한국전쟁에 대해 잘못된 시기에 잘못된 장소에서 잘못 싸웠던 잘못된 전쟁이었다고 술회했던 것을 비꼰 셈이다.

 

 

북핵의 성격 : 다목적 

 

한국전쟁에서 미국의 핵 위협을 받았던 조선은 한국에 전술핵이 배치되자 반발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한국전쟁 이후 아태지역에 핵폭탄(전술핵 포함)을 반입했는데, 한국에는 1957년부터 전술핵폭탄을 들여왔다. 1958년 군산 미공군기지에 전폭기 탑재용 핵미사일을 배치하였고, 아태지역에 매설된 20여개의 핵지뢰가 주로 휴전선에 집중된 것으로 알려졌다(워싱턴포스트, 1984. 3).

 

조선을 여러 차례 방문했던 셀리그 해리슨(Selig S. Harrison)F-16 전투기에 탑재할 수 있는 핵폭탄 60개가 군산 미 공군기지에 배치됐다고 주장했다. 19919월 부시 미 대통령은 소연방에 육군의 단거리 핵무기 2,150기를 폐기하고, 해군의 단거리 핵무기 2,157기를 반출해서 50% 가량 폐기하고, 공군의 전술핵 1,400~1,600기 정도만 유지할 것을 제안했다.

 

19921월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육군의 전술핵과 방공유도탄의 50%, 공군의 전술핵 50%, 해군의 전술핵무기 1/3의 폐기 방침을 발표했다. 그해 미국은 한반도에서 전술핵무기 철수를 공표하였지만, 조선은 거꾸로 핵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해체 이전의 소연방(Soviet Union)과 미국은 중국과 조선 등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에 반대하는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었지만, 미국의 핵우산 정책으로 인해서 양국의 핵확산금지 공조는 한계가 있었다.

 

1987년 김일성 주석은 조선의 핵개발에서 가장 큰 성과는 우라늄농축기를 주체화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소연방은 1985년 민수용 원자로를 지원해달라는 조선의 요청에 대해서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을 전제로 수용하였다.

 

소연방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미국과 조선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절충안을 관철시켰지만, 1991년 체제붕괴로 조선과의 약속을 이행하지 못했다. 조선은 1993312일 핵확산금지조약(NPT)을 탈퇴함으로써 사실상 핵개발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20년이 지나는 시점인 2012년에 조선은 핵보유국을 명시한 헌법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북핵의 기원을 한국전쟁에서 나타난 미국의 공중전과 핵위협에서 찾더라도 오늘날 북핵의 성격은 단순한 방어용이 아니다. 북핵은 체제수호에 그치지 않고 혁명적 목표와 한반도 통일이라는 공격적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다.

 

김일성 전 주석이 핵연구를 주저하는 과학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도 통일의 논리를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졌고, 주한미군 철수 후에 혁명을 완수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으로 활용할 것이라는 시각이 있다.

 

해리스(Harry B. Harris Jr.) 전 주한 미 대사는 인도·태평양 사령관 재직시에 하원 군사위원회 청문회(2018. 2. 14)에서 조선의 핵무장 목적을 체제방어용(전수방위)만이 아니라 선대에서 실패한 공산주의 통일 완수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20165월 제7차 조선로동당 사업총화 보고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핵무장으로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켜서 연방제 통일을 실현하자고 역설했다.

 

결론적으로 북핵은 체제방어용에 그치지 않고 점차 다목적 성격이 분명해지면서 향후 미국과의 협상에서 으로 거래될 가능성이 희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