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s on Twin Koreas

영화 '노량'에 담긴 시대순환 : 허약한 완충국가

twinkoreas studycamp 2023. 12. 29. 15:28

(영화 '노량')

 
영화 ‘노량 : 죽음의 바다’는 충무공의 칼에 새겨진 ‘염혈산하(染血山河)’의 피날레를 보여준다. 또한 전편인 ‘명량’, ‘한산도’와 달리 대첩이 아니라 어쩌면 예고된 그의 죽음에 담긴 의미를 환기시킨다.
 
충무공은 전쟁 초기에 커다란 공을 세웠지만,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당쟁을 일삼던 조정의 탄핵으로 참형에 몰린 적이 있었다. 당시에 아무도 나서지 않는 침묵의 카르텔을 깨고 72세의 판중추부사 정탁(鄭琢)이 신구차(伸救箚)라고 불렸던 장문의 진정서를 올려 선조에게 직언했다.
 
“순신은 명장이므로 죽여서는 안 됩니다. 순신이 출전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뒷날에 공을 이루게 해주십시오.”
 
당시 40대의 선조는 홀로 나선 칠순 원로의 간청을 뿌리치지 못했다고 하니, 정도전의 건국설계에 군신관계의 밸런스가 담겨 있다는 점이 그나마 조선이 망하지 않은 까닭일까?
 
명의 황제(신종)이 양호에게 다량의 면사첩(免死帖 : 죽음을 면하게 해준다는 증표)을 유성룡을 통해 충무공에게도 전해졌다는 역사적 논란도 있다. 조선의 국왕이 죽이려는 장수를 명의 국왕이 보호했다는 것이다. 김훈 작가의 ‘칼의 노래’에서도 충무공이 면사첩을 꺼내 보는 대목이 나온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이 아니라 정유재란에 발발했다. 조선은 임진년의 승리를 완결짓지 못하고 충무공을 사지로 몰아 위기를 증폭한 초래한 측면이 있다.
 
영화 ‘노량’은 지정학적으로 대륙세력(명 : land power)과 해양세력(일 : sea power)의 틈새에 낀 허약한 완충국가의 운명을 수많은 백성들의 죽음과 이순신의 통한의 전사로도 극복할 수 없었다는 역사적 탄식과 회한을 담고 있다. “이렇게 전쟁을 끝낼 수는 없다.”(충무공)
 
당시 명은 정명가도(征明假道)를 거부하고 사실상 대리전을 수행하던 조선을 지원하는 명분으로 ‘항왜원조(抗倭援朝)’란 말을 내세웠는데, 한국전쟁 당시 중국은 참전의 명분을 ‘항미원조(抗美援朝)’로 내세웠다. 수백년이 지나도 되풀이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리스크를 잘 보여준다.
 
 
'노량'에 투영된 한반도 지정학
 

이순신과 등자룡(영화 '노량')

 
 
이 영화는 하마터면 ‘노량 : 조명연합군’으로 될 정도로 진린(정재영)과 등자룡(허준호)이 크게 부각되는데, 일반적으로 정유재란에서 명의 군대가 전쟁에 미친 영향을 간과하는 경향에 비추어 사실에 충실하려는 의도로 읽혀진다.
 
명과의 관계와 그 영향력은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더 막대했다. 당시 조정은 압록강을 건너 명에 귀부(망명)하려는 논의가 있었고, 전쟁과정에서 명의 조정에서는 조선의 서북부(개성~평양)를 직할통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난무했다. 또한 명군 병사들이 체찰사(전시 총사령관) 류성룡이 말을 타고 가는 길을 막아 사실상 납치하는 일도 발생했다.
 
‘위대한 만남 : 서애 류성룡’(송복)에서는 선조가 전쟁 초기에 의주로 파천했다가 전세가 반전될 기미가 없자 조정에서 압록강을 건너 명의 영토로 넘어가자는 주장이 확산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당시 류성룡은 “강을 넘는 순간에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니다”면서 결사적으로 막았다고 한다.
 
류성룡의 도강 만류와 이순신의 해전으로 조선의 운명이 바뀌었다는 관점에서 보면, 죽마고우였던 두 신하의 ‘위대한 만남’으로 조선왕조는 종말의 문턱에서 되살아난 셈이다. 하지만 조선왕조는 이순신의 사후에 그의 공덕을 수백년 동안 제대로 헌창하지 않다가 정조의 연대에 와서야 ‘이충무공전서’를 발간할 정도로 해괴한 행태를 드러냈다.
 
충무공의 필사즉생(必死卽生)과 상유십이척(尙有十二隻)이란 말에 함축된 ‘극강의 사생관(死生觀)’과 절대고독, 그리고 난중일기에 투영된 순백(純白)의 기록정신, 공과 사에 대한 차가운 분별, 두 차례의 백의종군을 이겨내고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불굴의 정신력,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是無國家)로 집약된 지정학적 사고와 애민(愛民), 조정의 반대에도 전란 중에 과거(무과) 시험을 관철시킨 뚝심, 영화에서는 생략되었지만 거짓말로 왜적의 출현을 꾸며대 도주한 자들에 대한 준엄한 척결(효수), 무고한 백성들을 도륙한 왜적에 대한 처절한 피의 응징, 사별한 형수·제수와 식솔들 20여명을 데리고 정읍현감에 부임하여 가렴주구에 지친 백성들의 눈총을 받을 만했지만 청렴검소한 생활로 도리어 칭송을 받았던 행정가,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효심은 한 인간이 다 담을 수 없는 독특한 경지를 드러내며 현대에도 여전히 울림이 크다.
 
“조선조 역사에서, 아니 한민족 역사에서 가장 빼어난 두 인물을 들라면 많은 사람들이 세종대왕과 이충무공을 들 것이다. 세종대왕과 이충무공은 비단 한국사의 위인일 뿐만 아니라 세계사의 거인이라 해도 이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줄 안다.”(1997년 최정호 연세대교수, ‘이순신과 난중일기’)
 

최정호 교수 기고문.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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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전쟁을 끝낼 수 없다.”
 
화포와 전함(판옥선)에서 우위에 있었던 조선 수군은 이순신의 등장과 거북선(龜船)까지 가세하면서 조선 8도, 적어도 한양 이남 4도를 분할점령하려던 히데요시의 구상(울산 순천 등 해안 각지에 왜성 구축 및 할거)을 좌절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적인 조선강국이 된 것은 조상들의 음덕이 깃든 것일지도 모른다. 김재근 서울대 조선공학과 명예교수의 ‘거북선’은 판옥선과 거북선에 대한 고증과 실증적 접근으로 조선의 전함이 당대에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1971년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은 영국 바클레이즈 은행 관계자들 앞에서 호주머니 속 500원 지폐를 꺼내놓았다. 공장도 없는 상태에서 현대 조선소를 설립하기 위해 차관을 빌리러 간 자리였다.

 

(1973년 한국은행이 발행한 500원권 지폐 : 한국은행 화폐금융박물관)

 

 

'이걸 보시오. 이것이 우리 거북선이오. 당신네 영국의 조선(造船) 역사는 1800년대부터 시작했다고 알고 있는데, 우리는 벌써 1500년대에 이런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을 혼낸 민족이오. 우리가 당신네보다 300년이나 조선 역사가 앞서 있었소. 다만 그 후 쇄국 정책으로 산업화가 늦어져 국민의 능력과 아이디어가 녹슬었을 뿐 우리 잠재력은 고스란히 그대로 있소.'

 

당당하게 보여준 돈에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북선이 그려져 있었다. 임기응변의 결과로 차관을 얻은 그는 무사히 조선소를 세워 거북선 마케팅의 성공을 이끌었다. 지폐 한 장에 그려져 있던 거북선 모습이 현재 세계 제일의 조선 강국 한국을 만드는 시발점이 됐다.“ (백남주 한국은행 학예사, 중앙일보, 2009.5.11.)

 

 

7년 전쟁과 3년 전쟁 : 미완의 전후처리와 역사적 후과


노량해전이 상징하듯이 전쟁은 무승부처럼 돼버렸다. 충무공이 통곡했듯이 왜군은 항복하지 않고 물러났다. 그리고 그 후예들이 정한론을 내세워 다시 돌아와 충무공의 흔적을 지워가면서 36년 이상 한반도를 지배하고 약탈했다.
 
임진왜란(정유재란), 혹은 조·일 7년전쟁은 동북아의 국제전이었다. 한국전쟁 또한 남북의 동족상잔이자 미·중의 국지전을 포함한 수십개국 병사들이 참여한 3년 세계전쟁이었다. 공통점은 무승부였다. 그리고 7년 전쟁 후에 일본은 다시 침략했고, 3년 전쟁 후에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상태(휴전)에 놓여 있다.
 
대륙 강국과 해양 강국의 접점에 위치한 한반도의 지정학적 취약성은 허약한 완충국가의 운명과 직결된다. 이제 함부로 범할 수 없는 무위(武威)를 갖춘 중견국가로 성장한 한국(ROK)과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핵무장에 성공한 조선(DPRK)은 과거의 허약한 완충국가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순신의 ‘노량’은 한반도 국가가 과연 지정학적 운명을 새롭게 재구성하는 길을 가고 있는가에 대해 묻는다.

"우리의 정치에는 현대 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주의자보다 이순신주의자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