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on Twin Koreas

한국과 쿠바 수교 : 정경분리의 실리 추구

twinkoreas studycamp 2024. 2. 15. 20:28

마침내 한국과 쿠바(꾸바)가 수교했다. 양국은 현지 시각 2월 14일 뉴욕에서 쌍방의 유엔 대표부를 통해 공식적으로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2014년 12월 오바마 미 대통령이 쿠바와의 관계정상화를 공표한 지 10년만이다.
 

 
그동안 쿠바는 중국, 러시아, 베트남, 몽골 등 옛 사회주의권에서 한국의 유일한 미수교국으로 남아 있었다.
 
쿠바는 반미노선과 관련해서 조선(DPRK)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피델·라울 카스트로 국가원수의 사망과 은퇴 및 오바마 미 행정부 시기 미국과 수교 이후 개방정책을 확대하고 있다.
 
하지만 후임 행정부(트럼프~바이든)에 의해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됨에 따라 여러 제한조치가 부과되었다.
 
이번 수교로 한국과 조선의 동시 수교국(교차승인)은 기존 156개국에서 157개국으로 늘어났고, 조선과 일방 수교한 국가 중에서 한국의 미수교국은 시리아(수리아)만 남았다.
 
이번 수교 합의에 앞서 박근혜정부의 말기인 2016년에 윤병세 외교부장관이 최초로 쿠바를 방문한 자리에서 수교 의사를 전달하고, 지난해에는 박진 외교부장관이 쿠바 외무차관과의 비공식 회의에서 수교의향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Cuban Jazz

 

 

Guantanamera(관타나메라)

https://youtu.be/hSNNm4u5vrk?si=qw9BnLbQ78QAgwi-

 
쿠바의 구체제는 1949년에 한국을 승인했지만,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양국은 사실상 단교상태로 전환됐다. 이후 동맹관계인 미국과 쿠바의 군사적 긴장도 한국의 대쿠바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탈냉전 이후 클린턴~오바마 행정부를 거쳐 미국이 쿠바와 국교정상화를 한 이후에도 한국은 관성적으로 쿠바와의 수교에 무관심하거나 소극적이었다.
 
미수교 상태가 장기화되면서 한국인들의 쿠바여행은 영사 조력을 받을 수 없었고, 21세기에 와서야 캐나다 혹은 멕시코를 경유한 여행 루트가 활성화되면서 연간 1만여명 이상 방문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쿠바 현지에는 구한말~일제강점 시기에 이주한 동포의 후손 1천여명이 아바나 등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지 교민 사회는 교민들의 권익증진과 양국의 교류 확대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며 수교를 환영하고 있다.

 

(중앙일보)


 

(서울신문)


쿠바는 조선과의 맹방(盟邦)으로 통했지만, 아마추어 복싱과 야구의 강국으로 유명했다. 또한 일차의료시스템은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남미에서 최고의 의료진 육성으로 여러 나라에 보건의료인력을 파견하고 있다. 주요 광물로는 니켈과 코발트가 풍부하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대 출신 체 게바라는 쿠바 정부의 산업부장관을 지냈고, 아시아순방에서 조선을 방문한 바 있다.

 
 
정경분리 : 상대의 이념 및 체제에 대한 존중 혹은 논외
 
정치와 경제를 기계적으로 분리하기는 어렵지만,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국가들의 수교및 교류에는 역사적으로 정경분리 원칙이 적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옛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한국과 수교하는 과정에서 이념과 체제를 따지지 않고 경제적 실익을 중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쿠바도 조선과의 관계와 별개로 한국과의 교류 및 경제협력을 선택한 것이다.
 

 
따라서 쿠바와의 수교는 역사적 의미가 있지만, 이를 조선의 국제적 고립의 강화 등으로 확대 해석하는 것은 다소 과장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쿠바가 조선과 단교하면서 한국과 수교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통령실에서도 ‘심리적 타격’이라는 추상적 표현을 쓴 까닭이다.
 
오히려 이번 수교는 영국을 비롯한 유럽 다수국가들과 중·러 및 동유럽권, 그리고 베트남에 이어 쿠바까지 ‘두 개의 한반도 국가’를 승인한 조치라는 것이 더 실질적인 의미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최근에 조선이 ‘두 개의 국가’를 공식화한 것도 쿠바정부에게 운신의 폭을 넓혀주었을 개연성이 있고, 조선이 1992년 한·중 수교처럼 결사적으로 반대해야 할 실질적 필요가 많다고 보기도 어렵다.
 
좀더 확장된 시야로 접근하면 남북과 동시 수교한 베트남이 트럼프·김정은 회담을 하노이에서 유치했듯이, 한국과 쿠바의 수교는 남과 북 모두에게 어떤 잠재적 가능성들을 내포하고 있다.

 



조선의 대 쿠바 관계


1960년 국교 수립 및 문화협정 이후 남미 최대 대사관(50여명) 운영

1970
년 민간항공에 관한 협정


1984
년 해상무역운송협력에 관한 협정

1986년 피델 카스트로 의장 조선 방문

1991
년 군사협정 체결

1994년 황장엽 국제비서의 쿠바 방문
1995년 로베르토 로바이나 외무장관의 조선 방문
1997년 자유무역협정
1999년 엑스포쿠바 참가*

2013
년 조선 청천강호의 파나마운하 나포사건

당시 쿠바 외무부는 청천강호에 설탕 포대와 함께 적재된 전투기 및 엔진 등에 대해 안보적 필요에 의해 조선에 수리를 요청한 것이라고 밝힘

2014
년 경제발전과 과학기술합작회의 의정서 체결

2015년 리수용 외무상 쿠바 방문, 상품교류 의정서 체결


* 조선 국제전람사, 종합설비수입회사, 경공업무역회사, 은하무역총회사 등이 엑스포쿠바에 참가하여 직물, 신발, 법랑, 식기, 도자기제품, 의약 및 의료품, 조화류, 자석목걸이 등을 전시 및 홍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전쟁 당시에 3년이 지나도록 전란의 참화가 극에 달해도 한·미와 조·중이 서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 핵전쟁을 반대하며 휴전을 촉구한 것은 인도, 영국과 같이 양쪽의 국가들과 동시수교한 국가들이었다.
 
한국과 쿠바의 미수교는 시대착오적인 지체현상이었다는 점에서 양국의 국교수립은 자연스럽고 환영할 일이다.
따라서 이번 성과를 70~80년대에 횡행했던 남북의 냉전외교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이다.
 

2018년 미겔 디아스카넬(1960년생) 쿠바 대통령은 조선을 방문한 바 있다. 그는 전자공학을 전공한 교수 출신으로 카스트로 형제의 장기집권 이후 새로운 세대 중에서 맨 먼저 국가수반직에 올랐다.

 
 
 
중국과 일본 사례 : 이민촉관·정경분리
 
1972년 중·일 국교정상화는 미·중관계(1979년)보다 7년 앞서 이뤄졌다. 일본 자민당 내각은 1950년대 중반부터 수교국이 아닌 중국 등과의 교류 및 무역을 추진하면서 ‘정경분리’를 내세웠다.
 
이에 대해 중국은 표면적으로 ‘정경불가분’이란 원칙을 표방하면서도 ‘이민촉관(以民促官)’의 논리를 제시했다. 민간의 경제·문화 및 인적 교류를 통해 양국 정부의 관계를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이처럼 양국의 뉘앙스가 달랐지만 중국의 경제적 필요와 일본의 국익이 서로 타협했다는 점에서 중·일 관계정상화의 과정은 정경분리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당시 중국 사회주의 지도부가 정치와 경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미·일이 생각하는 정경분리와는 결이 다른 것이었고, 산업화 및 현대화를 위한 임기응변의 성격이 강했다. 

 

쿠바의 10페소 지폐 뒷면 : 현대중공업은 2005년 쿠바의 ‘에너지혁명’’ 핵심사업이었던 발전소 건설에 참여한 바 있다.


 
중국은 일본의 재벌기업들로부터 철강 등 기간산업의 기술지원을 받는 과정에서 ‘민간 대 민간의 관계’라는 외피를 씌움으로써 당의 '존엄한' 이념적·정치적 원리가 도전을 받는 리스크를 차단하려고 했다.
 
중국은 대만에 대한 군사적 위협과 통일전쟁을 압박하면서도 장기간 경제교류를 지속하는 논리적 근거도 민간관계의 경협에서 찾고 있지만, 중국 기업들이 일반적인 자본주의 국가의 기업들과 다르게 당·정의 철저한 통제를 받는다는 점에서 ‘이민촉관’은 정경분리의 변용(變容)에 불과하다.
 
또한 21세기 이후 중국은 상당한 경제적 수준에 도달하자 한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을 상대로 ‘이경촉정(以經促政)’으로 표변했다.
 
한국은 중국의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올림픽의 경험과 노하우 등을 적극 지원했으나, 중국은 이런 식으로 받는 지원을 ‘민간의 관계’로 규정함으로써 언제든지 정치적으로 표변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고자 했다.
 
비근한 예로 사드배치 논란에서 중국은 한국의 민간 기업들에게 경제적 불이익 및 제재를 가해 (자국 기업들의 일부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면서) 당·정의 정치적·외교적·군사적 목적을 추구했다.
 
중국의 정경불가분은 이념을 달리하는 국가들로부터 경제적 지원 및 수혜는 챙기고 정치적 이익에 관해서는 별개로 다투겠다는 발상이란 점에서 ‘거꾸로 선 정경분리’, 역(逆) 정경분리라고 풍자할 수도 있다.
 
정경분리에 대한 중국의 변용은 탈냉전 시기에 활발했던 고전적 정경분리가 미·중갈등 및 신냉전 시기에 더욱 퇴색하고 퇴조할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비정치적인 문화교류나 이념적 차이를 넘은 인도주의적 지원도 정치현실에 관한 비판적 사유에서 비롯됐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정치적이다.
 
따라서 정경분리와 정경불가분은 선악 혹은 호오의 관점이 아니라 두 가지 모두 쌍방의 경제 및 무역에 관한 정치적 의도가 맞물린 쌍생아(twins)일 뿐이라고 유연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항공 및 관광업계 제2의 베트남, 하롱베이 특수?

 

 

미수교 상태에서도 쿠바 현지에서 K-컬처가 확산됐다

 

 

2000년대 초반 대한항공의 베트남 직항 개통을 알리는 광고는 영화 '굿모닝 베트남'(주연 로빈 윌리엄스)의 주제곡인 'What a Wonderful World'(루이 암스트롱)가 흐르는 가운데 베트남 북부의 하롱베이를 전면에 내세웠다. 당시 문화적으로 크게 어필한 TV광고의 효과는 이후 저가 해외여행의 필수코스처럼 중년층과 젊은층의 베트남 관광 열풍으로 이어졌다.  

 

물론 저가라고 해도 관광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갈 만한 동기가 부여되어야 적은 돈이라도 쓴다. 그런 점에서 쿠바는 베트남과 같은 캐릭터를 갖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차이점이 많다. 국적기의 직항로 개설은 비용 대비 수익의 관점에서 상당한 시일이 필요할 전망이다. 그래도 쿠바 방문은 국적기와 해외 항공사 연결을 통해 비용과 절차가 훨씬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문제는 미국의 쿠바정책에 따라 쿠바를 방문한 자는 미국행에서 암묵적 요주의 대상자로 분류돼 입국의 편의성을 잃게 된다는 점이다. 미국을 자주 가야 하는 경우에는 쿠바 방문에 신중한 판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현지인들의 코리아 주간 행사

 

쿠바는 지리적 거리 및 비용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단기에 베트남 하롱베이와 같은 열풍을 기대하기 어렵지만, 국내 항공사와 여행업계에 남미의 여러 나라와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시장이 열린 것만은 분명하다.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쿠바는 여전히 카리브(Caribbean Sea)의 중심이다.  과로사회, 피로사회의 대표적 케이스인 한국사회는 '느림'에 대한 원초적 갈망이 강하다. 

 

반나절이면 어지간한 거리까지 지구적 이동이 가능하고, 특히 정보화 및  AI 등 4차산업혁명으로 인해 거리가 소멸하는 시대에 이뤄진 쿠바와의 국교수립은 서로 문화적으로 풍부해지고 성숙해지는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쿠바의 자생적인 한류 단체(쿠바정부 승인)

 

 

 

 
[미국과 쿠바의 관계정상화 과정 : 1959년~2016년]
 
1959년 카스트로(Fidel Castro)가 주도한 사회주의혁명으로 쿠바공화국(Republic of Cuba)이 수립되자 미국은 이를 승인하였다. 하지만 국유화조치로 미국의 자본이 대량 몰수되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60년 10월을 기하여 쿠바에 대한 통상금지법을 선포하였고, 이듬해 외교단계를 단절하였다.
 
1961년 4월 미 CIA가 지원하는 쿠바민주혁명전선(Cuban Democratic Revolutionary Front) 소속 1,400여명이 함정과 탱크를 동원하여 피그스만(Bay of Pigs)을 침공하였고, 1961년 10월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카스트로를 겨냥한 몽구스작전(Operation Mongoose)을 승인하였다.
 
미국은 1962년부터 전면적 금수조치를 통해서 경제제재를 가하였다. 미주기구(OAS)에서 쿠바를 축출하고 교역을 금지하였다. 그로부터 36년 이 지나서야 쿠바는 남미카리브공동체(CELAC)의 33번째 회원국으로 승인되었고, 2009년에 열린 미주기구 총회에서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원국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미국은 1977년 카터행정부의 이익대표부 설치와 1994년 클린턴행정부의 이민협정을 제외하고는 제재와 봉쇄에 의한 압박으로 일관하였다. 특히 클린턴행정부의 말기에 카터 전 대통령의 쿠바 방문이 이뤄졌고, 2004년에 쿠바계 미국인의 모국방문(3년 1회)이 허용되었다.

 

(쿠바정부의 홍보물)


 
오바마 행정부가 동등한 파트너십에 기초한 관계정상화를 모색하면서, 2009년 미 의회는 기존의 제제조치 중에서 여행·송금·무역 등에 관한 완화조치를 의결하였다. 또한 2013년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오마바 대통령과 카스트로 국가원수가 조우하였고, 캐나다에서 양국의 관계개선에 대한 비밀협상이 시작되었다.
 
2014년 12월 17일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한 역사적 조치들을 취할 것이라는 공식성명을 발표하고, 케리(John F. Kerry) 국무장관이 쿠바와의 관계정상화 협상에 나섰다. 이듬해 4월 파나마에서 열린 미주기구 총회에서 양국의 정상회담이 이뤄졌고, 7월에는 양국의 이익대표부가 대사관으로 격상되었다.
 
미국은 1982년부터 시작된 쿠바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33년만에 해제하고, 쿠바에 대한 제제를 전반적으로 완화 및 폐지하였다. 여행규제의 완화로 방문목적에 따른 12가지 비자를 발급하여 가족방문, 정부기관방문, 인도주의 프로젝트, 정보교류, 허가된 교역 등을 보장하였다.
 
이와 함께 미국인의 쿠바물품 반입한도를 400달러로 상향하였고, 쿠바로의 송금한도는 분기별 2,000달러로 상향하였다. 또한 현지 방문에는 1만달러까지 허용하고, 쿠바계 미국인이 고국의 가족 및 친척에게 송금하는 경우는 무제한으로 허용하였다.
 
금융 부문에서는 미국의 기관이 쿠바에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하였고, 미국의 신용카드와 직불카드(Debit Card)를 쿠바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미 항공사와 여행사의 양국 왕복노선과 쿠바의 국내노선 서비스를 허용하였다. 2016년 2월에 양국은 정기항공편의 1일 110회 운행에 합의하였다.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88년만에 쿠바를 방문하여 적대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2017년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중국과 베네수엘라에 대한 전략에 따라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가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