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제에 관한 문제/체제선택의 문제

광복절 경축사 유감

twinkoreas studycamp 2023. 8. 15. 18:16

 
 
나라가 망하는데 양반 평민이 무슨 소용이며, 동인 서인과 노론 소론이 무슨 소용인가? 을사늑약(1905)과 경술국치(1910)에 수많은 선비들과 유생들이 순국자결하고 의병을 일으켜 지도자로서, 배운 자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했다.
 
 


 
 
독립(운동)과 해방 및 광복의 의미에 대해 남과 북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하면 남 탓을 하게 된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1918) 이전에 조선을 비롯한 아시아 독립운동은 좌우의 이념적 경계가 분명치 않은 미분화 상태였다.
 
지정학적으로 허약한 완충국가의 쇠망에 직면하여 애국선열들은 안중근 의사(1909), 류관순 열사와 3.1운동 및 임시정부(1919), 신간회(1927) 등에서 보여주듯이 이념이나 종교적 성향을 떠나 민족의 주권을 회복하고자 혼신을 다 바쳤다.
 
당시의 독립운동이 자본주의를 위한 건국운동이었는가,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위한 건국운동이었는가를 따지는 것은 후대의 시각으로 선대의 사정을 살피지 않는 진영논리일 뿐이다.
 
볼셰비키혁명 이후 한반도의 독립운동은 반공주의자, 용공 및 연합주의자(중도),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등이 혼재했다. 서로 때론 협력하고 때론 반목하다가 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미·소를 중심으로 하는 냉전질서에 분화 및 편입됨으로써 내전(civil war)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되었다.
 
현재의 시각에서 과거를 해석하는 것은 산 자와 늦게 태어난 자의 우월한 권리일지 모르지만, 누구도 영원히 살 수는 없다. 임기 5년의 대통령들이 광복의 의미에 대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접근한다면, 아마도 5년마다 국가 정체성 및 계속성에 대한 논쟁을 자초할 것이다.
 
2차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과 군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침략과 만행에 대해 미합중국과 소비에트연방이 협공하여 나란히 승전국이 된 점과 양국이 한반도(일본제국의 일부로 간주)로 진공하여 분할점령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남북의 분단 이전에 적어도 40년 전부터 전개된 복잡다단한 독립운동에 대해 제 입맛대로 이데올로기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심원한 역사의 숨결을 간과한 미성숙이라는 힐난을 초래할 수 있다.
 
이를테면 광복 직후 북으로 향한 벽초 홍명희는 사회주의정권 수립에 앞장섰지만, 그 이전의 삶과 그의 부친(홍범식)에 대해 현재의 이데올로기로 재단할 수는 없다.
 
태안·금산군수 등을 지낸 홍범식은 매천 황현의 뒤를 이어 자결했고, 이러한 흐름이 격화되면서 3.1운동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홍범식은 죽기 전에 ‘국파군망 불사하위(國破君亡 不死何爲)’라는 휘호를 써놓았다고 하는데, 후대가 그의 독립정신을 군주제 수호를 위한 결의라고 평가할 것인가?
 
또한 홍 지사가 아들에게 남긴 유언에서 “나라를 기어이 되찾아야 한다.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라.”고 했다는데, 당시의 ‘친일’이란 말을 오늘날 우리는 국내정치나 한일관계에 대해 덮어놓고 이용하려는 경향은 없는가?
 
구한말 독립운동은 조선왕정의 수호, 혹은 입헌군주제(대한제국)의 수호라는 시대적 한계가 있었지만, 임시정부에서 공화제를 채택했다는 점에서 한반도의 독립운동이 지향한 기본적 공통분모는 ‘현대적 공화국’이라고 볼 수 있다.
 
왕이 없는 나라, 주권재민의 나라. 무늬만 공화국이 아니라 진정으로 ‘왕이 없는’ 공화국에 대한 요구는 여전히 현실적이다.
 
후대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에 대해 특정한 정치논리로 재단하지 말아야 한다. 후대는 선대의 ‘미분화와 미완성’에 담긴 시대적 특징과 한계를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다양하고 풍부한 자양분으로 삼으려는 겸허한 접근이 필요하다.



 
한미일 해양 3각동맹과 조중러 대륙 3각동맹이 예각화되는 시기에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번영의 비전을 담아야 할 광복절 경축사에 대한 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