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제재 :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

경제제재(2) 쿠바의 경우 : 아바나 폭파사건

twinkoreas studycamp 2021. 5. 23. 01:01

 

역사적 배경

 

소연방 해체 이후 쿠바의 카스트로 체제는 미국 플로리다로 망명했던 반체제 집단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유럽에서 공산주의체제가 붕괴한 이후에도 카스트로체제가 건재하자 미국으로 망명한 유력인사들이 관광지에 테러를 가하고 내부의 저항이라고 선전하였다.

 

마이애미에 자리잡은 Brothers to the Rescue, Cuban American National Foundation, Alpha 66, F4 Commandos 등은 항공기를 이용하여 쿠바의 해안가에 전단을 살포해서 저항을 독려하고, 쾌속정으로 해변에 접근해서 총격을 가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제3국에서 용병을 고용하여 아바나의 호텔 등에 시한폭탄을 설치하였다.

 

쿠바혁명 이전에 호텔, 카지노, 럼주 공장의 소유자들이었던 쿠바 망명객들은 쿠바 관광산업에 대한 공격을 카스트로체제의 부당한 조치에 대한 정당한 보복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와 맞물려 마이애미는 1961년 피크스만 침공사건과 1962년 쿠바사태를 거치면서 쿠바와 남미를 대상으로 하는 CIA의 주요한 작전거점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 쿠바혁명 이후 장기간 지속된 냉전과 미국의 경제제재로 인한 봉쇄와 고립으로 인하여 쿠바경제에서 관광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은 미미하였다. 해외 관광객이라고는 주기적으로 단체관광을 왔던 소비에트 프롤레타리아들이 대부분이었다.

 

 

쿠바나 여객기(일류신 기종)

 

포상휴가를 받은 소연방(Soviet Union)의 노동자들은 노후화된 일류신(Ilyushin) 여객기를 타고 입국해서 식민지시대에 지어진 고색창연한 호텔에서 묵으며 아바나의 해변을 거닐었다. 그들은 양국의 특별협약에 의해서 단 한 푼의 돈도 내지 않았다. 아바나는 멀리 추운 나라에서 날라온 사회주의 노동자들에게 지상낙원이었던 셈이다.

 

1980년대까지 쿠바 경제의 주역은 사탕수수였다. 1989년의 사탕수수 수확량은 전무후무한 8백만톤에 달했고, 당시만 해도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몰락이 곧바로 쿠바경제를 압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연료와 각종 원자재 조달이 어려지면서 사탕수수 수확량이 급감하고, 대신에 탈냉전의 여파로 관광산업의 가능성을 평가한 캐나다와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의 자본과 호텔들이 아바나 해안가에 길다란 호텔 라인을 형성하였다.

 

미국의 오랜 경제제재 속에서 사회주의 동맹국들과의 경제협력이 유실되자 쿠바경제에서 관광수입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높아졌다. 쿠바 당국은 유럽인들의 향수를 자극하여 관광수입을 늘리고자 천혜의 자연환경과 사회주의 특유의 강력한 치안을 대대적으로 홍보했으나 마이애미 반체제단체들의 조직적 방해에 부딪쳤다.

 

 

 

WASP Network

영화 와스프 네트워크(넷플릭스, 2019)

 

1990년대 들어서 관광산업의 비중이 급증하면서 쿠바 망명집단의 관광지 공격이 더욱 집요해졌고, 쿠바 당국은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였다.

 

쿠바 정보국은 정예요원들을 탈주자를 꾸며서 망명대열에 합류시키고, 이들은 마이애미의 반체제 조직에 합류해서 정보를 수집했다. 이들의 정체는 미국의 시각에서 ‘쿠바 간첩단’이었지만, 카스트로체제의 입장에서는 ‘쿠바 방첩단의 미국 원정대’였다.

 

10여명으로 구성된 ‘와스프 네트워크(WASP Network)’는 점조직으로서 대부분 서로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이 가운데 에르난데스(Gerardo Hernández), 구에레로(Antonio Guerrero), 나바니노(Ramón Labañino), 페르난도(Fernando González), 르네(René González)가 1998년 스파이 혐의 등으로 적발되어 중형을 받았다.

 

쿠바에서는 이들을 ‘쿠바의 5인(Cuban Five)’으로 영웅화하였지만, 미국에서는 민간 소형비행기 2대의 격추사건에 대한 배후로 악명이 높다.

 

쿠바 스파이 5인을 변호했던 가버스(Martin Garbus)는 ‘North of Havana, The Untold Story of Dirty Politics, Secret Diplomacy, and the Trial of the Cuban Five’를 출간했고, 브라질 작가 모라이스(Fernando Morais)는 40회가 넘는 인터뷰와 양국의 문서에 기초하여 이 사건을 재구성하여 ‘The Last Soldiers of the Cold War : The Cuban Five'를 펴냈다.

 

모라이스의 원작은 'WASP Network'라는 제목으로 영화로 만들어졌다(넷플릭스, 2019). 이 작품에서 페넬로페 크루즈(Penelope Cruz)는 조국을 배신하고 망명한 남편을 원망하면서도 그 사실을 믿지 못하는 여인(Olga)의 역할을 맡았다. 영화는 원작을 압축하면서 르네와 올가의 인간적 번민과 가정사의 심리적 디테일을 부각함으로써 휴먼 스토리로 각색한 측면이 있다.

 

개봉 이후 쿠바에 대한 온정적 시각이 적지 않은 유럽권에서는 반향이 있었지만, 마이애미의 쿠바망명단체들은 영화가 사건의 본질을 호도했다고 반발했다.

 

 

반 카스트로 용병 : 산살바도르의 청년

 

쿠바 법정에 선 크루즈 레온(왼쪽) cubaheadline.com

 

모라이스는 원작에서 ‘반 카스트로 용병’이 된 엘살바도르의 26세 남성 크루즈 레온(Raul Ernesto Cruz Leon)이 아바나의 여러 호텔에 시한폭탄을 설치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였다(The Last Soldiers of the Cold War, 130쪽~167쪽).

 

엘사바도르 수도 산살바도르에서 성장한 크루즈 레온은 사설 경호업체에서 일하는 평범한 젊은이었는데, 어느 날 여동생의 차를 팔려고 중고차 매매업체를 방문했다가 같은 또래의 중고차 매매업자이자 마이애미 조직의 테러하청을 받았던 아바르카(Francisco C. Abarca)에게 2차로 포섭되었다.

 

아바르카는 쿠바 망명객들의 사주를 받아서 아바나의 최고급 호텔의 통로(화분)에 C4를 설치해서 폭파시켰다. 그러나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고 쿠바 당국이 보도를 완벽하게 통제하여 소란이 커지지 않았다. 마이애미에서는 사실 확인이 어렵다는 이유로 성공 보수금을 주지 않았다. 아바르카는 이러한 불확실성과 자신의 안전을 고려하여 새로운 하수인을 물색하였던 것이다.

 

 

사격을 좋아했던 크루즈 레온은 평소에 ‘스페셜리스트(The Specialist)’에 나오는 폭탄전문가 레이 퀵(실베스터 스탤론)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메이 문로(샤론 스톤)와 같은 여인을 연상하는 망상을 키우고 있었다.

 

아바르카는 해안가 바위 뒤에서 C4(Composition Explosive 4)의 안정성, 유연성, 파괴력을 직접 보여주었다. “겁 먹을 것 없다. 이건 해머로 찍고 300℃로 가열해도 폭발하지 않는다. 기폭장치에 9V 배터리를 연결하고 타이머가 작동해야 폭발한다.”

 

처음에 크루즈 레온은 폭발물질에 대한 공포, 인명살상에 대한 거부감, 쿠바의 삼엄한 경비 등을 이유로 아바르카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러자 아바르카는 폭파의 목적이 인명살상이 아니라 유럽 관광객들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고, 야간에는 입국 검열이 느슨해진다고 설득하였다. 또한 체포될 경우에는 최고의 변호사를 대주겠다고 약속했다.

 

평소에 스페셜리스트(레이 퀵)을 선망했던 산살바도르 청년은 3개월치 월급에 해당하는 1,500 달러(경비 별도)를 받고 쿠바행 여객기를 탔다.

 

호텔 2곳을 폭발하는 계획에 따라서 크루즈 레온은 C4를 부츠 안의 발가락 쪽에 밀어 넣고 공항으로 향했다. 하지만 택시를 타고 가는 도중에 몸이 달아오르고 발에 땀이 차서 순간적으로 공포에 사로 잡혔다. 고온으로 가열해도 터지지 않는다는 설명을 들었지만 불안감을 억누를 수 없었다. 결국은 약국에 들러 파우더를 사서 부츠 안에 뿌리고 말았다. 그가 레이 퀴과 같은 스페셜리스트가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코스타리카를 경유해서 야간에 아바나에 도착한 크루즈 레온은 입국 대기실로 옮겨서 별도의 조사를 받게 되었다. 쿠바 공항경비원이 바지를 벗으라는 요구에 허리띠를 풀었는데 운이 좋게도 바지가 통째로 내려가 발목 아래를 모두 덮어버렸다. 만약 부츠를 벗었다면 파우더는 코카인으로 의심을 받았을 것이고, 부츠 안의 비밀이 드러났을 것이다.

 

암보스 문도스 호텔(쿠바관광청)

 

그는 헤밍웨이가 머물었던 암보스 문도스(Ambos Mundos) 호텔에 투숙하고 사전답사를 거쳐서 실행하였다. 이런 저런 요행이 따르면서 두 곳의 호텔, 카프리(Capri)와 나시오날(National)에 폭발물을 설치하고 무사히 귀국하였다.

 

쿠바 당국은 폭발 후에 별다른 인명피해가 없었고, 또 큰 소란이 일어나면 관광객 유치에 불리하기 때문에 사건의 확산을 철저히 차단하였다. 하지만 신문 보도를 통하여 카프리호텔에서 5만 달러에 상당하는 기물 파손이 발생했고, 나시오날 호텔에서는 자마이카인과 멕시코인이 가벼운 상처를 입었으며 칠레 여성이 전치 15주의 부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두 호텔에서 발생한 연쇄폭발 소식을 전해들은 마이애미는 엘살바도르 거점을 통해서 크루즈 레온에게 두 번 째로 더 큰 제안을 했다.

 

크루즈 레온은 실제 현장을 겪어 보니 인명살상용이 아니라는 것이 불확실하고 운이 따라야 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또한 야간에 입국하면 덜 위험하다는 말도 사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페셜리스트’에 대한 동경심을 버리지 못했던 크루즈 레온은 두 번 째 제안을 받아들여 7,500 달러를 챙기고 다섯 곳에 폭발물을 설치하는, 말 그대로 ‘반 카스트로 용병’이 되고 말았다.

 

 

아마추어로 드러난 행적

 

크루즈 레온의 현장검증 모습(쿠바 TV방송)

 

크루즈 레온은 두 번째 쿠바행에서 C4를 일본제 중고TV(SANYO)에 숨겨서 들여갔는데, 수화물을 찾는 과정에서 검문을 받게 되었다. 쿠바 출입국 관리가 중고TV의 구입 영수증을 요구했으나 제시하지 못하면서 3백 달러의 세금을 내게 되었다. 현장 활동비로 받은 500 달러 중에서 상당 부분이 사라졌고, 그로서는 현지에서 달러를 조달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숙소에 들어와서 TV의 일부분을 분해하여 C4를 꺼내서 다섯 등분을 하였으나, 배터리 하나가 작동을 하지 않아서 고심 끝에 공격 목표를 네 곳으로 줄였다.

 

Hotel Copacabana

 

연쇄 폭파의 첫 번째 표적이었던 호텔 코파카바나에서 C4에 타이머를 작동하는 준비작업이 수월하게 끝나서 시간적 여유가 생긴 것처럼 여겼으나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이어지면서 크루즈 레온은 점점 평정심을 잃게 되었다.

 

그는 사전에 조사한 대로 코파카바나-6분(300m)-호텔 사토-18분(1km)-트리톤 호텔과 넵투노 호텔로 이어지는 동선을 잰 걸음으로 주파하다가 온 몸이 땀에 흠뻑 젖게 되었다.

 

시간에 쫓기게 된 것은 네 곳의 연쇄폭파 시나리오 자체가 무리한 요구였던 점도 있지만, 폭발물 설치를 시도할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거나,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대형수족관 주변을 염두에 두었으나 수족관 뒤에 사람이 앉아 있어서 다른 곳을 물색하다가 다음 호텔로 이동해야 하는 시간에 쫓겨서 아무데나 집어넣는 식이었다.

 

 

파비오 디 셀모(사진). 1997년 9월 4일 오전 11시 30분 아바나의 코파카바나호텔(Hotel Copacabana)의 캐너스터 재떨이(canister ashtray)에서 폭발물이 터져서 금속파편을 맞은 이탈리아 태생 파비오 디 셀모(Fabio di Celmo·1965년생·32세)가 사망했다. 셀모는 이탈리아 제노아에서 태어나 부모와 함께 1976년에 캐나다 몬트리올로 이주한 청년으로 쿠바에 면직기 부품 등을 판매하던 사업가였다. 이 폭파사건으로 다른 여행객 1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탈리아인 1명이 사망한 사건은 이런 과정에서 발생했다. 첫 번째 표적이었던 코파카바나 호텔에서 크루즈 레온은 타이머를 작동해 놓고 여유롭게 움직이다가 예기치 못하게 시간에 쫓기게 되었다.

 

캐너스터 재떨이(canister ashtray)의 일반적 유형. 상단의 스테인레스 혹은 알루미늄 재질의 금속판은 폭파사건에서 뜻밖의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가중되자 호텔을 벗어나는 방향으로 이동하면서 실린더와 같이 생긴 금속제 재떨이의 옆 구멍에 C4 덩어리를 집어 넣었다.

 

그런데 금속제 재떨이는 폭발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폭탄’으로 둔갑하였다. 갈갈이 찢어진 금속 파편들이 비산하면서 관광객 1명이 치명상을 입고 즉사한 것이다.

 

 

La Bodeguita del Medio(Wikipedia)

 

 

 

크루즈 레온 : 사형에서 30년으로 감형

 

1999년에 크루즈 레온은 1997년~1998년에 연속적으로 호텔 등을 폭파하여 이탈리아인 1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인적, 물적 피해를 입힌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법정에서 범행 사실을 모두 시인하고 아바르카에 의해 포섭되었다고 밝혔다.

 

쿠바 당국은 반체제단체인 전미쿠바재단(Cuban American National Foundation)을 18개월 동안 15회의 폭탄공격을 가한 배후로 지목하였다.

 

2010년 12월 쿠바의 반테러매체 쿠바디베이트(Cubadebate)는 최고법원에서 크루즈 레온을 사형에서 30년으로 감형했다고 보도했다.

 

쿠바는 2003년 이후 사형수에 대한 형 집행을 하지 않았고, 2008년에 라울(Raul Castro) 대통령은 테러범을 제외한 모든 사형수들의 형 집행을 면제하였다.

 

크루즈 레온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사형을 면하게 되었다. 20대 후반에 체포되었던 그는 20년 넘게 복역하면서 이제 50대 중년이 되었고, 쿠바 최고법원의 감형으로 60세가 되기 전에 풀려날 예정이다.

 

스티븐 킴버의 'What Lies Across the Water : The Real Story of the Cuban Five'

 

 

 

 

□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 : 쿠바의 관광, 농업, 에너지 압박

 

저널리스트 모라이스(Fernando Morais)에 의하면 미국은 쿠바의 관광산업에 타격을 가할 목적으로 민간여객기에 대한 전파방해 공격을 하거나, 쿠바의 식량기반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감자 흑사병을 유발하는 생물학전을 자행했다고 한다.

 

쿠바는 주수입원인 설탕수출을 늘리기 위해 사탕수수 재배의 기계화를 80% 수준으로 끌어 올려서 연간 800만톤의 기록까지 세웠으나, 국제정세의 변화로 휘발유 공급이 어려워지면서 역설적으로 기계화의 부메랑을 맞고 연간 수확량이 300만톤 수준으로 급락했다.

 

쿠바정부는 유류 부족에 대응하여 중국에 설탕·구리를 주고 자전거 100만대를 받는 물물교환으로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다. 하지만 에너지 부족은 경제 전반은 물론이고 언론출판까지 영향을 미쳤고, 전기가 들어온 가정에서는 정전상태의 친지들이 뉴스를 들을 수 있도록 전화기를 TV 옆에 두었다고 한다.

 

 

 

□ 미국과 쿠바 : 제제와 봉쇄, 그리고 관계정상화(1959년~2016년)

 

“1959년 카스트로(Fidel Castro)가 주도한 사회주의혁명으로 쿠바공화국(Republic of Cuba)이 수립되자 미국은 이를 승인하였다. 하지만 국유화조치로 미국의 자본이 대량 몰수되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60년 10월을 기하여 쿠바에 대한 통상금지법을 선포하였고, 이듬해 외교단계를 단절하였다.

 

1961년 4월 미국 CIA가 지원하는 쿠바민주혁명전선(Cuban Democratic Revolutionary Front) 소속 1,400여명이 함정과 탱크를 동원하여 피그스만(Bay of Pigs)을 침공하였고, 1961년 10월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카스트로를 겨냥한 몽구스작전(Operation Mongoose)을 승인하였다.

 

미국은 1962년부터 전면적 금수조치를 통해서 경제제재를 가하였다. 미주기구(OAS, Organization of America States)에서 쿠바를 축출하고 교역을 금지하였다. 그로부터 36년 이 지나서야 쿠바는 남미카리브공동체(CELAC, The Community of Latin American and Caribbean States)의 33번째 회원국으로 승인되었고, 2009년에 열린 미주기구(OAS) 총회에서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원국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미국의 역대 정부는 1977년 카터행정부의 이익대표부 설치와 1994년 클린턴행정부의 이민협정을 제외하고는 제재와 봉쇄에 의한 압박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다가 클린턴행정부의 말기에 카터 전 대통령의 쿠바 방문이 이뤄졌고, 2004년에 쿠바계 미국인의 모국방문(3년 1회)이 허용되었다.

 

오바마 행정부가 동등한 파트너십에 기초한 관계정상화를 모색하면서, 2009년 미 의회는 기존의 제제조치 중에서 여행·송금·무역 등에 관한 완화조치를 의결하였다. 또한 2013년 넬슨 만델라 전 남아공 대통령의 영결식에서 오마바 대통령과 카스트로 국가원수가 조우하였고, 캐나다에서 양국의 관계개선에 대한 비밀협상이 시작되었다.

 

2014년 12월 17일 오바마 대통령은 쿠바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위한 역사적 조치들을 취할 것이라는 공식성명을 발표하고, 케리(John F. Kerry) 국무장관이 쿠바와의 관계정상화 협상에 나섰다. 이듬해 4월 파나마에서 열린 미주기구 총회에서 양국의 정상회담이 이뤄졌고, 7월에는 양국의 이익대표부가 대사관으로 격상되었다.

 

미국은 1982년부터 시작된 쿠바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을 33년만에 해제하고, 쿠바에 대한 제제를 전반적으로 완화 및 폐지하였다. 여행규제의 완화로 방문목적에 따른 12가지 비자를 발급하여 가족방문, 정부기관방문, 인도주의 프로젝트, 정보교류, 허가된 교역 등을 보장하였다.

 

이와 함께 미국인의 쿠바물품 반입한도를 400달러로 상향하였고, 쿠바로의 송금한도는 분기별 2,000달러로 상향하였다. 또한 현지 방문에는 1만달러까지 허용하고, 쿠바계 미국인이 고국의 가족 및 친척에게 송금하는 경우는 무제한으로 허용하였다.

 

금융 부문에서는 미국의 기관이 쿠바에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하였고, 미국의 신용카드와 직불카드(Debit Card)를 쿠바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미 항공사와 여행사의 양국 왕복노선과 쿠바의 국내노선 서비스를 허용하였다. 2016년 2월에 양국은 정기항공편의 1일 110회 운행에 합의하였다.

 

2016년 오바마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으로는 88년만에 쿠바를 방문하여 적대관계에 종지부를 찍었다.” (트윈 코리아 : 한반도의 지정학적 재탄생, 제2장 다른 수단에 의한 전쟁, 51쪽~54쪽)

 

그러나 2017년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중국과 베네수엘라에 대한 전략에 따라 쿠바에 대한 경제제재가 재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