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레믈의 서기장들/러시아연방

러시아 연방(РФ) : 뿌찐의 등장

twinkoreas studycamp 2021. 9. 20. 14:13

 

 

김태항(정치학 박사)

 

바리쓰 니꼴라이비치 옐찐(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6

 

 

뿌찐과 아나똘리 쏘브차크(BBC)

 

 

뿌찐의 급부상

 

1998년 12월 러시아 연방 검찰청은 “나라 전체에 만연한 부패가 국가 기강을 위태롭게 할 정도로 심각하다.”라고 밝혔다. 유리 스꾸라또프(Ю. И. Скуратов) 검찰총장은 지난 1년간 적발된 경제범죄의 규모가 180억 루블(약 9억 달러)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사실 스꾸라또프 검찰총장은 옐찐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옐찐의 핵심 이너 써클인 씨미야(가족)는 일개 검찰총장인 스꾸라또프가 자신들의 부패 혐의를 계속 파헤치는 것에 대해 심기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옐찐에게는 연방보안국(ФСБ) 장관인 뿌찐이라는 든든한 방어막이 있었다.

 

유리 스꾸라또프(ru.wikipedia.org)

 

1999년 2월 초, 옐찐은 검찰총장의 건강을 이유로 그의 해임을 제안했으나 러시아 상원은 해임안을 부결시켰다. 옐찐의 검찰총장 해임안이 극히 궁색한 이유는 마치 시한부의 말기 암 환자가 가벼운 감기 환자의 건강을 걱정해주는 격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해임안이 부결된 당일 밤 국영 TV 방송인 에르떼에르(РТР)는 심야 뉴스에서 화질은 조악했지만, 스꾸라또프와 비슷하게 생긴 남성이 두 명의 매춘부와 나체 상태로 노닥거리면서 야릇한 시간을 보내는 장면을 내보냈다. 일부 기자들이 방영을 반대했지만, 미하일 슈비드꼬이(М. Е. Швыдкой) 사장이 앞장서서 방영 결정을 주도했다. 이후 그는 뿌찐 정권에서 문화부 장관이 된다.

 

시중에서는 연방보안국(ФСБ) 장관과 매우 닮은 자가 비디오의 출처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뿌찐을 배후 인물로 지목한 것이다. 여론은 들끓었다. 침대에서의 행위가 나쁘냐, 아니면 이것을 몰래 촬영하여 방송에 나가도록 한 게 더 나쁘냐를 두고 러시아 전체가 시끌벅적했다. 사람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 이것은 전형적인 까게베의 수법이라고 수군거렸다.

 

옐찐과 마찬가지로 뿌찐 또한 스꾸라또프에게 감정이 좋지 않았다. 뿌찐의 레닌그라드(현 뻬쩨르부르크) 국립대 법대 은사이자 정치적 보스이며, 뻬쩨르부르크 시장인 아나똘리 쏘브차크(А. А. Собчак)를 수사한 장본인이 스꾸라또프였기 때문이다. 아울러 뿌찐으로서는 스꾸라또프를 제거해야 본인을 비롯한 뻬쩨르부르크 세력이 모스크바에서 건재할 수 있고, 옐찐에게도 충성스러움을 보일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러시아 연방 헌법에 따르면, 검찰총장의 인사는 상원의 승인사항이다. 따라서 스꾸라또프는 상원의 지지로 얼마간 총장 자리를 지킬 수 있었지만, 사실상 식물 총장에 불과했고, 옐찐의 씨미야 세력은 검찰 수사라는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앓던 이를 뽑아준 뿌찐에 대해 옐찐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불문가지일 것이다.

 

1999년 5월 12일 옐찐은 경제회복의 속도가 늦다는 이유로 쁘리마꼬프 총리를 해임했다. 그러나 해임의 직접적인 이유는 당시 쁘리마꼬프의 인기가 상종가를 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그가 3년 동안 범죄와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전쟁을 주도할 주역으로 스꾸라또프 검찰총장을 지명했기 때문이다.

 

스꾸라또프는 알리가르히의 두목 격이자 옐찐 씨미야의 좌장 격인 베레좁스끼와 옐찐의 딸 따찌야나를 겨냥했는데, 끄레믈로서는 좌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쁘리마꼬프를 강제로 밀어내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밖에 없었다.

 

스쩨빠신(er.ru)

 

노회한 옐찐은 뿌찐을 총리로 임명하지 않고, 전직 연방보안국 장관 출신인 스쩨빠신(С. В. Степашин) 제1부총리 겸 내무장관을 총리 서리로 임명했다. 결과적으로 정치적 징검다리에 불과했던 스쩨빠신은 3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해임되었으며, 8월 9일 드디어 뿌찐이 총리로 지명되게 된다.

 

스쩨빠신은 추바이스가 추천한 인물이지만, 존재감이나 개성이 약한 인물이었다. 늙고 병들고 의심이 많은 옐찐으로서는 자신을 지켜줄 젊고 강한 인물이 필요했다. 47세의 활력이 넘치고 강단이 있는 뿌찐이야말로 적임자였다.

 

옐찐이 뿌찐을 선택한 이유는 또 있었다. 강제로 경질당한 쁘리마꼬프가 모스크바 시장인 유리 루쉬꼬프와 손을 잡고, 연말에 실시 예정인 두마 선거 승리를 위해 선거연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높은 인기를 고려할 때, 이들이 총선에서 이길 가능성은 명약관화했다. 더욱이 이를 발판으로 쁘리마꼬프나 루쉬꼬프 중 한 명이 대통령이 될 경우, 옐찐의 운명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제 옐찐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것보다 퇴임 후 안전을 더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다.

 

옐레나 바투리나(ru.wikipedia.org)

 

연방보안국 장관 뿌찐은 총리에 오르기 전인 4월에 이미 루쉬꼬프 시장의 부인인 옐레나 바투리나(Е. Н. Батурина)가 운영하는 회사를 대대적으로 수사하면서 루쉬꼬프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러한 뿌찐의 기특한 행보를 옐찐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루쉬꼬프 역시 “불행하게도 연방보안국이 조국을 위해 일하는 게 아니라, 끄레믈을 위해 일하고 있다.”라고 맹비난했다.

 

결국 뿌찐은 스꾸라또프 제거와 루쉬꼬프 견제에 성공함으로써 자신의 소속인 뻬쩨르부르크 세력과 옐찐의 씨미야 세력의 위기를 구한 최대의 공로자가 되었다. 이미 1999년 3월부터 국가안전보장회의 서기도 겸임하고 있었고, 8월에 총리로 취임하면서 사실상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지만, 뿌찐을 바라보는 정치권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어차피 3개월짜리 총리에 불과하고, 무엇보다도 햇병아리같이 무명에 가까운 뿌찐의 존재감 때문에 경질은 시간문제라고 본 것이다.

 

 

Black Widows

 

 

2차 체첸전쟁

 

 

공교롭게도 뿌찐이 총리로 지명된 시점에 체첸의 원리주의 무장세력이 인근의 다게스탄 공화국을 침공한 사건이 발생했다. 체첸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다게스탄 공화국은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체첸과는 달리 독립을 선언하지 않았다.

 

문제는 다게스탄 공화국 주민 대다수가 무슬림이지만,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인종 분포를 보이고 있고, 1990년대에 들어서는 체첸과의 합병 여부를 두고 주민들 간에 찬반 논란이 지속됐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체첸 강경파가 다게스탄에 이슬람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침공을 한 것이었다.

 

이에 뿌찐은 옐찐에게 총괄적으로 군사 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절대 권한을 달라고 요구했다. 사실상 대통령의 군 통수권을 넘겨달라는 말이었는데, 옐찐은 즉각 동의했다. 그리고 뿌찐은 군부에 대해 2주일을 줄 테니 체첸을 정상화하라고 다그쳤다. 뿌찐의 전투적 스타일이 잘 나타난 장면이었지만, 당시 뿌찐의 신분은 두마에서 총리 인준을 받기도 전인 총리 서리였다.

 

뿌찐은 8월 16일 두마의 인준을 받게 되는데, 이전의 총리들에 비해 가장 적은 찬성표를 받았다. 의원들이 보기에 뿌찐은 과도기적인 인물에 불과했고, 조만간 사라질 임시 총리로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뿌찐의 언명처럼 2주 만에 체첸 전사들이 장악했던 지역을 러시아군이 탈환했다. 이에 뿌찐은 언론인들을 대동하고 다게스탄으로 날아가는 깜짝쇼와도 같은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는데, 이는 수시로 병원에 입원하느라 TV 화면에서 사라지는 종합병동 옐찐의 모습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체첸 전사들의 다게스탄 침공을 수습한 러시아군은 체첸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 행동은 고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9월에 들어서 다게스탄 지역과 모스크바에서 민간인들을 겨냥한 아파트 폭파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자, 러시아 전 지역에서 체첸 무장 세력의 테러에 대한 공포가 퍼졌다.

 

테러에 대해 옐찐 정권의 자작극이라는 주장도 등장했지만 공론화되지 못했고, 폭발물의 성분이 아프가니스탄의 테러 조직이 제조한 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1999년 11월 말에 미 주간지 타임이 보도하자 이들과 연계된 체첸의 원리주의 세력들이 범인으로 규정되었다.

 

러시아군은 1999년 12월 중순부터 체첸의 수도 그로즈니 점령 작전을 개시하여 2000년 2월 초에 그로즈니 점령에 성공했고, 대통령 권한대행인 뿌찐은 2월 6일 TV 방송을 통해 그로즈니 진압 작전이 완료됐다고 발표했다. 참고로 1999년 8월 기준 체첸의 인구는 10년 전보다 80만 명이 줄어든 32만 명에 불과했다.

 

그로즈니 함락은 3월 26일로 예정된 대통령 선거를 앞둔 뿌찐에게 절대적인 호재였다. 그리고 1차 체첸전쟁과는 달리 이번 작전에 대해 여론은 전폭적인 지지 양상을 보였고, 뿌찐은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체첸에서의 대규모 군사 작전은 2002년에 종결되었지만, 게릴라 전쟁은 계속되었고, 모스크바에서는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이 벌어져 민간이 사상자가 다수 발생하게 되었다. 자살 폭탄 테러범들은 ‘검은 미망인(black widows)’으로 불렸는데, 이들은 사망한 체첸 전사들의 미망인들이었다.

 

 

옐찐의 깜짝 사임

 

뿌찐은 총리로 임명된 뒤 법과 질서의 유지에 주안점을 뒀으며, 체첸에서의 단호함과 과단성으로 지지율이 급상승했다. 총리에 임명된 1999년 8월, 1%에 불과했던 지지율이 연말에는 52%까지 치솟았다. 무명의 뿌찐에게 배팅한 옐찐의 도박이 성공한 것이다.

 

 

1999년 12월 19일에 치러진 두마 선거에서도 여당인 ‘이진스트바(Единство; 단합)’ 세력이 러시아 연방 공산당에 이어 2위를 차지했지만, 쁘리마꼬프와 루쉬꼬프가 창당한 ‘조국 전 러시아(Отечество-Вся Россия)’ 세력들이 여당에 동참함으로써 뿌찐은 하원에서도 과반수에 달하는 거대 여당을 확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뿌찐이 대권을 향해 가는 노정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화룡점정을 찍어준 인물은 옐찐이었다. 그는 20세기의 마지막 날인 1999년 12월 31일 대통령직의 조기 사임을 발표함으로써 지난 8년여에 걸친 집권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뿌찐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할 것이라면서 자신의 후계자임을 공식화했다.

 

대선이 3개월 앞당겨지는 선거 일정의 변화는 뿌찐의 대항마들이 세력을 결집할 시간을 축소한 것이기 때문에 뿌찐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러시아인들은 TV 화면에서 옐찐이 사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환호했다. 마치 술주정뱅이 같은 성가신 사람이 사라진 것처럼 기뻐하면서, 이들은 보드카를 마시며 20세기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뿌찐이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옐찐을 비롯하여 러시아 대통령이 퇴임 후 어떠한 형사소추나 구속, 수색, 조사 등을 받지 않도록 면책특권을 부여한 것이었다. 아울러 옐찐의 씨미야 세력의 돈세탁과 부패 혐의에 대한 수사도 즉각 중단되었다.

 

총리에 취임한 지 불과 4개월 만에 뿌찐은 놀라운 성과를 이뤄냈다. 무엇보다도 4년 전에 국내외적으로 치욕을 안겨주었던 체첸 문제를 사실상 종결시켰고, 불가능해 보였던 국가 두마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국내 정세의 안정과 더불어 경제 상황도 호전되고 있었다.

 

사실 많은 정치인 그리고 정치 전문가들은 뿌찐이, 국민의 대다수가 옐찐에 대해 엄청나게 염증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옐찐의 후계자로 비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무덤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뿌찐은 이러한 예상을 비웃듯이 짧은 시간 동안 놀라운 반전을 가져왔다.

 

외형적으로도 옐찐에 비해 키도 작고 상당히 작은 체구이지만, 뿌찐은 특유의 냉정한 카리스마와 결단력으로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갔다. 21세기의 뾰뜨르 대제로 불리기도 하는 뿌찐은 소비에트 연방 붕괴 이후 제3세계 수준으로 급전직하하던 혼돈의 러시아를 다시 추슬러 열강의 대열에 복귀시켰다. 뿌찐에 대해 호불호가 있더라도, 최소한 이러한 사실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끝>